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 <작은책>의 2016년 1월호부터 '나라 밖 이야기' 연재를 시작한다. 그동안 <작은책>의 편집자문위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지만 기여한 바가 별로 없었다. 이 연재를 통해 그동안 마음 한구석에 담아 왔던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다만 <작은책> 독자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지는 걱정으로 남는다. 능력이 부족한 데다 글쓰기에 점점 더 어려움을 느끼고 있어서다. 그럼에도 <작은책>의 독자들한테서 호응을 얻을 수 있다면 연재를 오래 지속하려고 한다.
'나라 밖 이야기'라고 꼭지 이름을 붙였지만, 내가 나라 밖 소식과 만나는 경로는 주로 프랑스의 일간지인 <르몽드>를 통해서다. 일상이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을 읽어야 한다!"는 다짐 아래 '파리의 택시운전사' 시절 이전부터 <르몽드>(Le Monde는 우리말로 '세계'라는 뜻이다)를 읽으려고 노력해 왔다. 나는 현직 기자들과 기자를 지망하는 청년들에게 외국 신문 하나를 꼭 읽으라고 권한다. 요즘 영어를 꽤 잘들 하지 않는가. 미국의 <뉴욕 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도 좋고, 영국의 <가디언>도 좋다. <뉴욕 타임스>에서 "한국의 평판에 가장 큰 위협은 경제가 아니라 정치"라면서 박근혜 정부를 비판한 사설을 읽거나, 신자유주의의 강력한 전파지인 <월스트리트 저널>에서 복면 시위자를 테러범으로 비유한 박근혜를 조롱한 기사를 읽는 기자라면, 적어도 '기레기'(기자+쓰레기)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흔히 프랑스의 중도 또는 중도좌파 신문으로 분류되는 <르몽드>는 내게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 하나는 세계 동향을 읽을 때 한국에서 주류를 차지하는 수구 언론이 파놓은 함정(이 함정에는 오른쪽 눈으로만 보기, 침소봉대하기, 아전인수하기, 자기들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잡기와 자기 입맛에 맞게 왜곡하기 등 갖가지가 있다)에 빠지지 않게 해 준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국에 만연된 '미국 중심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에 유럽의 시각으로 맞서게 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는 그 자체로 중요한 의미를 갖지만 그럼에도 충분하지 않다. <르몽드>도 유럽 중심 나아가 구미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가령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가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테러를 일으켰을 때 '우리는 미국인이다!'라는 사설을 써서 테러를 당한 미국인과 자신을 동일시할 줄 아는 <르몽드>였지만, 미국이 대량살상무기를 빙자하여 이라크를 침략했을 때 '우리는 이라크인이다!'라는 사설을 쓰지는 않았다. 미국의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침략을 비판하면서도 이라크인과 동일시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시리아인이다!
우리는 영화를 관람하면서 주인공과 나를 일치시킨다. 영화 속에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엑스트라는 말할 것도 없고 조연과도 일치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아무리 선한 역할을 맡았어도 조연이나 엑스트라와는 스스로 거리를 둔다. 그렇다면 '국제 정치'라는 냉정한 드라마 속에서 우리의 자리는 주인공에 가까울까, 엑스트라에 가까울까? 미국의 존스홉킨스 대학 교수 출신으로 카터 행정부 시절 국가안보담당보좌관을 역임한 즈비그뉴 브레진스키(Zbigniew Brzezinski)의 <거대한 체스판>(김명섭 옮김, 삼인 펴냄)이라는 저작이 있다. 이 책에는 친절하게 '21세기 미국의 세계전략과 유라시아'라는 부제가 달려 있다. 미국이 유라시아 대륙을 마치 거대한 체스판을 앞에 놓고 바라보듯 하면서 체스 게임을 벌이는 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제목인데, 이 체스 게임에서 우리의 자리는 '졸'에 지나지 않는다. 국제정치의 현실로 보면 그와 같다.
서양이 동양을 어떤 방식으로 바라보고 또 지배하는지에 관해 팔레스타인 출신의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adi Said)는 그의 역작 <오리엔탈리즘>(박홍규 옮김, 교보문고 펴냄)을 통해 날카롭게 파헤쳤다. 이에 관해 여기서 길게 말할 계제는 아니겠는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오늘날의 제국주의적 지배는 정치·경제·군사적인 지배뿐만 아니라, 바로 정치·경제·군사적 지배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도 문화제국주의라는 강력하면서도 은밀한 기제가 작동한다는 점이다. 여기에 영어가 중요하게 작용한다는 것은 물론이다. 또 우리에게 충분히 익숙해진 할리우드 영화를 빼놓을 수 없듯이, 세계의 주류 언론 또한 여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물론 세계의 주류 언론 앞에서 배타적 민족주의(쇼비니즘)에 빠져선 안 되겠고 그럴 필요도 없겠지만, 한순간도 우리의 자리를 인식함에 있어서 헤매선 안 되며 우리 정체성을 놓쳐선 안 된다.
지난해 11월 13일 금요일 저녁, IS(이슬람 국가)의 지하드 테러리스트들이 자행한 파리 테러로 130명의 사망자와 350여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세월호 참사 후 <한겨레>가 박재동 화백의 그림과 함께 희생자들의 사연을 연재했듯이, <르몽드>도 매일 희생자 다섯 명씩 추모하는 글을 사진과 함께 싣고 있다. 우리가 억울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가족들을 위로하는 한편 테러리스트들의 반인륜적 행위를 비난하고 응징해야 한다는 세계 여론에 동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자리를 제대로 인식한다면 여기서 멈추어선 안 된다. 2011년에 시작된 '아랍의 봄'은 수많은 시리아인들에게 오히려 재앙이 되었다. 알 아사드 정권과 쿠르드, IS 등 반군 세력 사이의 전쟁으로 이미 20만이 넘는 시리아인들이 죽음을 당했고 수백만 명이 난민 신세가 되었다. 우리는 기껏해야 유럽행 난민들에 관한 기사를 만날 뿐이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시리아인들이, 유럽에 갈 만한 경제적 능력이 없는 시리아인들이 요르단, 레바논, 이집트, 터키 등 가까운 나라에서 난민으로서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 없는 채로. 이런 상황에서 세계의 언론은 주로 어디를 비추고 있을까? 우리가 만나는 세계의 소식을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우리는 파리지앵이다!"는 크게 보이지만 "우리는 시리아인이다!"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처지가 파리지앵보다는 시리아인에 더 가깝다고 인식한다면 "우리는 시리아인이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하지 않을까?
'GDP 인종주의'의 덫
우리는 남북 분단이라는 비정상이면서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다. 이명박 정권에 이어 박근혜 정권 아래 남북 간 대결 상황은 더욱 첨예해지는 위에, 중국이 부상하면서 주변 4강국 사이의 힘의 균형은 일본의 전쟁국가화 등의 모습으로 일그러지고 있다. 미국이 가르쳐 주듯이 오늘날 제1세계는 전쟁을 일으키거나 높은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기는 하지만, 전쟁을 스스로 겪지는 않는다. 베트남 전쟁이 제1세계에 가르쳐 준 게 바로 이것이다. 그렇다면 가능성과 피해 면에서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이 테러의 위험일까, 아니면 전쟁의 위험일까. 우리가 "우리는 미국인이다!" 또는 "우리는 파리지앵이다!"라고 말할 수 없는 대신, "우리는 시리아인이다!"라고 말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자명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잘못된 인식 속에 갇혀 있다는 뚜렷한 증거가 있다. 바로 한국사회의 물질지상주의와 결합되어 만연해 있는 'GDP 인종주의'다. 미국인이나 유럽인을 비롯한 제1세계 사람들에겐 받는 것 없이 올려다보고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 제3세계 사람들에겐 주는 것 없이 깔보는 시선은 그대로 우리 자신에게 꽂혀 마땅하다. 우리는 누구의 처지와 가까운데 누구와 가까운 듯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
한국 민중의 눈, 한국의 노동자와 서민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은 오로지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이를테면, 나의 경우에 <르몽드>가 가진 상대적 이점은 우리 몫으로 남겨진 '세계 동향을 바라보는 한국 민중의 눈'을 갖기 위한 디딤돌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토대와 한계 위에서 우리 자리에서 균형 잡힌 시각, 주체적인 시각을 갖는 것, 이것이 이번 호부터 <작은책>에 연재하는 '나라 밖 이야기'의 지향점이라는 점을 감히 밝힌다.
홍세화 협동조합 가장자리 이사장의 '나라 밖 이야기'는 <작은책>과 필자의 동의를 받아, 한 달에 한 번 <프레시안>에 소개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