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남산학교(교장 김구석, 경주남산연구소 소장)는 경주가 온통 꽃대궐을 이루는 4월, 제6강으로 봄맞이 경주남산 답사에 나섭니다. 경주남산 답사는 천여 년 전 신라인(新羅人)이 되어보는, 마음 설레면서도 신비한 체험길입니다.
경주남산학교는 2011년 11월 개교했습니다. 김구석 교장선생님은 천생 경주사람입니다. 경주에서 나고 자라, 지금 경주남산 밑에서 살고 있습니다. 30년 세월을 경주의 문화유산과 남산을 답사하고 있습니다. 동국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와 같은 대학원 미술사학과를 다녔고, 대학에서 문화유산을 가르쳤고, 지금은 경주남산연구소를 운영하며, 경주의 문화유산 답사와 남산 답사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경주남산학교를 여는 취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삼국유사>는 신라의 불교 공인 후, 서라벌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절들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하고(寺寺星張)
탑들은 기러기처럼 줄지어 늘어섰다(塔塔雁行)"
이러한 표현은 현재의 경주남산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서라벌의 황금시절, 시가지가 남산의 동서 양쪽으로 뻗어나가면서 곳곳에 절과 탑들을 세워 남산을 에워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니, 절과 탑들이 남산을 에워싸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 남산 속으로 파고들어가, 남산 자체가 온통 절과 탑들로 장엄(莊嚴)되기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절과 탑의 행렬은, 밤하늘의 별처럼 총총히 퍼지면서 남산의 북단 동서 양쪽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수많은 절터에 남아 있는 유적들은 옛날 남산의 풍성했던 시절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경주남산의 유적들은 주로 석탑과 석불들인데, 그것들이 자연과 일체를 이루고 있는 데에 큰 매력이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온전한 모습을 지니고 있는 것들이 드문드문 있기도 하지만, 많은 유적들이 오랜 세월에 걸쳐 부서지고 무너지고 하여 원래의 모습을 잃고 있는 것들도 적지 않습니다.
온전히 남아 있는 것들은 그 아름다움으로 보는 이를 매혹시키는가 하면, 온전치 못한 것들 - 폐탑과 폐불들은 그 처연함으로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도 합니다.
남산 골짜기에 처박힌 폐탑재나 남산 바위 위에 조각되어 마모되어 가는 불상들은 고요히 천년 세월을 증언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남산 구석구석에 자리 잡고 있는 탑과 불상, 폐탑과 파불 등은 대부분 깊은 골짜기 같은 데에 고요히 숨어 있지만, 서남산 용장골의 용장사 터 같은 경우에는 삼층석탑과 마애불이 시원한 전망을 거느리고 온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기도 합니다.
이렇게 남산 곳곳에 남아 있는 불상들의 형상 속에서 우리는 신라 이후 이 땅의 갑남을녀(甲男乙女), 민초들의 초상을 찾아볼 수도 있습니다. 남산 곳곳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들, 그 얼굴 모습 속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들의 얼굴을 발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상의 토착화>라고 부를 수도 있는 이러한 현상은 특히 경주남산에서 풍부한 예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남산 곳곳에 조성되어 있는 불상들은 거개가 노천에서 천년의 세월을 거친 것들인데, 이들 불상들을 유심히 살피다보면 햇빛이 그 참모습을 보여 주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거기 바위 속에 없는 듯이 있던 부처가 어느 순간 한 줄기 햇빛을 받음으로써 느닷없이 나타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요술이 행해지고 있는 곳이 바로 경주의, 남산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야외박물관>이라 할 경주남산은 2000년 12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된, 우리의 귀중한 <보물>입니다.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50여 개소, 불상 130여 구, 탑 100여 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무려 700여 점의 문화유산이 산재해 있습니다.
서라벌의 남쪽에 솟았다 하여 <남산>이라 불리는 경주남산은 높이가 5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코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역사적, 문화·예술적, 종교·철학적 측면에서는 매우 크고 위대한 산입니다.따라서 경주남산은 단순히 걷는 산이 아닙니다. 산모롱이를 돌면 불상을 만나고, 언덕을 타고 넘으면 석탑이 기다리고 있는, 그리하여 1천여 년 전 신라인(新羅人)이 되어보는, 마음 설레면서도 신비한 체험길입니다.
경주남산학교 봄강의(제6강)는 4월 9(토)∼10(일)일, 1박2일로 경주남산에서 열립니다. 첫날 주제는 <천년 만에 깨어난 열암골 마애불>과 <동남산 기슭을 수놓은 걸작 문화유산들>이고, 둘째 날은 <미술사의 보고(寶庫), 삼릉에서 용장까지>입니다. 강의는, 김구석 교장선생님이 직접 현장에서 경주남산을 속속들이, 친절하게 안내·해설해주십니다.
제6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1일 4월 9일 토요일 : <천년 만에 깨어난 열암골 마애불>과 <동남산 기슭을 수놓은 걸작 문화유산들>]
06:3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2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경주남산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김밥과 식수가 아침식사로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6강 여는 모임
11:00 경주 도착, 점심식사(<보성할매비빔밥>에서 야채비빔밥)
11:40-17:40 <천년 만에 깨어난 열암골 마애불>과 <동남산 기슭을 수놓은 걸작 문화유산들> 답사(일부 구간은 버스로 이동합니다)
열암골 주차장→발견! 마애대불과 열암골 석조여래좌상→봉화대→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칠불암 마애불상군→염불사지→남산리 절터 쌍탑→서출지→보리사→미륵골 마애여래좌상→탑골 마애불상군→부처골 감실불상
답사는 열암골에서 시작합니다. 열암골은 찾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골짜기였으나, 2005년 폐허의 절터에서 기적같이 부처님 머리가 발견되고, 2007년에는 천 년 만에 마애대불이 발견되면서 유명해진 골짜기입니다.
이어 수십 길 벼랑 위 하늘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는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을 만납니다. 바로 아래, 이백 척이 넘은 바위 절벽에 새겨진 통일신라 전성기의 신라마애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감동적으로 만난 후 남산의 깊은 솔숲 향기를 맡으면서 하산합니다.
산 아래, 기슭을 따라 자리한 문화유산으로서는, 낭낭한 염불소리가 서라벌 삼백육십 방 일십칠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전해지는 염불스님의 염불사지, 통일신라 아름다운 탑 중의 하나인 남산리 절터 동서 쌍탑, 신라불교 공인의 어려움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서출지가 있습니다.
또 7세기 초에 조성된 신라 최초의 마애불상인 부처골 감실여래좌상, 높이 10여m 둘레 40여m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인 기법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조각한 탑골 부처바위 마애불상군, 8세기 말 신라불상의 걸작이며 남산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산 중턱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라벌 벌판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만나며 천여 년 전 신라인들이 되어봅니다.
18:30 저녁식사(<도솔마을>에서 경주한정식>
19:30 경주 명소 야경 산책
20:30 취침(<펜션남산>, 다인실)
[제2일 4월 10일 일요일 : <미술사의 보고(寶庫), 삼릉에서 용장까지>]
06:00 기상
07:00-07:40 아침식사(<부강식당>에서 생선찌개한식)
08:00-15:00 <미술사의 보고(寶庫), 삼릉에서 용장까지> 답사(점심식사는 경주남산에서 김밥도시락으로 합니다)
배동 삼존석불입상→삼릉→냉골 석조여래좌상→마애관음보살입상→선각육존불→마애여래좌상→석조여래좌상→선각마애여래상→상선암 선각보살상→상선암 마애대좌불→금송정터와 바둑바위→상사바위와 소석불→금오봉 정상→대연화대(전 삼화령)→탑기단석→용장사지 삼층석탑→마애여래좌상→삼륜대좌불→용장사터→탑재와 석등대석→용장계 절골 석조약사여래좌상→용장마을
이 길은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는 신라석불의 보고입니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 걸작인 배리삼존불, 통일신라의 문화적 성숙기에 조성된 풍만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보이는 냉골 석조여래좌상,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의 마애관음입상, 힘 있는 붓으로 한 번에 그린 듯한 선각육존불, 남산에서 유일한 고려 초기의 마애여래좌상, 통일 직후의 아름다우면서도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름다운 석조여래좌상,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그림자를 보여주는 듯한 선각마애여래상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또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크며 바위 속에서 현신(現身)하는 순간을 새긴 마애여래대좌불,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우뚝 선 용장사 삼층석탑, 남산에서 가장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의 마애여래좌상,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는 삼륜대좌불, 김시습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한 용장사지, 신라 하대 방형대좌의 약사여래좌상 등 실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신라불상을 두루 만날 수 있는, 마음 설레는 답사길입니다.
15:00 제6강 마무리모임. 서울로 출발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가벼운 등산복/배낭/등산화/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스틱, 무릎보호대,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식수, 간식, 과일, 자외선차단제, 헤드랜턴, 세면도구, 세수수건, 필기도구 등(기본 비상약은 준비됨)
▶경주남산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경주남산학교 제6강 학습자료]
<경주남산>
서라벌의 남쪽에 솟았다 하여 '남산'이라 불리는 남산은 높이가 500m에도 미치지 못하는 결코 높지 않은 산이지만 역사적, 문화 예술, 종교와 철학적이라는 측면에서는 크고 위대한 산이다.
신라 최초의 왕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하신 나정과 초기 궁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창림사터에서부터 신라 천 년의 역사를 마감하는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까지 신라 역사의 시작과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되는 곳이 모두 남산이며, 석탑 하나 놓을 자리만 있으면 모두 절터가 되고, 바위는 모두가 불상이라 할 정도로 산 곳곳에 수많은 절터와 불상, 석탑을 품고 있는, 흔히 말하는 노천박물관이 바로 남산이기도 하다. 또한, 신라 박씨 세 왕의 능과 유난히 불상들이 많은 삼릉곡도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용장곡 용장사지는 조선 초 매월당 김시습이〈금오신화〉를 집필한 곳으로 유명하기도 하다.
삼릉곡 반대편에는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데 큰 공헌을 한 김유신, 김춘추 등을 기리고 그 정신을 배우기 위해 건립한 화랑교육원과 통일전이 있으며 한여름 연꽃이 만발할 때 사진사들의 출사지로도 유명한 서출지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해 준다. 다소 힘들더라도 산행을 통하여 둘러본다면 남산의 경관과 신라 불교 유적의 백미를 모두 볼 수 있는 권역이기도 하다. 남산에서 부처의 마음과 미소를 배워보자.
남산은 서라벌의 진산(鎭山)이다. 북의 금오봉(金鰲峰, 468m)과 남의 고위봉(高位峰, 494m)을 중심으로 동서 너비 4km, 남북 길이 10km의 타원형으로, 한 마리의 거북이 서라벌 깊숙이 들어와 엎드린 형상이다. 골은 깊고 능선은 변화무쌍하여 기암괴석이 만물상을 이루었으니 작으면서도 큰 산이다.
남산에는 온갖 전설이 남아 있고,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의 산이며, 선조들의 숨결이 가득한 민족문화의 산실이다. 이 산 주변에는 신석기 말기부터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신라시조 박혁거세거서간이 탄강(誕降)한 나정(蘿井)과 초기 왕궁, 나을신궁(奈乙神宮), 왕릉이 즐비하며, 도성(都城)을 지켜온 남산신성(南山新城)을 비롯한 4곳의 산성과,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鮑石亭趾)가 있어 남산은 실로 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 한 산이라 할 수 있다.
남산에는 많은 불상과 탑들이 남아 있다. 그 대부분은 석탑(石塔)과 석불(石佛)로서 특히 마애불(磨崖佛)이 많다. 이처럼 많은 유물들이 돌로 만들어진 데에는 질 좋은 화강암이 많기도 하지만, 불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신앙된 바위 신앙과도 관련이 깊다.
아득한 옛날부터 남산 바위 속에는 하늘나라의 신들과 땅위의 선신(善神) 들이 머물면서 이 땅의 백성들을 지켜준다고 믿었으며, 불교가 전래된 이후에는 산 속, 바위 속의 신들이 부처와 보살로 바뀌어 불교의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왔다. 이러한 신앙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도 많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비파바위(琵琶巖)의 부처님이 망덕사(望德寺)의 낙성재(落成齋)에 누추한 옷차림으로 참석하였는데, 왕이 그 누추함을 업신여기자, 왕을 꾸짖고는 진신석가(眞身釋迦)의 모습으로 바뀌어 홀연히 남산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있으며, 누추한 승복을 입고 광주리에 물고기를 담아 들고 나타난 문수보살(文殊菩薩)을 경흥국사(景興國師)의 제자가 나무라자, 말을 타며 호사스럽게 지내는 경흥국사를 크게 꾸짖고는 다시 남산 속으로 숨어버린 문수보살의 이야기도 있으며, 충담(忠談)스님은 삼화령(三花嶺)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다공양(茶供養)을 올린 후 경덕왕(景德王)에게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올려 군신(君臣)과 백성이 서로의 본분을 다할 때 나라가 태평하다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설화들은 곧 남산과 남산 바위 속에는 부처와 보살이 머물면서 권세 있는 자나, 존경받는 지식인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는 산에서 내려와 호되게 꾸짖고 가르침을 주고는 다시 산 속, 바위 속에 숨었다가, 백성들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내려와 보살펴 준다고 신앙되어 왔던 것이다. 이러한 신앙은 또한 예술로 승화되고 표현되어, 골마다 절이 세워지고, 바위마다 불상(佛像)이 조성되며, 수많은 탑이 세워져 불국토(佛國土)를 이루었다.
남산에 불상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은 7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다. 7세기 초에 조성된 동남산 부처골 감실여래좌상(佛谷龕室如來坐像)은 투박한 시골 할머니가 돌로 만든 집 속에서 편안히 쉬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고즈넉한 주변 분위기와 어울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온하게 해주는 한국 최고(最古)의 감실불(龕室佛)이며, 7세기 중엽의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의상(石造彌勒三尊佛倚像)과 선방곡 석조여래삼존불(石造如來三尊佛)은 티 없이 천진무구한 어린아이의 웃음으로 잘 알려져 있다.
7세기 후반에 불세계(佛世界)를 만다라적(曼多羅的)인 기법으로 새겨 놓은 탑곡 마애조상군(磨崖造像群)은 사방의 불보살과 비천(飛天)들이 시시각각 햇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나타나는 웃는 모습들은 가히 환상적인 불세계를 표현하고도 남음이 있다. 삼국통일 후 남산은 불보살이 머무는 신령스런 성산(聖山)으로 신앙되어 더욱 많은 탑과 불상이 조성되기에 이르렀다.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에 사방불(四方佛)을 더하여 조성한 칠불암(七佛庵) 마애조상군은 심산궁곡 바위 절벽을 부처님들이 머무는 하늘나라로 보고 험준한 산등성이에 절을 세운 용기와 큰 바위를 쪼아 대불(大佛)들을 조성하여 화엄세계(華嚴世界)를 구현해 낸 신앙의 열정에는 그저 감격 할 뿐이다.
조선초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이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용장계곡 용장사지(茸長寺址)의 석조삼륜대좌불(石造三輪臺坐佛)은 자연석 바위를 하대석으로 삼고 둥글둥글한 대좌를 삼단으로 놓아 그 위 연꽃 방석에 부처님을 모셨으니 바로 수미산(須彌山) 위 도솔천(兜率天)의 미륵보살을 모신 것이 아니겠는가? <삼국유사>에 의하면 이 불상은 유가종(瑜伽宗)의 대덕(大德)이신 대현(大賢)스님께서 염불하면서 돌면 이 미륵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남산 전체가 마애불의 보고(寶庫)이지만, 특히 냉골(삼릉계곡)은 마애불이 많다. 입가에 방글방글 미소를 머금은 채 금방 하늘에서 내려온 듯한 마애관음보살입상(磨崖觀音菩薩立像), 다듬지 않은 넓은 바위 면에 사바세계(裟婆世界)에서 설법하고 있는 석가삼존불과, 극락으로 왕생(往生)하는 중생을 마중 나오시는 신비스런 모습의 내영아미타여래(來迎阿彌陀如來)를 한 폭의 그림으로 새긴 선각육존불(線刻六尊佛), 얼굴은 원만상으로 조각하고 몸은 억센 선으로, 연화대좌는 부드럽고 희미한 선으로 처리하여, 기도하는 중생을 위하여 바위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듯한 높이 6m의 상선암 마애대좌불(磨崖大坐佛) 등 남산 전체가 불보살의 세계를 옮겨 놓은 듯하다.
부처님 나라를 그리는 간절한 신앙은 탑에서도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용장계곡의 용장사지 삼층석탑은 200여m가 넘는 높은 바위 봉우리를 하층기단으로 삼아 그 위에 상층기단을 쌓고 탑신(塔身)과 옥개석(屋蓋石)을 얹어 삼층석탑을 쌓았으니 하층기단인 바위산은 바로 8만 유순(由旬)이나 되는 수미산이 되는 것이요, 탑 위 푸른 하늘이 수미산정(須彌山頂)의 부처님 세계가 되니, 서라벌 벌판은 부처님이 굽어보는 복된 땅이 되는 것이다. 위 산을 기단으로 삼은 탑은 최근 복원한 잠늠골 삼층석탑과 늠비봉 오층석탑에서도 나타날 뿐만 아니라, 초기 왕궁지였던 창림사지(昌林寺址) 삼층석탑과 남산리 사지(寺址) 서삼층석탑에 이르러서는 상층기단부에 팔부중상(八部衆像)의 조각으로 나타나고 있다. 팔부중상은 사천왕(四天王)의 장수(將帥)이니 탑의 기단부가 수미산이 되는 것이다.
남산에 있는 불교유적의 가치는 자연과의 조화와 다양성에 있다. 편편한 바위가 있으면 불상을 새기고, 반반한 터가 있으면 절을 세우고, 높은 봉이 있으면 탑을 세우되 자연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조성하였다. 비록 바위 속에 부처님이 계신다고 믿고 있어도 바위가 불상을 새기기에 적정하지 않으면 불상을 새기지 않고 예배하였으며, 절을 세워도 산을 깎고 계곡을 메운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는다.
신라인들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바위 속에 있는 부처를 보고, 정(釘)을 들고 바위 속에 숨어 계신 부처님을 찾아낸 것이다. 남산은 자연과 예술이 조화되어 산 전체가 보물이니 세계에 그 유례가 없다. 남산을 아니 보고 어찌 경주를 보았다 할 것이며, 몇 번 오르고 어찌 남산을 안다고 할 것인가?
남산에는 왕릉 13기, 산성지(山城址) 4개소, 사지(寺址) 150여 개소, 불상 130여 구, 탑 100여 기, 석등 22기, 연화대 19점 등 700여 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으며, 이들 문화유적은 국보 1점, 보물 12점, 사적 14개소, 중요민속자료 1개소 등 44점이 지정되어 있고,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남산에는 고위봉과 금오봉 2개의 봉우리에 남북 8㎞, 동서 4㎞의 크기로,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남산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40여 계곡이 있고, 동쪽에는 낭산, 명활산, 서쪽에는 선도산, 벽도산, 옥녀봉, 북쪽에는 금강산, 금학산이 솟아 있다. 뿐만 아니라 토함산 줄기가 동해를 막는 성벽 구실을 하고 있어 남산은 옛 서라벌을 지키는 요새로서 훌륭한 역할을 하였다.
경주남산에는 150여 개소의 절터, 100여 기의 석탑, 130여 구의 불상이 있다. 일찍이 인간은 바위 속에 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대한 바위 앞에 섰을 때 외경심(畏敬心)을 갖게 된다. 고인돌(dolmen)이나 선돌(menhir)이 성스럽게 상징되는 것은 그 바위가 영적인 힘의 표식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삶의 터전을 지키고 증진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서 조상이나 사자(死者)를 돌에 고정시키게 된다. 그리고 불임의 여성은 자식을 갖기 위해서나, 집안의 큰일을 앞두고 공물을 바치며 거암(巨岩)에 치성을 드려 왔던 것이다.
"바위는 어떤 원리를 나누어 갖거나 상징을 구현하거나 우주적 공감을 표현한다. 바위는 영적 실재의 표식 혹은 성스러운 힘의 도구이며, 바위 자체는 그 성스러운 힘의 용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미르시아 일리아테(Mircea Eliaed)의 암석 신앙에 대한 해석은 인도에서 비롯하여 한국에까지 유행한 석굴조영이나 마애불의 유행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와 같이 바위라는 초월적 존재에 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감동적이며 야심적인 일이었던 것 같다. 그곳에서 원시 신앙과 고등 종교가 합쳐져서 아잔타석굴, 돈황석굴 같은 인류의 종교적 정열이 집약된 거대한 신체(神體)가 실현되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 경주 분지의 시가지 한 복판에 우뚝 서 있으며 접근이 용이했던 남산에도 수많은 기암괴석이 가득 차 있으니 그 암석에 수많은 불상을 새기고 또한 탑을 세우며 한편으로 나라와 집안의 풍요를 기원하였던 것 같다.
이와 같이 계곡마다 토속신앙과 불교신앙의 흔적이 보이며 종교적 정열이 한군데 집중된 암석 산은 경주 남산 이외에는 없는 것 같다. 그러기에 남산은 어떤 신비한 세계를 우리에게 펼쳐 보이는 것이니 야외박물관으로 소중히 보존해야 할 것이다.
<천년 만에 깨어난 열암골 마애불>
열암골은 경주남산 남단의 고위봉(494m)과 봉화대봉(476m), 천왕지봉(433m)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골짜기 중 하나다. 이 길은 찾는 사람이 없어 한적한 골짜기였으나, 2005년 폐허의 절터에서 부처님 머리가 발견되고, 2007년에는 천년 만에 마애대불이 발견되면서 유명해진 골짜기이다. 석조여래좌상과 마애대불이 위치한 곳은 작은 암자가 아니라 남산에서도 비교적 큰 규모의 가람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열암골 마애대불은 2007년 5월 발견되었으며, 이중의 육계(肉髻)에 소발(素髮)의 머리를 하고 있고, 타원형의 얼굴, 오똑하게 솟은 코, 아래로 내리뜬 길고 날카로운 눈매, 도톰하고 부드럽게 처리된 입술, 매우 큰 귀 등 뛰어난 조각 수법을 보이고 있다. 삼도는 입체적이며 어깨는 넓고, 가슴은 펴고 있어 당당한 모습이나, 수인은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다. 볼륨 있는 상호, 날카로운 눈매에서 느껴지는 엄숙함, 특이한 수인 등 8세기 후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여래좌상은 2005년 10월 부처님 머리가 발견되어 2009년 1월 복원되었다. 육계가 낮고 나발은 약간 큼직하게 표현되고 얼굴은 양감이 있지만 훼손이 심하다. 넓고 건장한 어깨와 부피감 있는 가슴을 넓게 벌리고 곧게 편 상반신 등, 신체는 당당하면서도 안정감 있는 비례이며, 법의는 통견이고 비교적 얇게 표현되어 신체의 윤곽이 드러나고 옷 주름은 자연스럽게 흐른다.
광배는 화염문, 당초문과 함께 9구의 화불을 조각, 섬세하고 치밀하여 우수한 조형성을 보여준다. 풍만하면서도 당당하고 안정감 있는 신체 표현, 대좌와 광배의 간결하면서도 섬세한 조각, 몸에 밀착된 법의 등 석굴암 본존불에서 완성된 통일신라시대 조각의 양식과 수법을 따르는 8세기말∼9세기초 제작으로 추정된다.
<동남산 기슭을 수놓은 걸작 문화유산들>
이어서 수십 길 벼랑 위 하늘나라에서 구름을 타고 도솔천 하늘을 유유히 노니는 신선암 마애보살유희좌상과 이백 척이 넘은 바위 절벽에 새겨진 통일신라 전성기의 신라마애불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칠불암 마애불상군을 감동적으로 만나고 남산의 깊은 솔숲 향기를 맡으면서 하산한다.
이어 산 아래, 기슭을 따라 깃든 문화유산으로 낭낭한 염불소리가 서라벌 삼백육십 방 십칠만 호에 들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전해지는 염불스님의 염불사지와 그곳에 새로이 복원된 8세기 중엽의 아름다운 삼층석탑 2기, 남산리 절터 동서 쌍탑, 신라불교 공인의 어려움을 짐작해 볼 수 있는 서출지를 답사한 후, 7세기 초에 조성된 신라 최초의 마애불상인 부처골 감실여래좌상, 높이 10여m 둘레 40여m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인 기법으로 부처님의 세계를 환상적으로 조각한 탑골 부처바위 마애불상군, 8세기 말 신라불상의 걸작이며 남산에서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미륵골 석조여래좌상, 산 중턱에서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라벌 벌판 백성들을 굽어 살피고 있는 마애여래좌상을 두루 만난다.
<미술사의 보고, 삼릉에서 용장까지>
이 코스는 배리 삼존불에서 시작하여 산기슭을 따라 삼릉을 답사하고, 냉골(삼릉계곡)을 따라 금오봉 정상을 거쳐 용장계곡으로 하산하는, 등산을 하면서 문화유적을 관광할 수 있는 코스로서 도시락 및 음료를 준비하여야 하고 등산 차림이 필요하다. 이 코스는 편의상 서남산주차장에 주차하고 삼릉에서부터 시작하여도 좋다. 소요시간 : 6시간 정도(단순 등산은 3.5시간 정도)
이 코스는 시간에 따라 자유로운 이용이 가능하다.
3시간 정도라면 상선암 위 바둑바위까지 갔다가 서남산주차장으로 돌아오면 되고,
2시간 정도라면 석조여래좌상(보물 666호)까지 왕복하면 되며,
1시간 정도라면 선각육존불까지 왕복하면 된다.
이 코스는 신라시대의 석불을 시대적으로 모두 만날 수 있는 신라석불의 보고이다. 먼저 삼국시대의 대표적 걸작인 배리삼존불, 통일신라의 문화적 성숙기에 조성된 풍만하면서도 늠름한 기상이 보이는 냉골 석조여래좌상, 하늘에서 하강하는 모습의 마애관음입상, 힘 있는 붓으로 한 번에 그린 듯한 선각육존불, 남산에서 유일한 고려초기의 마애여래좌상, 통일직후의 아름다우면서도 힘차게 타오르는 불꽃이 아름다운 석조여래좌상, 산길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에게 살며시 그림자를 보여주는 듯한 선각마애여래상,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크며 바위 속에서 현신하는 순간을 새긴 마애여래대좌불,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석탑이면서도 거대한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우뚝 선 용장사 삼층석탑, 남산에서 가장 씩씩하고 아름다운 청년기의 마애여래좌상, 대현스님께서 기도하면서 돌면 불상 또한 고개를 돌렸다는 삼륜대좌불, 김시습이 머물면서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집필한 용장사지, 신라하대 방형대좌의 약사여래좌상 등 실로 삼국시대부터 고려 초기까지 신라불상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코스이다. <출처 : 경주남산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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