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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약국에서 남편 얘기했을 뿐인데…"

[양지훈의 법과 밥] 사전 선거 운동

광역의원에 출마하려는 예비 후보 A에게는 배우자 B가 있습니다. B가 선거법상 선거 운동 기간 이전에 평소 다니던 약국에 들러 약을 구입하면서, 약사에게 '남편 A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하는데 같은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는 취지로 말했습니다. 배우자 B의 행위는 사전 선거 운동으로 처벌받는 것일까요?

위 사례는 실제로 1990년 초에 광주 도의원 선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서 쟁점은, 광역의원(도의원)에 출마하려는 A를 위해 배우자인 B가 약국에 들어가 했던 말이 과연 '선거 운동'에 해당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먼저 '선거 운동'과 '선거 기간'에 대해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위 사건에 실제 적용된 법률은 지방의회의원선거법인데 그 내용이 현행 공직 선거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므로, 앞으로의 논의도 현행 공직 선거법을 기준으로 하겠습니다).

우리 공직 선거법은 선거 운동의 정의를 "당선되거나 당선되게 하거나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한 행위"라고 정의합니다(공직 선거법 제58조 제1항). 그리고 선거 운동이 가능한 기간은 "후보자 등록 마감일 후 6일부터 선거일"까지(통상 2주 이내)로 정합니다(공직 선거법 제33조).

사례에서, B는 A가 후보로 등록하기 전에 약국에 들러 남편을 도와달라는 말을 한 것이어서 선거 운동 기간에 대해서는 다툴 수 없습니다. 문제는, 평소 다니던 약국에서 B가 약사에게 했던 '남편 A가 이번에 선거에 출마하는데 같은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이 과연 선거 운동에 해당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 하급심과 대법원의 엇갈린 판결

하급심은 B의 행위가 선거 운동에 해당하고, 법정 선거 운동 기간 이전에 행위가 있었기 때문에 위법하다는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법원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B가 '남편이 출마하는데 같은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는 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언어 관행이나 예절에 비추어 볼 때 의례적인 인사를 한 것이지 선거 운동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리고 이 판단의 주요 증거로, B가 평소 자주 이용하던 약국에 갔다는 수사 기록과 실제로 약사로부터 청심환을 구입했었다는 증언이 제시되었습니다.

만약 B가 약국에 들렀다가 깜빡하고 청심환을 구입하지 않은 채 잡담만 나누고 나왔다면 약국 방문 목적의 '불순함'이 인정되어 사전 선거 운동으로 처벌받았을지도 모르지요. 이를 의식한 듯 대법원도, 판결문에서 배우자 B가 애초에 남편의 당선을 목적으로 하여 약사에게 표를 얻기 위해 '김 씨니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면 사전 선거 운동에 해당한다고 설명합니다.

대법원 판결의 내용이 왠지 모르게 군색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판결 내용은 법 해석의 문제가 아니라 입법으로부터 비롯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입법 당시부터 공직 선거법에 따라 허용되는 선거 운동은 매우 제한적으로 설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허용되는 선거 운동의 범위를 넓혀 놓고, 선거 운동 기간도 더 길게 설정한다면 문제될 게 없습니다.

미국, 독일은 선거 운동 기간 제한이 없음

우리 공직 선거법은 허용되는 선거 운동의 범위를 좁혀 놓았을 뿐만 아니라, 선거 운동을 합법적으로 할 수 있는 운동원의 범위 또 선거 기간도 14일로 제한했습니다. 선거 기간만 놓고 볼 때, 미국,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오스트레일리아) 등의 경우에는 아예 선거 운동 기간을 법률로 정하지도 않습니다. 미국은 사전 선거 운동 규제 조항 자체가 존재하지 않고 독일의 경우에는 정당 간 협정을 통하여 선거 기간을 자율적으로 규제합니다. 주요 국가 가운데 한국, 일본만이 선거 운동 기간을 2주 내로 제한하고 있을 뿐입니다.

물론, 선거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하는 것 역시 부작용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공직 선거법은 선거 기간이 짧을 뿐 아니라 선거 운동 내용도 지나치게 제한하고 있다는 문제가 더해져 있습니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발간한 선거 제도 비교 자료집(<각국의 선거 제도 비교 연구>(2015년 11월))에서도 "대부분의 민주주의 선진 국가에서는 선거 운동 기간에 대한 규제가 없고,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선거 운동 방법에 대해서도 규제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전광석화처럼 지나갈 이번 국회의원 선거, 13일 후 당선자들이 국회에서 어떤 일을 할 것인지 차분히 논의해볼 일입니다.

양지훈 변호사는 법무법인 덕수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위 글의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문의 사항이 있거나 법률 상담을 원하시는 분은 메일(jhyang@iduksu.com) 또는 전화(02-567-6477~8)로 연락을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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