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지금 나왔다면, 과연 잘 팔렸을까? 노무현 정부 시절 방영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지금 텔레비전에 나온다면, 시청률이 얼마나 될까?
많이 안 볼 것 같다. 장강명의 소설 <한국이 싫어서>가 널리 읽히는 게 요즘이다. 낡은 고려를 무너뜨리는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가 인기를 끄는 게 지금이다. 망해가는 나라를 구한 영웅보다는, 썩은 나라를 성토하는 이야기에 열광한다.
이순신 이야기의 인기는, 나라가 잘 돼야 개인에게도 좋다는 믿음과 맞물려 있다. 그게 없다면, 나라 구한 영웅에게 열광할 이유가 줄어든다. 요즘은 '나라와 개인은 별개'라는 생각이 꽤 퍼졌다. 국가주의 선동에 열광해봤자, 개인에게 돌아오는 건 없다. 국가의 성공으로 혜택을 보는 건 소수다. 그러니까 '헬조선'이다. 이런 분위기에선 이순신보다 정도전이 더 매력적이다. 드라마 <정도전>과 <육룡이 나르샤>가 잇따라 흥행한 건 우연이 아니다.
'금수저' 김현종이 사랑하는 나라엔 누가 살까?
뜬금없이 이순신 이야기를 꺼낸 건, 오늘자 정치 뉴스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이 김현종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를 영입했다. 딱 10년 전, 김 교수는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내면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을 주도했다.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었다. 그 뒤엔 유엔 대사를 거쳐 삼성전자 해외법무 총괄 사장을 지냈다. 그는 18일 입당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제 깊은 곳으로부터 단호한 음성이 들렸습니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다!'는 소리였습니다."
'12척의 배', 정치인들이 자주 쓰는 수사다. 그걸 또 꺼냈다.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에게 자신을 빗댄 표현인데, 듣기 민망하다. 이순신은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나 늦깎이로 무과에 합격했다. 이후 함경도에서 야전 장교로 오래 일했다.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수군 지휘관이 된 뒤에도 백의종군을 했다. 밑바닥 병사, 백성들과 부대낀 경험이 풍부하다.
반면, 김현종 교수는 전형적인 '금수저'다. 고위 외교관 및 언론사 경영자였던 아버지를 뒀다. 어린 시절부터 미국 유학을 했다. 고등학교, 대학교, 대학원을 모두 미국에서 마쳤다. 한국에 와서 교수를 하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발탁돼 장관급 공직자가 됐다. 그 뒤로도 계속 마른 땅만 밟았다.
그가 자신을 이순신으로 여긴다면, 그가 구하고 싶은 나라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 곳일까. 평생 땅만 들여다 본 농부, 미국 유학은 꿈도 못 꾸는, 당장 새 학기 등록금이 두려운 보통 젊은이들, 언론사 회장 아버지는커녕 휴대전화를 탈탈 털어도 연줄에 기댈만한 사람 이름 하나 찾을 수 없는 보통 사람들. 그들이 사는 나라는 아닐 것 같다.
그들의 애국심이 불안한 까닭
한국의 주류 엘리트가 미국 유학을 하면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는 일은 흔하다. 성적은 내가 더 좋은데, 영어 발음이 어눌하다는 이유로 무시당했을 때, 내가 더 똑똑한 것 같은데 피부색이 누렇다고 밀려날 때, 애국심이 끓어오른다. '조국이 힘이 셌다면, 이런 설움 겪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애국도, 종류가 있다. 주류 엘리트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애국이 있다. 삼성전자 광고판이 뉴욕 한복판에 세워지면, 미국 엘리트가 한류 스타에 열광하면, 한국 엘리트의 자존심도 산다. 이런 애국을 위해서라면, OECD 국가 최고 수준의 자살률 등 어두운 소식은 감추는 게 좋다.
김현종 교수의 입당 인사, 그리고 그가 전에 내놨던 말과 글들에서 뚝뚝 떨어지는 애국심은 어떤 종류일까. 분명한 건, 그가 사랑한다는 대한민국 안에 농민, 영세자영업자, 비정규직, 중소기업 노동자, 청년 실업자를 위한 자리는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한미 FTA 추진 10년, '낙수 효과' 기대감은 사라졌다
그가 추진한 한미 FTA가 수출 대기업을 위한 것이었다는 점은 논쟁할 여지조차 없다. 다만 대기업이 누린 혜택의 규모를 둘러싼 논란만 있을 뿐이다. 대기업에겐 아주 좋았다, 혹은 대기업조차 큰 재미는 못 봤다. 이런 두 극단 사이를 오가는 논란이다.
따라서 그가 자랑하는 한미 FTA는, 한국인에게 대기업이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대기업의 고용은 전체 노동자의 10% 남짓에 불과하다. 대기업에게 좋은 일이 사회에도 좋다는 논리는 근거가 있나. 전에는 어느 정도 통하는 논리였다. 대기업이 수출을 늘리면, 총량 차원의 경제 지표는 좋아졌다. 정부 관료, 그리고 주류 엘리트 집단의 자존심 정도는 살릴 수 있었다.
이제는 그마저도 아니다. 수출 대기업 중심 성장 모델의 상징이었던 한국 조선 산업은 늪에 빠졌다. 건져 올리는 비용은 결국 사회가 부담한다. 한국의 자존심으로 통하던 삼성 스마트폰 역시 성장을 멈췄다. 주력산업이 애물단지가 되는 형국이다.
김현종 교수가 한미 FTA를 추진할 당시와 지금은 대기업의 상황, 그리고 대기업에 거는 기대가 모두 다르다. 10년 전에는 삼성이 잘 되면, 내 자식 취업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 이들이 꽤 있었다. 이른바 '낙수 효과' 기대감이다. 지금은 다르다. 삼성의 성장과 내 가족의 생계는 별개라는 믿음이 일반적이다.
2000년대 초반 이후 대기업과 국민 경제는 반대로 움직였다
눈을 더 크게 뜨고 살피면, 결론은 더 우울해진다. 박형준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부소장에 따르면, 1960년부터 1990년까지 30년 간 삼성의 자산과 이윤은 국민경제의 발전 속도보다 20배나 빠르게 성장했다. 속도는 달라도 방향이 겹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렇지 않으므로 문제가 크다. 박 부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1987년부터 1996년까지 10년 동안은 GDP(국내 총생산) 성장률과 국민가처분소득 대비 법인기업 이윤 비율이 같은 방향 곡선을 그린다. 그런데 2001년부터 2010년까지 10년 동안은 둘이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다. 국민가처분소득 대비 법인기업 이윤 비율이 늘어나면, GDP 성장률이 떨어진다. 국내 다른 경제주체를 희생한 대가로, 기업이 이익을 누리는 경향이 확연해졌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 시기를 거치며 비정규직이 확산됐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벌어졌으며, 대기업의 골목 상권 진출이 두드러졌다.
재벌, 국민 경제를 숙주 삼은 기생충?
실제로 국민총소득에서 가계소득이 차지하는 비중은 2000년 73.6%였으나, 2010년에는 63%가 됐다. 가계소득 비중이 줄어드는 동시에 가계 내의 소득 불평등은 더 심해졌다. 이는 가계소득이 낮은 집단은 전보다 형편이 나빠졌다는 뜻이다. 10대 그룹 총수들이 보유한 주식가치는 2000년 9370억 원에서 2011년 28조3560억 원으로 서른 배 가까이 늘었다. 그들이 받는 배당 소득 역시 2001년 310억 원에서 2011년 1780억 원으로 여섯 배 가까이 늘었다.
이런 지표를 살피면, 대기업이 성장해야 국민 경제가 풍요로워진다는 말을 할 수가 없다. 오히려 재벌 기업은 국민 경제를 숙주로 삼는 기생충에 가까워보인다. 기생충이 살찌면 숙주는 병이 든다.
한미 FTA와 공존하는 '경제 민주화'…'창조 경제'와 얼마나 다른가
지난 대선 당시 나왔던 '경제 민주화' 구호는 이런 구조를 바로잡자는 거였다. 대기업의 성장이 국민 경제의 희생을 뜻하는 구조에서 누가 한국의 미래를 낙관하겠나.
그런데 '경제 민주화'를 전매특허처럼 내세우는 인물이 이끄는 정당이 김현종 교수를 영입했다. 대기업의 성장과 국민 경제의 풍요가 엇갈리기 시작한 2000년대 초중반, 대기업을 위한 FTA를 추진했고, 대기업 사장으로 스카우트됐으며, 10년 전 당시 생각에서 조금도 변화가 없어 보이는 '금수저' 인사가 어쩌면 '경제 민주화' 정당의 국회의원이 될 수도 있겠다. 이런 '경제 민주화'라면, 박근혜 대통령이 입에 달고 다니는 '창조 경제'와 뭐가 다른지 모르겠다. 어차피 둘 다 실체가 없다. 그렇다면, 집권 이후 행보 역시 비슷할 건가.
노무현 정부가 무조건 잘못했다는 주장은 헛소리다. 무조건 잘했다는 주장 역시 마찬가지다. 잘한 점과 잘못한 점이 섞여 있다. 진짜 중요한 건, 무엇을 잘했다고, 무엇을 잘못했다고 보느냐다. 그게 사람마다 다르다. 어떤 이들은 노무현 정부가 잘한 일로 한미 FTA 추진을 꼽는다. 또 어떤 이들은 정반대로 이야기한다.
더불어민주당 지도부에 묻고 싶다. 노무현 정부가 잘한 점이, 그리고 잘못한 점이 뭐라고 보나. 그걸 알아야, 이른바 '친노'를 둘러싼 온갖 설왕설래도 정리할 수 있다.
"삼성이 개인 기업?"…노무현 정부와 삼성을 모두 욕보였다
한 가지 더.
김현종 교수는 18일 입당 인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제기구인 WTO, 대한민국 정부의 통상교섭본부장, UN대사, 개인 기업인 삼성 해외법률 사장을 두루 거쳤습니다. 그러나 정치 신인으로 입문합니다."
삼성이 '개인 기업'이라고 했다, 이게 말이 되나? 삼성 지분 가운데 이건희 회장 일가의 지분은 얼마 안 된다. 최대 주주이기는 하나, 과반에는 턱없이 못 미친다. 지분만 놓고 보면, 삼성 그룹은 이건희 회장 일가, 국민연금, 해외 투자자가 함께 지배하는 구조다. 물론 소액주주의 몫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런데 왜 '개인 기업'인가? 이런 생각을 지닌 사람을 '경제 민주화' 정당이 영입했다. 한마디로, 코미디다.
그 발언이 사소한 실수라고? 그 역시 코미디다. 단어 하나 잘못 쓰면, 산업이 통째로 흔들리는 게 통상 협상이다. 글로벌 기업의 법정 다툼에선 사소한 표현 하나가 수천억 원을 움직인다. 그런데 자기 인생을 건 선택에서 이런 실수를 하는 사람이 통상교섭본부장과 삼성 해외법무 총괄 사장을 지냈다. 노무현 정부와 삼성을 모두 욕보인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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