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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연합'의 효심, 시민 정신의 다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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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연합'의 효심, 시민 정신의 다른 말

[민들레] ③내가 소녀다

어버이들의 나라, 효녀들의 나라

일본군의 위안부가 된 소녀들, 당시 10대 소녀들이었던 이들은 납치되다시피 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취업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에 속아 고향을 떠났다. 방직공장 노동자가 된 소녀들도 있었지만 운이 좋은 경우였다. 1960~70년대 서울 청계천 골방에서 철야 노동을 하던 소녀들처럼 부모와 형제를 위해 이역만리 고생길도 마다치 않은 순박하고 어린 소녀들이었다.

나라가 돌보지 못한 그 소녀들은 타향에서 죽거나 만신창이 몸으로 돌아와서 고향 땅을 밟지도 못하고 평생을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국가는 끝내 그들을 외면했다. 100년 전 대한제국 대신들이 나라를 팔아먹었듯이 오늘날에도 그 행태는 되풀이되고 있다. 나라와 역사를 팔아먹는 이들이 목소리 높여 애국 운운하는 것이 이 나라의 슬픈 풍경이다. 청산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되는 법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한 한일 외무장관 합의가 발표된 뒤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을 지키려는 소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언니 오빠들도 나섰다. 소녀상 옆 길바닥에 돗자리를 깔고 담요와 침낭으로 노숙하면서 이 엄동설한에 24시간 소녀상을 지키고 있다. 지나가던 시민들이 따뜻한 음료수를 건네고 근처 식당에 밥값을 맡겨놓고 가기도 한다. 나라가 돌보지 못한 소녀들, 할머니가 된 소녀들을 다음 세대 소녀 소년들이 돌보는 모양새다.

ⓒ연합뉴스

일본대사관을 사이에 두고 광화문 쪽에는 세월호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시민들이, 반대편에는 위안부 합의 철회를 요구하는 시민들이 차가운 길 위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친일 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했기에 세월호 진상규명 또한 이렇게 힘든 것임을 우리는 안다. 위안부로 끌려갔던 그 어린 소녀들의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덮으려고만 하듯이, 이 시대 소녀 소년들을 수장시킨 세월호 참사도 청산하지 않고 덮고 넘어가려는 이들이 국가 운영을 맡고 있다.

작은 소녀상 하나를 둘러싸고 세상이 소용돌이친다. 그래도 창피함은 아는지 일본 정부는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고 있고, 어물쩍 합의하려던 한국 정부는 시민들의 항의에 주춤하는 모양새다.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만이 진실을 밝히고 지킬 수 있음을 깨닫게 된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최근 '대한민국효녀연합'이라는 낯선 이름의 시민단체가 떴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매주 열리고 있는 수요집회에 어버이연합 회원들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예술 행동을 같이 하던 여성들이 함께 만든 단체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도우려는 '효심 깊은' 딸들이니 '효녀연합'은 딱 어울리는 이름이다.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연민과 세상의 불의에 대한 저항을 예술로 풀어내는 이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예술인이라 할 수 있다. 이들의 효심(孝心)은 곧 '시민 정신'의 다른 말이다.

검정치마와 흰 저고리 차림으로 시위에 나선 홍승희 씨가 든 팻말에는 "애국이란 태극기에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물에 빠진 아이들을 구하는 것입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애국'을 당신들의 존재 근거로 여기는 어버이연합 어르신들께 꼭 들려 드리고 싶은 말이었다고 한다. 두렵지 않았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막상 어버이연합 할아버지들을 보니 측은한 생각이 들었다. 원래 상처가 많은 분들이고, 그걸 이용하는 권력이 나쁜 거니까. (중략) 실제로 뵈니 신념에 차서 행동하시는 게 아니더라. 눈빛도 흔들리시고 저희 얼굴도 제대로 못 쳐다보시더라."(1월 7일 자 <오마이뉴스> '어버이연합 막아선 효녀연합, 이렇게 탄생했다' 중)

'흔들리는 눈빛'은 어버이 세대의 안타까운 심리 상태를 드러낸다. 나라 잘못 만나 또 다른 방식으로 젊음을 희생당한 '가엾고 안타까운' 국민들이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당신들의 삶에 대한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데 대한 분노와 자신들이 믿는 정의(正義)에 대한 의심이 앞다퉈 불쑥불쑥 솟아나는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한 어르신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심리치료일까? 아니면, 당신들의 희생에 대한 인정일까. 그들의 분노를 이용하려는 기득권 세력들은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주는 척할 뿐이다. 이용 가치가 있는 한에서. 나치즘에 물든 시민들처럼 깨어 있지 않은 시민들은 권력의 이용 대상이 될 따름이다.

연민과 공감의 자장 속에서

시민들의 스펙트럼은 다양하다. 대한민국 시민들 중에는 위안부 합의를 환영하는 이들도 있다. '한일 위안부 협상, 굴욕 협상 아니다'와 같은 팻말을 든 나이 지긋하신 어버이연합 회원들 또한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데 누구보다 열심인 이 나라의 시민들이다. 그들에 맞서(?) 소녀상을 지키려는 효녀연합 회원들 역시 시민들이다. 이들의 목소리가 공론의 장에서 부딪히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바람직한 현상이다. 시민성은 이런 과정을 통해 다듬어지고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시민성이란, 곧 '동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 구성원들에 대한 관심과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파리 시민들이 파업하는 지하철 노동자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은 그로 인해 지금 당장은 불편할지라도 그것이 우리네 삶을 더 인간답게 만들어줄 것임을 믿기 때문이다. 나 또한 언제 그와 같은 입장에 놓일지 알 수 없기에 불편을 기꺼이 감수한다.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몸에 배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파업을 하거나 시위를 하는 적극적인 행동만이 현실 참여는 아니다. 그것에 공감하고 지지하는 무언의 행위 또한 시민 참여 활동일 수 있다. 우리는 저마다 처한 자리에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시민성을 발휘할 수 있다. 홍승희 씨처럼 예술적인 행위로 다른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을 끌어내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는 시민도 필요하다. 그것이 예술가들의 역할일 것이다.

"사실 (내게) 예술이나 현실 참여는 특별하거나 특이한 활동이 아니다.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에 이유를 담아 손팻말을 쓰고 행동하는 거다. 자연스러운 시민 활동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사회 문제를 몰라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문제가 있는 건 아는데 자기 삶의 문제로 와 닿지 않아서다. 울림이 없어서다. (중략) 내 삶에서부터 (사회 문제를) 깰 수 있게 해야 한다. 예술이 그걸 할 수 있다고 믿는다."(위의 기사)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처럼 다만 "오늘 하루를 더 진실 되게 살기 위해" 뭔가를 하는 것뿐일지 모른다.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나의 삶을 위해, 내 앞에 있는 이웃을 위해, 내가 몸담고 있는 이 공동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것은 희생도 고생도 아니다. 그렇기에 설령 인정받지 못한다 해도 분노가 일지 않는다. 그럴 때 삶이 곧 예술이 된다.

다른 사람의 삶과 고통에 대한 관심과 공감은 어떻게 길러질 수 있을까. 자기 안에 갇히지 않을 수 있도록, 분노와 두려움의 자장에서 벗어나 공감과 사랑의 자장(子臟) 속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손길을 내미는 것이야말로 시민성을 북돋는 길이 아닐까.

▲ 로렌초 로토의 '간음한 여인과 예수'(124×156cm 루브르 박물관. 1530-35).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한복음 8장 3절~11절) ⓒgoogle.com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연임했던 피오렐로 라과디아는 1930년대 초 대공항 시기에 뉴욕 치안판사로 재직할 때 굶주린 손녀에게 주려고 빵을 훔친 할머니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판결했다. "배고픈 사람이 거리를 헤매고 있는데 나는 그동안 너무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 도시의 시민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10달러 벌금형을 선고하며, 방청객 여러분들에게도 저마다 50센트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이렇게 걷은 57달러 50센트를 건네받은 할머니는 벌금 10달러를 낸 후 47달러 50센트를 갖고 법정을 떠났다고 한다.

빵을 훔쳐서라도 배를 곯고 있는 손녀를 돌보려는 그 마음은 눈물겨운 것이다. 절도 행위를 했으니 시민성이 없다고 나무랄 수도 없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는 예수의 말씀처럼 그 할머니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 시민이 누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벌금을 선고 한 판사처럼 우리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나누어 져야 한다.

라과디아 판사의 이 판결은 시민성이란 것이 한 사람에게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공유하는 어떤 것임을 말해준다. 우리 모두는 시민성의 한 자락을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그러기에 그 본질상 시민성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그럼으로써 오히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역동성을 지닌 영원한 미완성태가 시민성의 본질이 아닐까? 그렇다면 책임을 나누어지는 것, 입장을 함께하는 것이야말로 시민성의 고갱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지옥에 있는 마지막 중생이 구원받기 전까지 자신 또한 성불하지 않겠다고 서원한 지장보살의 입장과도 같다. 우리 모두는 지장보살의 또 다른 얼굴들인지도 모른다.

상처 입은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자장 속에서 입장을 같이하는 것, 그것은 곧 기독교에서 말하는 이웃 사랑의 본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입장을 같이하는 것에 대해 고(故) 신영복 선생님이 남겨주신 말씀 속에서 시민성의 본질을 엿본다.

"머리 좋은 건 마음 좋은 것만 못하고, 마음 좋은 것은 손 좋은 것만 못하고, 손 좋은 건 발 좋은 것만 못한 법입니다. 관찰보다는 애정이, 애정보다는 실천적 연대가, 실천적 연대보다는 입장의 동일함이 더욱 중요합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입니다."(故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돌베개 펴냄) 중).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격월간 교육전문지 <민들레>와 함께 대안적인 삶과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민들레>는 1999년 창간 이래, '스스로 서서 서로를 살리는 교육'을 구현하고자 출판 및 교육 연구 활동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교육은 곧 학교 교육'이라는 통념을 깨고, 어른과 아이가 함께 성장하는 '다양한 배움'의 길을 열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바로가기 : <민들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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