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선언이 나온 게 2007년 5월이다. 그리고 두 달 뒤, 협정문 서명본이 공개됐다. 그런데 타결 선언 당시 배포된 협정문과 다른 대목이 있었다.
미국에서 이미 보장된 것보다 강한 권리를, 한미 FTA가 새로 보장하지는 않는다는 내용이다. '그럴 거면 한미 FTA를 왜 하나'라는 의문이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회 소속 변호사들도 같은 궁금증을 품었다. 그래서 정부에게 정보 공개를 요구했다. 마침, 한국과 미국이 합의한 비공개 기간도 지난 시점이었다. 타결 선언 당시에는 없던 내용이 새로 들어간 이유를 공개하라는 것이다. 협상 진행 과정에서 만들어진 문서를 공개하라는 요구다. 그게 지난해 3월이다.
하지만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소송이 벌어졌다. 1심 법원은 민변의 손을 들어줬다. 통상 협상 진행 과정에 대한 정보를 공개하라는 판결은 이번이 처음이다. 따라서 '국익'을 위해 '밀실 협상'은 불가피하다는 정부 주장은 법적 근거가 무너졌다.
비공개 기간 지나도 문서 공개 거부한 정부…법원 "미국도 반대 안 할 것"
서울행정법원 행정13부(부장판사 반정우)는 21일 민변이 산업통상자원부를 상대로 낸 정보공개 거부 처분 취소 소송에서 원고 승소 판결했다.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생성된 문서를 공개하라는 판결이다.
한국과 미국은 한미 FTA 협상 과정에서 생성된 문서를 협정 발표 이후 3년 동안은 공개하지 않기로 합의했다. 비공개 기간은 지난해 3월 14일 종료됐다. 그런데도, 정부는 관련 문서를 공개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21일 판결문에서 "비공개 기간이 지난 이 사건 결정 당시의 시점에서 이 사건 정보를 공개한다고 해서 위 합의(한미 FTA)의 한쪽 당사자인 미국이 그 공개에 반대하거나 이의를 제기할 여지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밝혔다. 정부가 비공개 방침을 고집할 근거가 없다는 이야기다.
한국인 투자자 보호 관련 문장, 왜 추가됐나
공개 대상 문서는 "2007년 6월 21일부터 22일까지, 그리고 같은 달 25일부터 26일까지, 2회에 걸쳐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관한 재협상을 하여 같은 달 30일 협정문에 정식 서명을 하기까지 그 협정문 서문 중 아래 문장(한국인 투자자 보호와 관련된 문장)을 추가하기 위하여 한국과 미국 양측이 교환한 문서"다.
"아래 문장"이란 표현이 가리키는 내용은, "국내법에 따른 투자자 권리의 보호가 미 합중국에 있어서와 같이 이 협정에 규정된 것과 같거나 이를 상회하는 경우, 외국 투자자는 국내법에 따른 국내투자자보다 이로써 투자보호에 대한 더 큰 실질적인 권리를 부여받지 아니한다는 것에 동의하면서"다. ("Agreeing that foreign investors are not hereby accorded greater substantive rights with respect to investment protections than domestic investors under domestic law where, as in the United States, protections of investor rights under domestic law equal or exceed those set forth this Agreement.")
이는 한미 FTA를 통해 한국인 투자자가 기대할 수 있는 효과를 무력화하는 내용이다.
법원 "정보 공개 때문에 한국 정부 전략 공개될 위험 없다"
이런 내용이 추가되기까지 한국과 미국 정부가 교환한 문서를 공개하라는 게 이날 판결이다. 재판부는 "해당 정보 공개로 인해 자유무역협정 전반에 관한 한국 정부의 기본적인 입장이나 핵심적인 협상 전략 등이 외부에 알려질 위험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이어 재판부는 "정부가 다른 나라들과 자유무역협정 체결 협상을 할 때 직접적으로 불이익이나 방해를 받는다고도 단정하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민변 국제통상위원장 송기호 변호사는 이번 판결에 대해 "정부의 밀실 협상 관행에 법원이 제동을 걸었다"라며 "정부가 항소하지 않기를 바란다. 법원 판결을 존중하여 즉시 협상 문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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