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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나라>, 관람하지 말고 목격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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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나라>, 관람하지 말고 목격하라

[ACT!] 청소년이 본 다큐 <나쁜 나라>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떠나보낸 유가족들의 과정을 기록한 독립 다큐멘터리 <나쁜 나라>가 지난해 말 개봉한 뒤 좋지 않은 상영 여건에도 불구하고 2만 여명이나 극장에서 관람했습니다. 사건 발생 후 2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세월호 사건에 대한 관심이 여전하다는 뜻이겠죠. 하지만 아쉽게도 세월호 사건의 가장 큰 당사자인 '청소년’의 입장에서 세월호 사건을 바라보는 시도는 많지 않습니다. <ACT!>에서는 청소년이 만드는 마을미디어 '우마미-틴'에서 활동하는 남상백 씨에게 청소년의 시선으로 <나쁜 나라>를 바라본 소감을 들려주길 부탁했습니다. 조금은 신선하고 독특한 리뷰, 한 번 같이 보실까요?

세월호 참사는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일어났다. 2014년 4월 16일. 수요일.
우리나라가 감당하기 힘든 아픔이었다. 교회에서 의자를 부여잡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2014년 한 해 동안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울광장에 늘어섰던 리본들과 추모글귀들 사이에서도 실감하지 못했었다. 리본에 글을 써 나무에 달면서도 실감이 어려웠다. 너무 슬퍼서 실감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특별법이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을 느꼈다.

우리에게는 특별법에 대한 정보가 제한되어 있었고, 대입 특례에 있어 몇몇 친구들이 분노를 보였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세월호 참사 초기에 보여준 언론과 몇몇 비청소년(성인)의 행태에 우리는 불신과 분노만 쌓였었다.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결단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2015년 4월에는 학급회의에서 세월호 추모를 위한 행동을 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우리 반 아이들에게 감사했다. 다수의 아이들이 동의했다. 노란 종이에 희생자와 유가족을 향하는 편지를 쓰고, 학급 임원들은 우리 반 아이들이 매달 노란 리본을 만들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학급 게시판에 단원고 희생자들의 얼굴을 게시하셨다. 세월호 참사가 있던 그 주에 조회 시간마다 추모 영상을 시청했다. 담임 선생님의 눈물을 처음 본 것 같다. 우리 학교는 미션스쿨이었기 때문에 추모예배도 드렸다. 목이 많이 메던 날이었다. 2시간을 기다려 광화문 광장에서 분향을 했다. 수많은 시민단체가 행진을 하고자 했지만 가로막혔다. 시위에도 뜨겁게 참여하리라 결심하고 간 자리였지만, 막상 차벽과 경찰들을 마주하니 겁이 나더라.

2014년~2015년 상반기까지 내가 몸담고 있던 청소년참여위원회에서는 청소년 안전'이 가장 큰 주제였던 것 같다. 1박 2일 워크숍은 물론이고 회의 시작 전에도 안전교육을 진행했다. 안전교육까지는 좋았으나, 온갖 청소년 행사, 축제에도 '안전'이 들어갔다. 안전도 당연히 중요하지만, 아직도 비청소년들이 청소년을 종속된 객체로 보는 것 같아 조금 불편했다.

세월호 참사 이후로 돈을 모아 소녀상을 세우고, 자기 학교의 비리를 눈감지 아니하고, 국가의 민감한 사항들에 거리러 나서는 등 청소년들의 자발적인 활동은 더더욱 늘어났지만 아직도 청소년들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아쉬움이 많다. 청소년이 주체가 되어 진행된 저런 활동들조차도 '성숙한 행동(청소년들이 미성숙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기에)', '공부보다 못한 행동' 등으로 취급되는 그런 시선들이 나는 불편하다. 청소년의 저런 움직임과 목소리들도 당당히 비청소년들의 행동 못지않은 인정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한편 세월호 참사는 나에게는 당연한 것들에 대한 질문으로 다가왔다. 국가가 국민을 구하는 것은 당연한 게 아니었나? 이런 아픔을 방지하기 위해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것을 당연한 게 아닌가? 당연한 것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사실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세월호의 눈물을 헛되게 하지 않았으면 한다. 청소년들도, 국민들도 함께 흘린 눈물이었으니.

▲ 영화 <나쁜 나라>의 한 장면

이 영화는 관람하는 영화가 아니다

영화 <나쁜 나라>를 보고 처음 든 인상은 담담함이었다. 과장해서 말해보자면 건조하게 느껴질 정도로 감동적인 연출도, 극적인 반전도, 멋진 주인공도 없었다. 영화적 요소들이 거의 없어 누군가에게는 지루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었겠지만, 오히려 그렇게 담담하게 그려낸 모습들이 나를 더 집중하게 했다. 영화 <나쁜 나라>는 그렇게 담담하게 나를 그 '현장'으로 초대했다. 그리고 팽목항부터 국회까지, 단원고에서 광화문 광장까지 유가족과 현장을 목격하게 해 주었다.

영화에서 든 인상과 별개로 <나쁜 나라>에서 등장하는 유가족들은 '10억'을 받았다는 모 보험 광고에 나오는 부인처럼 담담하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담담하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웃고, 떠들고, 짜증내고, 화내고, 심지어 욕설까지 뱉는 유가족들의 모습. '세월호 유가족들도 이제 국가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며 얌전한(?) 유가족을 요구하는 말도 안 되는 몇몇 어른들의 주장에 잠시나마 넘어갔었던 건지, 정말 부끄럽게도 담담하고 얌전한 유가족을 내심 기대했던 나에게는 꽤나 충격이었다. 나름대로 시위에도 참여하고 서명도 하고 SNS에 공유도 하면서 유가족들을 잘 이해했다고 생각했던 나는 내가 얼마나 멍청했는지 또 유가족분들께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고 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책감이 들었다.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나쁜 나라>는 저런 생생한 유가족 분들의 모습에서 우리 부모님의 모습을 보게 해 주었다. 연약하고 아픔을 알지만, 자식들이 있기에 그 아픔을 웃음으로 삼키는 그런 내 엄마,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더 안쓰러웠다. 자식들을 위해 굽히고, 참고, 때로는 울면서도 자식만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웃어 보이는 그런 부모님들. 그런 부모님들의 모습이 보여 영화에 더 공감할 수 있었다.

국회에서, 진도에서, 광화문에서, 청운동에서 진상 규명을 외치는 유가족들의 모습들에 한없이 죄송스러워졌다. 내 생각보다 더 많은 장애물과 부딪치고 있었으며, 더 많은 아픔들을 삼키고 있었다. 손에 입을 맞추는 유민 아빠를 세월호 추모리본을 달고 품어주던 교황의 모습이 국회에서 유가족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며 매몰차게 들어가 버린 대통령의 모습과 겹쳐 너무나 씁쓸했다. 삼보일배 역시 너무나 처절했다. 기사로, 사진으로 본 모습보다도 처절했다. 부모라서 더 처절했다. 부모이기에 더 처절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이들을 살려달라고 도와달라고 시민여러분 도와달라고 목이 쉬고 입이 부르트도록 외치시는 그분들을 그냥 가서 안아드리고 싶었다.

성경의 복음서를 보면 '불량 재판관 이야기'가 나온다. 뇌물을 사랑하고 편파 판정을 즐겨하는, 신도 사람도 무서워하지 않고 존중하지 않는 그런 재판관이다. 어느 날 그에게 과부 한명이 달려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통사정을 한다. 내게 억울한 일이 있다고, 내 원수가 나의 권리를 빼앗았다고. 불량한 재판관은 당연히 무시했다.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지나고 해가 바뀌어도 과부는 청원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재판관은 결국 혼잣말로 '내가 신도 사람도 신경 쓰지 않지만, 과부가 자꾸 나를 귀찮게 하니 권리를 찾아주지 않으면 내가 더 힘들겠다.'는 결론을 내리고 과부의 청원을 들어준다는 해피엔딩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영화를 보다 보면 그 재판관이 그리워진다. 이상했다. 영화에서는 일어나면 일어날수록 저항하면 저항할수록 유가족들이 밀려난다. 여론에 밀리고 교묘한 합의에 밀리고 이리저리 밀려난다. 피해자가 목소리를 높일수록 묻히고 높이지 않아도 묻히고, 합법적으로 행동하고 움직여도 콧방귀 하나 뀌지 않는다. 하물며 불량한 재판관조차도 한 사람의 악 받친 외침을 들어주는데, 이 나라는 수백만의 서명도 자식 잃은 부모들의 외침에도 응답은커녕 박대한다. 순수한 연대와 조직을 부수고 해체하려고 한다. 나 같은 청소년들에게까지 왜곡된 정보들로 유가족들을 적대하게 만든다. '나쁜 나라'이다. 불량한 재판관보다도 더 나쁜 '나쁜 나라'의 모습에 막연한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다.

이 '나쁜 나라'에서 필자 혹은 지인에게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도 무섭다. '헬조선'으로 칭해지는 이 땅에서 도망을 치려고 하는 또래들도 많다. 하지만 영화 <나쁜 나라>에서는 진도에서부터 영정을 들고 행진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비춰주며 영화를 마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꼭 내게 함께하자고 외치는 것 같았다. <나쁜 나라>는 우리를 그 현장에 초대하고 필터 없는, 왜곡도 없는 생생한 모습들을 보여주며 그 현장에서 판단하게 한다. 또 선택하게 한다. '나쁜 나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끝없는 광야를 함께 걸어갈 것이냐? 아니면 '나쁜 나라'를 외면하고 나의 삶을 누릴 것이냐고 질문하고 선택하도록 이끌었다.

나는 당연히 광야로 갈 것이다.

<나쁜 나라>. 이 영화를 절대 관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영화는 목격하자. 유가족들의 모습을, 유가족을 무시하는 우리의 모습을, 또 이 '나쁜 나라'의 민낯을.

<나쁜 나라>를 통해 똑똑히 목격하자.

*이 글은 진보적 미디어운동 연구저널 [ACT!] 97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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