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진강은 한반도의 뭍에 봄이 상륙하는 관문이다. 봄의 화신이 백운산 자락의 동백림과 화엄사 뒤뜰의 동백나무에 꽃의 숨결을 불어넣으면, 붉은 동백은 이윽고 봄의 화신이 되어 강변의 매화를 깨우고, 매화는 산수유를, 이어서 산수유의 노란 영혼은 벚꽃의 꽃망울이 터져 나오도록 재촉한다. 그 뒤를 이어 진달래와 철쭉이 지리산을 물들인다. 연이어 터지는 꽃들의 교향악이 섬진강과 지리산 무대에 울려 퍼지는 것이다.”(<광양매화축제> 사이트에서)
섬진강은 전북 진안군 백운면 신암리 상추막이골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광양만까지 212.3km를 흐르는, 아름다운 강입니다. 특히 3월의 섬진강은 지리산의 눈 녹은 물을 고스라니 받아 쪽빛 자태를 빛내며 흐르다가 남해에 이르기 전 광양시 다압면 <매화마을>을 만나 그 아름다움을 완성합니다.
섬진강은 <매화마을>이 있어 그가 반짝이는 보석임을 드러내고, 매화마을은 섬진강을 만남으로써 그 고결한 영혼을 더합니다.
매화꽃 꽃 이파리들이
하얀 눈송이처럼 푸른 강물에 날리는
섬진강을 보셨는지요
푸른 강물에 하얀 모래밭
날선 푸른 댓잎이 사운대는
섬진강에서 서럽게 서 보셨는지요
해 저문 섬진강가에 서서
지는 꽃 피는 꽃을 다 보셨는지요
산에 피어 산이 환하고
강물에 져서 강물이 서러운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사랑도 그렇게 와서
그렇게 지는지
출렁이는 섬진강가에 서서
당신도 매화꽃 꽃잎처럼 물 깊이
울어는 보았는지요
푸른 댓잎에 베인
당신의 사랑을 가져가는
흐르는 섬진강물에
서럽게 울어는 보았는지요
(김용택 시인의 <섬진강 매화꽃을 보셨는지요>)
두발로학교(교장 전형일, 언론인)의 3월 봄맞이 걷기(제47강)는 모처럼 <섬진강 매화 기행>입니다. 3월 26일(토) 당일로, 반짝이는 섬진강가를 걸으며 만발한 순백의 매화 향기에 흠뻑 취하다가 하동읍의 ‘하동송림’까지 이릅니다. 약 12km의 상쾌한 강가의 봄길을 느릿느릿 4시간 30분 정도 걷습니다.
<섬진강 매화 기행>은 3월 26일(토) 당일로, 서울 출발은 아침 6시 30분입니다. 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두발로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는 김밥도시락을 생수와 함께 준비하겠습니다.
오전 10시쯤 섬진강가에 도착합니다. 걷기의 출발점은 광양시 다압면 고사리의 <송정공원>입니다. 여기서부터 반짝반짝 빛나는 섬진강과 환상적인 매화의 세계로 빠집니다. 좀 걷다 보면 소학정마을, 다사마을에 이르는데, <매화마을>의 호젓한 맛을 그대로 간직한 아름다운 마을들입니다. <매화마을>은 섬진강을 끼고 있는 다사면 20여km에 이르며 곳곳에 이런 마을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약 4.5km를 한 시간여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청매실농원>이 나옵니다. 이 일대에서 1시간 30분 정도 <매화마을 산책> 시간을 갖습니다. 때마침 열리는 <매화축제>(3월18~27일)도 즐기면서 간단한 주전부리 시간도 갖습니다.
[청매실농원] 이 농원을 연 사람은 ‘밤나무골 김영감’으로 통했던 김오천 님이다. 그는 1931년 일본에서 5천 주의 매화나무 묘목을 들여옴으로써 ‘광양매실’의 역사를 열었다. 그는 1902년 광양시 다압면 도사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7살이던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13년간 광부생활로 돈을 모았고 30살이던 1931년 귀국하면서 밤나무 1만 주, 매실나무 5천 주를 비롯하여 감나무, 배나무 등 양질의 신품종 묘목을 가지고 들어왔다. 3년 동안 묘목을 심고 관리하다가 1934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10년 동안 일본과 광양의 고향집을 오가면서 돈을 벌고 나무 키우는 기술을 익혔다. 1944년 완전 귀국하여 다시 밤나무, 매실나무 키우는데 매달려 45만 평의 임야를 밤산으로 만들었고 집주변 언덕배기에는 매화나무를 집중적으로 키웠다. 또한 1952년부터 매실의 상품화에도 앞장서 해마다 매실 한약재인 오매와 금매 수십 가마를 만들어 구례, 순천, 하동 등지의 한약방에 공급하고, 매실농축액과 매실식초, 매실차 등 매실식품을 전통방식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하였으며, 87살로 타계했다. 청매실농원의 2대 매실지기는 그의 며느리이며 매실명인인 홍쌍리 님이고, 3대는 손자인 김만수 님이다.
<매화마을 산책>을 마친 일행은 12시 30분 수월정을 떠납니다. 수월정 아래 강가는 섬진나루가 있던 곳이며 섬진강에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수월정(水月亭)] 광양 출신으로, 조선 선조 때 나주목사를 지낸 정설(鄭渫)이 만년을 보낼 뜻으로 1573년 세웠던 정자이다. 이곳의 멋진 풍경과 정자의 아름다움에 반한 송강 정철이 <수월정기>란 가사를 지었고 선조 때 형조좌랑을 지낸 수은 강항도 시조 30수를 지어 노래했다. 현재의 수월정 모습은 1999년 광양시가 정비한 것이다.
[섬진나루] 섬진강(蟾津江)의 원래 이름은 고운 모래가 많아 모래내, 다사강(多沙江), 두치강 등이었는데 고려 초부터 섬진강으로 불리었다. 고려 우왕 11년(1385) 왜구가 섬진강을 거슬러 오르며 침입하자 광양땅 선거에 살던 수십만 마리의 두꺼비떼가 다압면 섬진나루터로 떼를 지어 몰려와 울부짖으니 왜구들이 놀라 도망쳤다고 한다. 이때부터 ‘두꺼비섬(蟾)’자를 붙여 섬진강이라 불리었다.
예로부터 주요 통행로인 섬진나루에는 1705년 수군진(水軍鎭)이 설치되어 1895년 폐쇄되기까지 수백 명의 병사와 여러 척의 병선이 주둔했다. 지금 이곳에는 수군 장교였던 별장들의 기념비 좌대로 사용했던 두꺼비 석상(石像) 4기가 남아 섬진강 유래의 전설을 전하고 있다.
수월정을 떠나 호젓한 섬진강길을 한 시간여 걸으면 신원삼거리가 나오고 1km쯤 더 걸으며 섬진교를 건너면 바로 하동읍입니다. 섬진교를 건너며 강 건너 오른쪽으로 그림같은 풍경이 나오는데, 하동8경의 하나인 <하동송림(河東松林)>입니다. 예로부터 이름을 알렸던 <하동포구 백사청송(河東浦口 白沙靑松)>의 현장입니다. 잠시 속세를 잊고 백사와 청송 사이를 거닐다가, 2km쯤 더 가면 오늘 걷기의 종착점인 <하동포구공원> 주차장에 이릅니다.
[하동송림(河東松林)] 조선조 영조 21년(1745) 부사 전천상이 방풍과 방사를 목적으로 섬진강변에 심었던 것이 260여 년 세월이 지나 노송을 이루어 오늘날 국내 제일가는 노송숲이 되었다, 숲의 면적은 26,000㎡에 달하고 1,000여 그루의 노송이 우거져 있다. 2005년 천연기념물 제445호로 지정되었다. (자료 출처 : 광양시, 하동군, 청매실농원, 기타)
오후 2시 30분쯤, 하동읍의 향토별미집인 <동흥식당>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제첩전과 제첩국요리로 늦은 식사 겸 뒤풀이를 한 후 3시 30분쯤 서울로 출발합니다.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 배낭, 등산화), 선글라스, 식수,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두발로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전형일 교장선생님은 언론인으로 오랜 동안 일간지 기자 생활을 했습니다. 현재 인터넷 언론 매체를 운영중이며, 원광대학교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는 틈틈이 여기저기 <걷기의 즐거움>에 몰입하며 <걷기의 철학>에도 빠집니다.
교장선생님은 <두발로학교를 열며>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걷기>의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걷기 코스의 명소들이 생겨나고 <걷기 동호회>도 부쩍 늘어나고 있습니다. 각 지자체들이 고유의 <길>을 경쟁적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인간이 한동안 잊었던 <걷기의 가치>를 되살리고 걷기를 통해 몸과 마음의 즐거움과 건강을 찾으려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직립보행(直立步行) 이후 걷기를 멈춘 적은 없습니다. 최소한 집안이나 사무실에서도 걸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걷기가 새삼스럽게 각광을 받는 이유가 뭘까요.
성경 <요한복음>에서 예수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길을 본받는데, 길은 스스로 그러함(자연)을 본받는다”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길>에서 이처럼 종교적 진리나 철학적 깨달음 같은 거창하지는 않지만, 길을 걸으면서 내면의 기쁨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루소는 <고백록>에서 “나는 걸을 때만 명상에 잠길 수 있다. 걸음을 멈추면 생각도 멈춘다. 나의 마음은 언제나 나의 다리와 함께 작동한다”고 말했습니다. 걷기의 리듬은 사유의 리듬을 낳는다고 합니다. 경치를 구경하며 생각할 수 있고, 미지(未知)의 것을 기지(旣知)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레베카 솔닛의 저서 <걷기의 역사>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의사가 둘 있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 말이다. 몸과 마음이 고장날 때 나는 이 의사들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고, 그러면 다시 건강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건강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가장 경제적이고 신체에 부담이 적은 운동을 택한 것이 <걷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속도와 능률이 지배하는 세상에, 목적에 대한 부담을 덜고 걷기를 통해 느림의 미학으로서 세상을 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요.
사람마다 걷기를 통해 찾고자 하는 의미와 기쁨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모두 함께 찾으려는 것은 <몸과 마음의 건강> <새로운 경관> <자연을 즐기는 좋은 사람들과의 만남>의 세 가지가 아닐까요.
<두발로학교>는 <아름다운 길 걷기> 전문학교입니다. <두발로학교>에서 세 마리 ‘토끼몰이’를 해보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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