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자주 쓰이는 '헬조선'이란 말은 우리의 삶이 '위기'라는 늪에 잠식된 상태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히 경제성장의 위기로 환원되지 않는다. 우리 중 누구도 가난하다고, 경제가 어렵다고 자신의 일터와 삶의 터전을 '지옥'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위기인지, '위기'라는 말이 범람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사유해야 한다. 진정한 위기는 '위기에 대한 섣부른 해법'에 있을지도 모른다. 국가 경제가 위기이니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고, 양극화가 문제니 장년들의 월급을 깎아 청년들에게 주자는 식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법은 아빠가 실직하고, 엄마가 질 나쁜 일자리를 찾아 나서야 하는 상황으로 되돌아온다는 것에는 침묵한다. 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아 자식들이 알바를 하는 상황은 이제 가난한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일반적인 중산층 가정의 풍경이 되었다.
청년들에게 "우리 때는 더했다. 그래도 우리는 이겨냈다"는 식의 훈계는 오늘날의 위기가 무엇인지를 은폐할 따름이다.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청춘의 아픔에 대한 공감이나 위로가 아니라 어설픈 충고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청춘의 봄날은 아직 오지 않았으며, 이미 지나가 버렸다.
그들에게 삶의 봄날은 이미 지나간 아버지 시절의 한때이며, 6년의 입시지옥을 통과해 또 몇 년의 취업전쟁 속에서 생존을 매시간 타진해야 하는 시간 속에서 아직 오지 않은, 온 적이 없는 한때다. 따라서 우리 앞에 놓인 위기는 보다 근본적이다. 그것은 생존이 아니라 삶의 자리와 삶의 시간의 문제다. 다시 말해 삶을 구성해야 할 시간 대신 생존을 위한 초침과 분침으로 대체되었고, 삶의 터전을 일굴 장소는 질 나쁜 일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면 삶의 장소와 시간은 어떻게 다시 구성할 수 있을까? 우선은 질문부터 바꾸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늘릴까? 어떻게 하면 경제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청년을 바로 세워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우리 앞에 직면한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외면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에서 우리의 삶의 방향을 찾을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생존을 위한 각자도생이 아니라 삶을 구성하는 문제, 이 물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할 것이다. 삶이란 곧 공동체적인 삶일 수밖에 없으므로 삶을 다시 사유하는 것 속에서 우리는 위기의 본질에 도달할 수 있다. 그래야만 우리는 위기 속에서 우리를 위기로 빠트린 방향과는 다른 방향을 모색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기'란 위험과 기회가 공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양에서 위기(crisis)는 그리스어 '크리시스'에서 나온 말이다.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이 단어는 '판단', '전환점', '선택' 등의 의미를 가진다. 즉, 위기는 더 이상 나아갈 수 없는 벼랑 끝이 아니라 전환의 좌표이며, 이러한 전환이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오늘날의 근본적인 위기는 우리가 '생존이 아닌 다른 삶의 방법들을 사유할 수 없다는 것'에서 비롯되고, 그렇기에 더더욱 다른 삶을 발명해야 할 갈림길에 서 있음을 뜻한다. 그래서 우리는 경제의 위기, 국가의 위기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들 삶의 위기'를 들여야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다시 새롭게 물어야 한다. '공동체적 시민의 삶'은 어떻게 발명해야 하는가?
근대 시민의 탄생
시민은 타고나지 않고 만들어진다. 유럽의 근대 정치사상에서 '시민'이라는 정치적 주체가 새롭게 발명되어야 한다는 것을 안 사람은 루소였다. "인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루소의 주장은 국가를 구성하는 주체로서 인민의 정의가 달라졌음을 보여준다. '네이션(nation)'은 태어남을 의미하는 라틴어 '나티오(natio)'에서 나온 것으로 공동의 출생지를 가진 인간들을 의미한다. 하지만 루소가 말하는 인민은 자연적 인간인 '나티오'가 아니다. 그는 근대의 태동기, 즉 정치적 위기의 한가운데서 정치적 시민(civil)으로서 국민(nation)을 발견한 것이다.
이러한 사상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서는 대혁명이 일어난다. 1789년 프랑스 시민들의 봉기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다. 바스티유 감옥의 붕괴는 파리 시민들에게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태양왕 루이 16세로 대표되는 구체제가 붕괴되고 그 빈자리에 시민들의 권력이 들어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짐이 곧 국가다"라는 오랜 선언은 "시민이 곧 국가다"라는 새로운 선언으로 대체되었다. 즉 '시민'의 출현은 자연스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동에 의해, 시민 스스로의 목소리를 통해 등장한 것이다. 프랑스혁명으로 만들어진 인권선언이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으로 불리기도 하다는 것은 우리에게 오늘날 '시민'의 의미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인간이다. 자연적으로 타고난 인간이라는 생물학적 분류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가진 존재로서 역사적으로 등장했다. 시민은 단순히 다수의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절대주의 국가에서 시민, 농민, 노동자들로 구성된 제3신분은 인구의 98%를 차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 번째 신분이었으며, 통치받아야 할 존재였고, 정치적인 주체가 되지 못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의미에서 '신민(臣民)'이었다. 그들은 분명 다수를 점하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어디에도 참여하지 않는 존재였다. 거의 대부분의 세금과 노동을 전담하고 있었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소음에 불과했다. 그래서 당시 E.J. 시에예스는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1788)라는 역사적인 정치 리플렛에서 다음과 같은 주장을 던졌다.
1.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전부'다.
2. 지금까지의 정치에서 제3신분은 무엇이었나? '아무것'도 아니었다.
3. 그렇다면 무엇을 요구하는가? '무언가'가 되기를 요구한다.
위 세 줄의 문장이야말로 시민, 즉 정치적 주체는 어떻게 탄생하는지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선언이자 실천이다. 제3신분은 전부임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아닌 자로 존재했다. 이러한 간극은 제3신분이 당시의 사회가 제3신분에게 할당했던 '자리'의 자각으로부터 시작된다. 제1신분인 성직자, 제2신분인 귀족에 이어 세 번째 신분으로서 자신의 자리를 자각함과 동시에 그러한 위계를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새로운 무언가로 다시 탄생하는 출발이었고, 이는 이전에 정해진 자리에 대한 이탈을 의미한다.
아직 자신이 무엇이 되고 싶은지 명명되지 않은 채, 전부와 아무 것도 아닌 것 사이의 불일치를 깨닫기. '제자리에 가만히 있어'라는 지배적인 명령어에 반기를 들기. 그 간격이 열어놓은 틈에 들어가 '나는 무언가가 되겠다'고 선언하기. 이것이야말로 시민은 어떻게 시민이 되는지를 알려주는 비밀이 아니겠는가.
오늘, 청년의 자리
그래서 시민이란 '국민'과 같지 않고 '사람'과도 같지 않다. 시민이란 근대 이후의 어떤 고정된 주체가 아니다. 시민은 늘 새롭게 발명되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청년의 자리를 묻는다. 한국 사회에서, 신자유주의라는 시간에서 청년의 자리는 어떻게 할당되어 있는가? 그들이 헬조선이라는 자조와 체념이 얼룩진 서늘한 분노로 이 사회를 규정하기 전에, 그들을 이미 지옥 같은 차갑고, 아프고, 고통스럽고, 한없이 외로운 자리에 앉혀놓은 것은 아닌지 되묻는다.
하나의 예로, 청소년 알바는 노동도 아니며 교육의 영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인권의 사각지대를 이룬다. '공부하기 딱 좋은 나이'인 청소년들의 노동은 일부 일탈 청소년의 용돈 벌이나 가난한 학생들의 생계비의 문제가 아니다. 2014년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전국 중3~고3 학생 4000여 명을 대상으로 벌인 아르바이트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아르바이트를 해본 적이 있다'고 답한 학생이 25.1%였다. 즉, 4명 중 1명이 노동을 하고 있다. 최근 들어 이 비율은 계속 증가하고 있으며, 연령대 또한 점차 낮아지는 추세다. 더불어 이들의 노동은 대부분 파트타임이 아니라, 풀타임 노동이다. 이들이 이러한 청소년기를 거쳐 청년이 되면 그 앞에는 학자금 대출 시장이 정부의 교육복지라는 이름 아래 펼쳐지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의 학자금 대출은 2005년 18만 명에서 2012년 181만 명으로 7년 만에 열 배가 늘었다. 한국장학재단에서 대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학생 10명 중 3명이 학자금 대출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이름이 장학재단이니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해야 할 장학재단에서 학자금 대출 사업을 벌이는 것은 IMF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복지의 민낯을 보여준다.
이러한 상황에서 '헬조선'은 IMF를 성공적으로 극복한 대한민국과 거기서 할당받은 자신의 '자리'에 대한 간극의 자각이다. 이러한 불일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에 대한 감수성을 일깨운다. 나는 '지금의 나'가 아니라 '무언가가 되기를 요구한다'는 자각 말이다. 이것이 개별적인 각자도생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이 될 때 새로운 공동체의 감성은 형성된다. 오늘, 우리가 새롭게 맞이해야 할 새로운 시민의 감성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 1월 22일 서울 노동청에서 일어난 작은 소동을 주목하자. 알바노조 조합원 59명은 서울 노동청 건물 로비를 점거하며, 노동청 근로 감독관이 사용자(아르바이트 고용 업주) 편들기 실태를 비판하고, 정부의 '노동개악'을 중단하라며 2시간가량 '소란'을 일으켰다. 2시간을 점거했으니, 점거라고 말하기도 어려운 한낮의 소동의 주체는 누구인가?
이들은 학생이자 노동자이면서 노동으로도 말해지지 않은 '알바'라는 불평등한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다. 그런데 알바'생'이 아니라 알바'노동자'라니! 이 사회가 이들에게 할당한 자리를 이 청년들은 누구보다 정확하게 알고 있다. 알바하는 학생이 아니라 공부하는 노동자로서, 한없이 불안정하고 두 배로 열악한 알바노동자라는 '자리'. 이 '자리'에서 이 자리를 직시하며, 이 자리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그들은 서울의 한복판에서 외친다. "사장 편만 드는 근로감독관 out!" 노조가 없는, 그래서 자신의 권리는 스스로가 지켜야만 하는, 그래서 그런 청년들끼리 똘똘 뭉친 알바노조원들에게 그나마도 국가의 근로감독관이라는 감시기구는 무용지물이다.
평균적으로 알바노동은 매일 20분의 임금이 체불되거나 떼인다. 어렵사리 지방노동청에 호소해도 근로감독관이 사용자 편을 들거나 사용자와의 3자 대면을 강요하고, 사건 조사도 하지 않은 채 '증거 없음' 처리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근로감독관에게 알바는 여전히 학생들의 용돈 벌이고, 사업주는 가족을 책임질 가장의 수고로운 노동이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이미 결정된 '자리'에서 이탈해, 서울 노동청의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아 새로운 '몫'을 요구했다.
"우리는 학생이다. 우리는 노동자다. 우리는 청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민이다."
시민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에 의해 새롭게 발명되는 것이며, 그로부터 새로운 권리와 책임은 늘 끊임없이 구성되는 것이다. 오늘, 우리는 정해진 몫에, 정해진 자리에서 각자도생하는 신민(臣民)인가, 아니면 새로운 몫과 자리를 요구하는 시민(市民)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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