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방문하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양국 간 공식 협상결과 발표가 나오기 몇 시간 전인 17일(미국 시간) 저녁에 열린 미국 재계 관계자들과의 만찬 자리에서 "한미 FTA에 걸림돌이 되었던 쇠고기 수입 문제가 합의됐다고 들었다"며 이를 먼저 공식화했다.
"쇠고기와 FTA는 별개"→"걸림돌이 사라졌다"?
그러나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 "쇠고기 수입재개가 한미 FTA 비준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는 미국 정치권 전반의 분위기와는 달리 그동안 청와대와 한국 정부는 "쇠고기 협상과 한미 FTA 협상은 별개"라는 공식적인 입장을 고수해 왔었기 때문이다.
우리 측 협상 수석대표인 민동석 농림수산식품부 농업통상정책관도 전날 기자들과 만나 "이명박 대통령의 방미와 한미 FTA는 쇠고기 협상과 별개"라면서 선을 그었다.
그러나 협상 결과에 대한 한미 양국의 공식발표가 임박한 시점에 터져 나온 이명박 대통령의 반응은 뜻밖이었다.
"한미 FTA에 걸림돌이었던 쇠고기 수입문제가 합의됐다"는 대통령의 발언은 결국 "미국 의회에 한미 FTA 비준을 압박하기 위해 쇠고기 수입재개를 선물로 주려는 게 아니냐"는 '혐의'에 정확히 조응한다.
비난을 의식해 'FTA와 쇠고기는 별개'라는 식의 입장을 고수해 온 청와대 측의 억지 논리에 비하면 차라리 이명박 대통령만이 솔직한 속내를 털어 놓았다고 보는 게 맞겠다.
아무리 "한숨 돌렸다" 싶더라도…
물론 이 대통령으로서도 걱정과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쇠고기 수입 문제뿐 아니라 방위비 분담금 문제, 대량학살무기 확산방지구상(PSI)이나 미국의 미사일 방위시스템(MD) 참여 문제 등을 두고 이미 국내 정치권과 언론에선 "이번 순방에서 미국에 선물 보따리만 안겨 주고 오는 게 아니냐"는 의혹을 보내고 있는 게 사실이다.
청와대가 이번 한미 정상회담의 성과로 내세울 수 있는 성과 역시 일련의 '친기업적 조치'들과 맞물린 투자유치액을 제외하면 "한미 FTA의 조속한 비준을 위해 양국 정상이 원론적인 합의를 이뤘다"는 수준일 것으로 보인다는 게 대체적인 예상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미국 의회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일이 만만치 않다. 같은 날 이뤄진 미 하원 관계자들과의 만남 자리에서 일부 참석자들은 한미 FTA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대통령이 쇠고기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다는 보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시점이었다. 이 대통령의 입장에서도 "일단 한숨은 돌렸다"는 생각이 들 법도 하다.
두툼한 미국산 스테이크를 썰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러나 이 대통령은 이날 한 국가의 대통령으로서 지켜야 했던 금도를 넘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공개적으로 협상타결 소식을 전한 이 대통령과 이를 지켜보던 일부 청와대 수행원, 그리고 미국 재계 관계자들이 함께 박수를 친 대목이 그렇다.
복잡한 문제가 아니다. 쇠고기 수입문제는 국내 축산농가에 엄청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 이미 업계에서는 '줄도산'에 대한 푸념이 흘러 나오고 있다.
광우병에 대한 우려도 물론이다. 우리 국민들은 이제 광우병 발생확률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알려진 뼈 있는 부위와 30개월 이상된 쇠고기를 식탁에 올려야 한다. 속 사정이야 어쨌든 '환호'는 자제했어야 했다.
공교롭게도 이날 만찬의 메인 요리로는 미국 몬태나 산 쇠고기 스테이크가 올라 왔다. 이 대통령은 미국산 쇠고기를 맛보면서 공개적으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재개됐음을 공표한 셈이다. 논란을 예상한 청와대에서는 "쇠고기 협상이 타결돼 박수를 친 것이 아니라 한미 FTA 비준 가능성이 한층 높아져 박수를 친 것"이라는 해명을 덧붙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 대통령은 농담까지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 줬다. 이 대통령은 "양국 대표들이 어젯밤에 한 숨도 안 자고 밤을 새 협상을 했다고 들었다"며 "새벽에는 두 사람이 잠결에 합의한 것 같다"고 말했다. 좌중에는 금새 웃음이 번졌다.
이 대통령이 흐뭇한 표정으로 두툼한 미국산 쇠고기 스테이크를 썰고 있는 동안, 협상 타결 소식에 박수를 치고 있는 동안, 그리고 쇠고기 협상과 관련한 천연덕스러운 '농담'을 던지고 있는 동안 이로 인해 예상되는 피해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할 국민들의 마음은 어땠을까.
상처입은 국민들 가슴을 어루만지는 게 지도자의 중요한 역할일 터. 그만한 기대도 우리에겐 사치인 것일까.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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