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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내가 알파고를 응원한 까닭은…

[기자의 눈] 언제까지 두뇌의 서열로 사회적 위계 정해야 하나

이세돌 9단이 달라졌다. "대충 뒀는데 이겼다"라던 거만한 천재는 이제 없다. 자신을 꺾은 알파고 개발자에 대해 "존경한다"고 했다. 이창호, 조훈현에 대해서도 "존경하지는 않는다"라고 했던 그였다. 후배 기사(棋士)들의 조언에도 귀를 열었다. 바둑의 발상지인 중국에 가서도 "중국 기보(棋譜, 바둑 둔 기록)를 연구해 본 적 없다"라던 그였다.

불과 일주일만에 있었던 변화다. 흘러넘치는 천재성을 감당 못해 휘청거리던 청년으로만 그를 기억하던 이들에겐, 그게 더 충격적이다. 인간 천재가 기계 앞에서 겸손해졌다. 이세돌은 기계 덕분에 어른이 됐다.

천재와 창의력에 대한 환상이 깨졌다


컴퓨터가 초보적인 추론 능력을 갖게 된 게 십년 전이다. 단순한 계산기, 정보 저장소 역할에서 벗어났다는 뜻이다. 이제는 컴퓨터가 '생각'을 한다. 그러니까 인간 전문가의 역할을 컴퓨터가 대신하는 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법관, 엔지니어, 의사, 회계사 등의 역할 가운데 일부를 컴퓨터가 곧 대체하리라는 전망 앞에서도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컴퓨터가 인간 천재를 넘어선 장면에선 무척 놀랐다. 인간 전문가는 교육과 훈련으로 길러낼 수 있다. 컴퓨터가 그 과정을 따라하는 건 쉽게 상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 천재가 어떻게 태어나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런데 벌써 컴퓨터가 인간 천재를 꺾었다.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있을까. 두렵고 궁금하다.

15일 마지막 대국을 마친 뒤, 이세돌이 기자들을 만났다. 그는 "이번 대국으로 인간의 창의력이라든지 바둑 격언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라고 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이세돌은 인간보다 더 창의적인 바둑을 두는 기계와 싸워야 했다. 창의력이 인간의 전유물이라거나, 바둑 격언에 수천 년 동안 쌓인 지혜가 응축돼 있다는 통념에 대해 당연히 의문이 들었을 게다.

'통념'이라는 모래주머니 없이 뛴다면?

기계가 인간보다 더 창의적인 건, 사실 자연스런 일이다. 창의성이란 기존 통념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발상에서 나온다. 그런데 기계는 통념 자체가 없다. 그저 목표를 향한 가장 빠른 길을 찾아낼 뿐이다. 관습이나 편견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결과만 보면, 인간보다 더 자유로운 발상을 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내놓은 자유로운 발상, 창의성은 낡은 고정 관념과 싸우면서 확보한 전리품이다. 그러므로 인간과 기계를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면 안 된다. '통념'이라는 모래주머니를 달고 뛰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 결과는 뻔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차피 결과만 본다. 창의적 발상에 이르는 과정에서 기존 통념과 얼마나 치열한 투쟁을 했는지에 관심을 갖는 이는 없다. 컴퓨터 살 때, 반도체 공장에서 죽어나간 젊은 여성 노동자를 기억하는 이가 없는 것처럼. 따라서 기계가 창의성으로 인간을 압도한다면, 그걸 막을 길은 당분간 없을 게다.

허사비스 "범용 목적 학습 기계 개발이 최종 목표"

물론 기계가 지닌 창의성을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인간 지능은 범용성이 있다. 수학을 잘 하는 사람은 외국어도 빨리 배운다. 바둑 천재는 체스도 쉽게 익힌다. 그러나 인공적으로 구현한 지능은 아직 범용성이 없다. 바둑으로 이세돌을 꺾은 알파고가 체스를 둘 수는 없다. 아기 수준의 추론 능력을 지닌 기계가 어른 천재를 꺾을 수 있었던 건, 사실 인간 엔지니어들의 공이었다. 유치한 추론 능력을 이리저리 조립해서, 고도의 사고력을 구현했다. 그건 아직까지는 인간의 역할이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의 공동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데미스 허사비스 역시 이런 한계를 잘 안다. 그걸 깨는 게 그의 꿈이다. 그는 지난 11일 카이스트를 방문해서 "범용 목적을 가진 학습 기계를 개발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말했다.

그 목표가 달성되면, 인간 지능과 인공지능을 구별 짓던 중요한 경계 하나가 무너진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은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범용성을 갖추는 날은 아직 까마득하다고 말한다. 인간 지능의 비밀조차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계가 추론 능력을 갖추고, 그걸 활용하는 속도는 전문가들의 예상보다 훨씬 빨랐다. 마찬가지로 "범용 목적을 가진 학습 기계 개발" 역시 예상보다 빠를 수 있다. 물론, 가능성일 뿐이다.

"컴퓨터에게 지시 받는 인간 박사…우리는 기계를 섬겨야 하나"

어찌됐건, 인간의 정신 활동이 빠르게 기계로 대체되리라는 점은 분명하다. 인간 고유의 창의적 영역이라던 작곡 역시 기계로 넘어갔다. 미국 예일대학교 연구진은 '쿨리타'라는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만들었다. 기계가 스스로 작곡을 한다. 예일대 연구진은 인간이 만든 음악과 인공지능이 작곡한 음악을 사람들에게 각각 들려주는 실험을 했다. 대부분은 구별하지 못했다. 이밖에도 다양한 인공지능 작곡 소프트웨어가 나왔다. 인공지능이 만든 음악을 유튜브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평범한 청취자는 인간이 만든 곡과 구별할 수 없다.

다들 그래서 불안해한다. 그저 일자리 걱정이 아니다. 우리는 정신을 육체보다 높이 두는 문화에 익숙하다. 지식과 지능의 서열로 사회적 위계를 정한다. 책에 있는 내용을 잘 습득해서 시험을 잘 치는 능력이냐, 아니면 창의적인 발상을 하는 능력이냐 등 강조점의 차이만 있었다. 하지만 둘 다 지식과 지능의 어느 측면에 불과하다. 큰 틀에선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신, 지식, 지능의 자리에 인간 대신 기계가 들어섰다. 그럼 이제 우리는 기계를 섬겨야 하나, 라는 불안이다.

실제로 많은 누리꾼이 이세돌의 맞은편에서 바둑돌을 놓은 아자 황 박사를 동정했다. 아자 황 박사의 역할은 알파고의 지시대로 바둑 판 위에 돌을 놓는 거였다. 그 역시 공학박사이고, 아마추어 바둑 5단이다. 하지만 그는 알파고의 지시 내용을 이해도 하지 못한 채 무조건 따라야 했다. 누리꾼들은 아자 황 박사가 인류의 미래 모습이라며 걱정스러워 했다.

언제까지 두뇌의 서열로 사회적 위계 정해야 하나

그게 꼭 걱정할 일일까. 이런 불안은 정신, 지식, 지능의 가치를 너무 높게 치는 문화와 맞물려 있다. 언제까지 그래야 하나. 육체와 감성은 언제까지 정신과 두뇌의 노예로만 지내야 하나.

이세돌이 첫 번째 대국에서 알파고에게 진 뒤, 박재동 화백이 쓴 글이 화제가 됐다. 그 역시 바둑 팬이다. 그는 처음에는 이세돌을 응원했지만, 마음을 돌려먹었다고 했다. 이젠 알파고를 응원한다는 게다. 인공지능의 발전이 인간의 일자리를 줄일 수 있다는 걸 그 역시 잘 안다. 돈과 권력을 지닌 이들이 인공지능을 더 잘 이용하리라는 점 역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는 알파고를 응원했다. 박 화백의 글 가운데 일부를 옮긴다.

"그런데 왜 나는 알파고가 이기기를, 그것도 간절히 바라는 것인가!

그것은 이제 지금 같은 국영수의 시대를 끝내기 때문이다.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기 때문이다. 마치 옛날에 힘이 좋은 자가 무리를 지배하던 시대가 활 잘쏘는 자에게 밀려 지나가고, 그 다음은 무사의 시대가 시험을 통과한 관료의 시대로 교체되어 간 역사로 보는 것처럼 이제 똑똑하고 머리 좋은 사람의 시대가 지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 학교에서 하는 많은 시험용 공부는 알파고가 맡게 될 것이다. 그뿐 아니라 수없이 많은 직업이 알파고가 대신하게 될 것이다. 좋은 일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실업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알파고가 할 수 없는 일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더욱더 인간적인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것 자체로 중요한 것이다.

(…) 그러나 세계의 대세가 똑똑한 지배자의 쾌감보다는 사람의 의미, 사람의 기쁨, 진정한 즐거움. 그런 것들이 화두가 되는 새 시대에 대한 희망 때문이다."

인간보다 똑똑한 기계 나와도, 기계에게 복종할 마음 품지 않을 세상

기자도 비슷한 생각이다.

생각하는 기계가 우리를 지배할까 두렵나. 그렇다면, 범용 인공지능이 나오기 전에 우리 사회 질서를 바꾸면 된다. 정신, 지식, 지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줄 세우는 관행을 깨면 된다. 그 뒤엔 인간보다 똑똑한 기계가 나온다한들, 아무도 기계에게 복종할 마음을 품지 않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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