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하자, 연장 근로 말고!"
"올랑드, 당신은 끝장났어. 청년들이 거리에 뛰쳐나왔다고!"
지난 3월 9일 고등학생, 대학생들과 노동자들이 거리 시위에 나섰다. 파리의 레퓌블릭(공화국) 광장을 비롯한 프랑스 전역에서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의 숫자를 주최자 측은 40만~50만이라고 추산했는데 내무부는 22만 4000명이라고 발표했다.
(흔히 시위 참여자의 숫자는 시위를 주최한 측과 내무부(경찰)가 발표한 두 숫자의 산술평균을 내면 된다고 말한다. 이번 프랑스 시위 참여자는 두 숫자의 산술평균인 '31만~36만 명'으로 보면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주최 측 발표 숫자는 실제보다 많고 내무부 발표 숫자는 실제보다 적다.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덧붙이자면, 20여 년 전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인데 주최 측과 내무부 발표 수치가 똑같은 적이 있었다. 경찰이 시위에 나선 날이었다. 프랑스 경찰이 노조결성권을 갖는 것은 물론, 제한적이지만 단체행동권을 누리는 것은 "사회정의의 가치가 질서의 가치에 우선한다"는 프랑스 공화국의 기조가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경찰이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시위에 나섰으니 두 숫자가 똑같았던 것이다.)
시위를 준비하는 프랑스 대학의 풍경을 <르 몽드>는 전했다.
"올랑드가 우리에게 전쟁을 선포했다…."
시위가 있기 전인 3월 4일 렌-2대학의 사회학과 교실 칠판에 이렇게 적혀 있었고, 학생 식당 앞에서 몇몇 학생이 "정부는 노동법 개정안을 통하여 젊은이들에게 전례 없는 공세를 취하고 있다… 3월 9일 12시에 항의 시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한다"는 내용이 담긴 유인물을 나눠 주었다고. 시위에는 노동자들도 참여했지만 대부분은 고등학생, 대학생 등 청춘들이었다. 20만 명이 넘는 프랑스 청춘들이 사회당의 마뉘엘 발스 총리와 엘 콤리 고용장관이 내놓은 노동법 개정안에 반대하려고 파리를 비롯한 툴루즈, 릴르, 렌 등 전국 대도시에서 시위에 나선 것이다. 노동법 개정안이 자신을 겨냥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법안이 담고 있는 몇 가지를 보자. 한국인들에게 무척 익숙한 내용들이 눈에 들어올 것이다. '비정규 견습생의 경우, 노동시간을 연장할 수 있다', '경영상의 이유로 해고를 용이하게 할 수 있게 한다', '노동시간 배치를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정할 수 있도록 한다', '해고 남용에 따른 배상금에 제한을 둔다' 등. 언뜻 보아도 친기업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회당 정권이 이런 고육지책을 내놓은 배경을 여러 가지 꼽을 수 있지만, 그중 가장 절박한 배경은 청년 실업 문제다. 18~24세까지의 실업률은 경제활동인구의 전체 실업률 10.3%에 비해 24%로 두 배가 넘는다. 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의 비정규직 비율도 대단히 높다. 2012년 사기업에 취업한 25~49세의 노동자 90%가 정규직이었던 것에 비해, 15~24세 노동자는 정규직 비율이 절반도 되지 않았다. 30년 전에는 83%가 정규직이었는데…. 이렇게 프랑스 청년들에게도 장밋빛 미래는 점점 더 먼 얘기가 되고 있는데 이 점은 시위에 참여한 청년들의 말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회당 정권의 배신
"2012년, 사회당의 프랑수아 올랑드가 대통령에 당선된 날 저녁에 우리는 바스티유 광장에 모였다."
만 24세의 소피안느와 쥘리, 그리고 25세의 옹블린에게 축제의 그날은 오늘 씁쓸한 추억이 되어 돌아왔다. 그들은 좌파정권에 대한 전반적인 실망을 드러냈다. 노동법 개정안에 반대하려고 시위에 참여했지만 실상 노동법은 사소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쓰나미가 준비되어 있다. 나는 이 정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대통령 선거를 1년 앞두고 지지자들에게 등을 돌리다니…."
옹블린의 말을 받아 쥘리는 이렇게 말했다.
"실제로, 좌파가 집권한 게 아니라는 걸 금세 알아차렸다. 이 정부의 사회경제 정책은 물론 안보 정책을 보면 알 수 있지 않느냐… ."
집권 사회당은 대통령 선거가 15개월 앞으로 다가온 시점에 젊은이들의 시위를 가볍게 바라볼 수 없다. 10년 전 정부가 최초고용계약법(CPE)를 내놓았을 때 그 법안에 반대한 첫 시위에 20여만 명이 참여했을 뿐이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는 맹렬해졌고 결국 법안은 철회되었다. 당시 '최초고용계약법'은 기업이 25살 미만의 젊은이를 처음 고용할 때엔 비정규직 기간을 2년까지 허용한다는 내용이었다.
한국에서는 25살 미만에 한정하지 않고 첫 고용에는 모두 2년 동안의 비정규직 기간을 두기로 했던 것이 노무현 정권 때 노동계의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관철되었던 '비정규직 보호법'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그 법이 비정규직 '보호'법이 아니라 비정규직 '양산'법이라는 점은 금세 사실로 드러났는데, 지금 박근혜 정권은 그 기간을 2년에서 다시 4년으로 연장하려는 내용을 파견제 확대와 함께 강행하는 중이다.
그러면 프랑스의 사회당 정권이 신자유주의적인 고용정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한국과는 달리 노골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하고 이번 시위에서 보듯이 청년 세대와 노동계의 반대 시위 앞에서 주춤해야 하고 노동총동맹(CGT)의 총파업 시위가 예정된 3월 31에 얼마나 많은 청년 학생들이 참여하는가에 따라 법안 철회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다른 대안이 없기 때문인가?(해당 글은 3월에 작성되었습니다. 편집자)
이 물음과 관련하여 최근에 사회당 정책에 반대하여 사회당을 탈당한 푸리아 아미샤이 의원의 발언은 경청할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43세인 그는 15세 때 사회당에 입당했고, 이번 시위에도 주도적으로 참가한 프랑스대학생전국연합(UNEF)의 대표 출신이다. 왜 사회당을 탈당하느냐는 르 몽드 기자의 질문에 "그들은(사회당은) 나라의 행복한 미래를 향한 별 신념도 약속도 없는, 다만 선거용 기계가 되었다. 그들은 차라리 무능한 편이 낫고 국민전선처럼 위험해질 수도 있다. 권력과 자원을 수탈하는 우리 체제는 민주, 사회, 환경을 파탄으로 몰아갈 것"이라고 맹렬히 비판하면서 "프랑스는 사회당 우파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신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통치되고 있다"고 사회당이라는 허울에 숨은 권력의 실체를 까발렸다.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의 족쇄?
프랑스의 드골은 "영국은 미국이 유럽에 보낸 트로이의 목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에 빗대 "유럽연합은 신자유주의의 족쇄다"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유로존은 이른바 '안정협약'에 의해 '재정 적자를 연 3%를 넘지 않을 것'과 '국가부채를 GDP 대비 60%를 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을 가입국에 부과하고 있다. 이를 두고 각 나라에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신자유주의의 올가미에 가둔 것이라고 비판하는 분석가들이 적지 않다. 테크노크라트들이 점령하고 있는 유럽연합에 통화정책과 재정정책을 저당 잡힌 각 국가가 경제정책에서 운신할 수 있는 폭은 좁을 수밖에 없다. 이번에 프랑스 정부가 청년 실업 대책이라고 내놓은 노동법 개정안도 그런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함께 더욱 거세게 밀려온 신자유주의와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 극우 정치세력의 준동, 장기 침체에 빠진 세계 경제 아래 유럽의 청년들도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미래가 밝기는커녕 더욱 암울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다. '헬조선'은 젊은이들이 처한 현실과 그런 현실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인식을 동시에 표상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헬조선'에는 한탄과 자조는 있을지언정 분노의 감정은 빠져 있는 게 아닐까? "사랑을 하자, 연장 근로는 말고!"라는 구호에 담긴 프랑스 젊은이들의 발랄함 속에는 아직 희망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열정 같은 게 담겨 있다고 말하면 지나친가.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함께 거리에 쏟아져 나온 것부터 각자 책상 앞에서 헬조선으로부터의 각자도생을 모색하는 한국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면모가 있다고 말한다면 이 또한 지나친가. 한국의 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본 적이 오래됐다. 이제는 젊은이가 아닌, 그때의 젊은이들만 지금도 거리에 나온다. 어쨌든, 아직은….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의 '나라 밖 이야기'는 <작은책>과 필자의 동의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프레시안>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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