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에서 친노 딱지 붙으면 죽음이다. 친노가 마마보다 무섭다. 십자가 밟기처럼 나는 친노가 아니다, 이렇게 말해야할 판이다."
강기정 의원의 말이다. 더불어민주당에 최근 영입된 오기홍 변호사는 광주에 있는 아버지에게 말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왜 하필 그 당이냐."
두 사람의 발언 모두 최근 시사 팟캐스트에서의 고백이다.
한 달 앞으로 다가온 4월 총선에서 새누리당이 국회의석의 5분의 3인 180석 또는 3분의 2인 200석까지 얻을 것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제1야당의 분당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분당의 이유는 안철수 의원의 탈당이지만 그의 결단은 호남 민심의 지지가 없었다면 이뤄지지 못했을 것이다. 안철수 의원이나 국민의당이 아니라 호남 민심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위의 생생한 사례에서 보이듯이 호남 민심의 변화는 분명하다. 문제는 왜 그런 현상이 나타났는가이다.
원인을 두고 진보 언론에서 식자 간에 토론이 이뤄지고 있다. 시점을 보면 결코 사변적인 토론이 될 만큼 한가하지 않다. 4월 총선의 승패에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수도권에서 2000표 차이로 당락이 결정되는 선거구가 30개에 이른다. 선거 현장에서 야당 후보 단일화를 위한 시도가 일어날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들이 한번 선거 벽보를 붙이면 여간해서 떼어내기 어렵다. 활시위를 떠난 화살과 같다. 날아가는 화살을 멈추게 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를 식자들이 토론을 통해서 제공해줘야 한다.
지켜볼수록 피곤해지는 영남 패권 논란
올해 초부터 <프레시안>과 <한겨레>에서 벌어지고 있는 식자 간의 집중 토론 주제는 영남 패권이다. 호남 민심이 더불어민주당으로부터 돌아선 것이 친노의 영남 패권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내용을 담은 김욱 교수의 책 <아주 낯선 상식>(개마고원 펴냄) 출간이 계기가 됐다.
나는 이 토론 주제는 잘못 설정된 프레임 위에 서있다고 보고 토론자들에게 논점 전환을 요구한다. 영남 패권 논리는 호남 민심을 이해할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인데도 그것에 사생결단하듯 올인하는 토론자들의 태도는 잘못됐다고 본다. 토론을 지켜볼수록 피곤해지는 것은 이런 이유이다. 토론이 유용한 것이 되려면 호남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갈등도 완화되고 새로운 전망도 찾을 수 있게 된다.
장은주, 정희준 교수와 김욱 교수의 토론 또 김의겸 <한겨레> 기자와 김욱 교수의 토론은 지나치게 격렬하다. 진실의 언어는 그렇게 거칠지 않다. 호남 민심을 섬세하게 들여다보려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친 격렬함이 오히려 방해가 된다. 그런데도 호남 민심을 둘러싼 논란이 블랙홀처럼 영남 패권으로 빨려드는 이유가 무언가.
김욱 교수의 문제 제기 방법이 너무나 공격적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노무현이 영남 패권주의자라는 말조차 불편해하는 사람들은 나아가서 전두환의 영남 패권과 동일시하는 김욱 교수의 발언에 분노를 참을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이성적인 토론이 되지 못하고 창과 창이 맞부딪치는 날카로운 소리만 들린다.
격렬함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것을 토론자들의 책임으로만 돌릴 수도 없다. 그동안 사회적 의제가 되지 못했던 영남 패권 주장이 지금 와서 폭발적인 힘을 갖는 이유는 호남 민심이 화산처럼 폭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토론의 격렬함은 현실의 반영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야 한다. 민심이란 것이 바다와 같아서 영남 패권이라는 이유 한 가지로 움직이지 않는다. 호남 민심 폭발은 여러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그런데도 일면적 진실을 전면화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국면을 어지럽게 만들고 있다. 영남 패권이 호남 민심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은 결과라면 나는 내부에서 찾아보겠다. 보수화, 모욕감, 당파성이란 세 개의 키워드로 설명해 보려 한다.
보수화-모욕감-당파성, 호남 민심에 접근하는 다른 길들
광주의 5060 세대가 종합 편성 채널 가운데 'TV조선'을 가장 많이 본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여론 조사를 보면 젊은 세대보다 50대 이상 세대에서 더불어민주당에 대한 지지율이 크게 떨어진다. 2월 17일 <무등일보>의 광주 시민 여론 조사를 보면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10/20대 55.7%, 30대 44.9%, 40대 40.5%, 50대 28.6%, 60대 17.5%로 나타났다. 20대에 비해 50대는 절반 수준이다. 종합 편성 채널의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올 만하다.
이런 현상을 놓고서 주목할 만한 발언이 나왔다. 한귀영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 사회조사센터장은 지난 1월 <김보협의 더정치>에서 이런 말을 한다. 지난 연말부터 호남 민심의 가치 지형 또는 호남 이념 지형을 조사해보니 눈여겨볼 변화가 나타났다는 거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긴다.
"여전히 호남이 다른 지역보다 진보적 색채가 월등히 강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호남 여론이 보수화됐다고 단정하긴 어렵다. 그런데 딱히 그렇게만 볼 수 없는 조금 다른 구석이 나타납니다. 이를테면 차기 대통령으로 진보적인 대통령을 원하는지 보수적인 대통령을 원하는지 이런 질문에는 반반이 나타나거든요. 호남이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대통령을 원한다. 이게 10년 전이면 상상하기 어려운 건데 이런 부분들도 나타나고 있거든요."
"성지에서 세속으로"라는 김욱의 발언에도 그런 함의가 숨어있다. 그동안 광주 정신이라는 대의에 따라 진보적 가치를 위한 투표를 해왔지만 이제는 세속적인 욕망을 감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런 사실들은 호남의 문재인 비판과 안철수 지지의 배경에 보수화 현상이 있음을 알게 해준다. '광주 정신'에 의해 억눌려왔던 호남인들 일부의 보수 성향이 커밍아웃하는 것 아닐까.
추미애 의원에 대한 의문 한 가지. 그는 노무현 대통령의 대선 유세 기간 중에 "좌동영 우미애"라는 말도 나왔을 만큼 든든한 지원군이었다. 그런데 그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는 과정에서 민주당에 잔류했다. 그리고 노무현 탄핵에 나선다. 나는 이런 반전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서 그 당시 만났던 열린우리당 김성호 의원에게 직접 물었다.
김성호 의원도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추미애 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뒤 청와대에 연락하려고 수차례 전화를 했는데 그의 참모들이 전화를 바꿔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추다르크'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기가 셌던 그는 격노했고 사이가 급격히 멀어졌다.
호남도 추 의원과 같은 모욕감을 느낀 것 같다. "호남 사람이 내가 좋아서 찍었나, 이회창 싫어서 찍었지"나 "호남 정치인들과 정치하기 참 힘들다" 등, 이런 말이 나오게 된 경위가 어떻든 간에 노무현 대통령의 이런 한마디들이 호남 사람의 자존감을 다치게 했다. 이렇게 상처 주는 말들은 아주 오래 간다.
지난해 박지원 의원이 당대표 선거에 이용하기 위해 호남의 상처를 덧나게 했다. 김대중(DJ) 대통령이 신장 투석을 하게 된 것이 대북 송금 특검에 대한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말을 던졌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의학적으로 연관성이 없다고 말한다.
문재인의 자서전 <운명>에 호남 사람을 비하한 글이 있다는 인터넷에 떠도는 주장도 자극적이다. 문재인의 부친이 양말 장사를 했는데 "전남 상인"에게 돈을 받지 못해서 사업이 망했고 그 때문에 가난하게 살았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진실 여부와 관계없이 호남 사람들에게 모욕감을 느끼게 한다. 이에 대한 반격으로 선한 인상의 문재인을 악마화한 것이 아닌가.
나는 <재외동포신문>에서 일할 때 기자들에게 이런 주문을 했었다. 복잡한 상황에서 국내 동포의 이익과 재외 동포의 이익이 부딪칠 때 재외 동포의 이익이 무엇인가를 보고 그 관점에서 기사를 써라. 그러면서 이것이 "재외 동포 당파성"이라고 규정했다. 우리 사회 전체를 보는 관점에서 보면 편향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재외 동포의 영향력이 워낙 적기 때문에 그렇게라도 해서 그들의 입장을 대변해야 했다.
당파성이란 파당성과 다름없는 말로, 사회의 여러 복합적인 상황을 오직 자기가 속한 집단의 이익이라는 관점으로 보는 태도이다. 상대적으로 불이익을 받아온 집단에서 이런 입장을 취하게 된다. 노동 계급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도 이런 방법론적 편향을 사용해왔다. 김욱 교수의 영남 패권 주장이나 '호남 자민련' 여론도 호남 당파성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잘 이해가 된다.
문재인, 호남 민심 치유 위해 충장로에서 무릎을 꿇어라!
나라가 망조가 들었다 한다. 헬조선, 이생망이라 한다. 지난해에는 처음으로 국민 일인당 소득이 감소했다. 자기 자식을 때려 죽이는 사건이 연이어 나타나고 있다. 동물의 세계에서도 어미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새끼를 잡아먹는다. 현 정권의 책임이 크다. 경제 민주화 등 진보 공약으로 집권해놓고 방향을 보수로 틀면서 국정이 난조에 빠진 것이다.
박인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이사장은 이 정부를 "전두환보다 못한 미친 정권"이라고 말했다. 이런 극언이 공감을 일으키는 시대다. 그런데도 새누리당의 총선 압승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혁명이 불가능한 시대에 오로지 투표밖에는 무기가 없는데 그것마저 무용지물이 되어가고 있다.
김욱 교수와 장은주, 정희준 교수에게 제안한다. 영남 패권 논란은 이제 중지하고 호남 정치와 정권 교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방법을 찾아보자. 거슬러 올라가 복기해보면 뒤늦은 해법이지만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안철수와 문재인 세력은 통합이 아니라 연대를 해야 했다. 생각이 같은 사람이 통합하고 다른 사람은 연대한다. 통합과 연대의 원칙이다.
문재인과 안철수는 생각이 다르고 지지 세력의 입장도 다르다. 그러므로 해법은 연대에 있다.
3월 2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국민의당을 향해 전격 통합을 제안했다. 입으로는 통합을 말하더라도 손으로는 연대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통합한다 해도 당내에 '호남 동맹' 같은 그룹을 허용한다. 호남 정치 세력의 독립적인 지위를 인정해주고 권력 배분도 합의한다. 이를테면 한 지붕 두 가족 또는 계약결혼같이 다시 만나는 것이다. 그리고 함께 손을 잡고 박근혜 정부 심판을 외친다면 어떨까. 호남 민심의 방향타를 쥐고 있는 호남의 식자들이 연대를 위한 풍부한 논리적 근거를 제공해 주기를 기대한다.
문재인 의원은 다시 광주를 방문해 충장로에서 무릎을 꿇어라. 고의가 아니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호남 민심에 상처를 주었다면 치유의 책임이 있다. 가깝게는 총선 후보 단일화를 위해서 길게 보면 대선 승리를 위해서이다. 문재인 의원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고 항변할 사람들은 광주의 더좋은자치연구소 이정우 연구실장의 발언을 귀에 담아야 한다.
"옳고 그름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 정서(반문재인)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니 더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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