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 전 곳곳에 울려 퍼진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구호가 이후 다가올 사회의 모습 대부분을 그려놓았다면 과장일까. 이 구호는 산업의 우열, 조세와 재정, 금융 등 자원 배분 방식으로서 경제 체제를, 이 체제에 봉사하는 노동의 지위를 지고의 사회 규범으로 예정하고 있었다.
수출은 처음부터 반(反)노동이었다. 구호가 등장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22살 청년 전태일은 노동자가 기계가 아닌 인간이라는 사실을 자기 몸을 불태워 선언해야 했다. 그리고 오늘 박근혜 정부는 노동 개악을 군사적으로 밀어붙이고 있다.
수출은 처음부터 반(反)농업이었다. 농업은 제조업의 수출 경쟁력 향상을 위해 값싼 식량과 값싼 노동력을 제공하는 역할에 머물러야 했다. 한국은 현재 가장 많은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은 나라이며, 농업의 산업적·문화적·생태적·안보적 가치는 수출 증대라는 단 하나의 비교우위 앞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수출은 무엇보다 반(反)복지였다. 수출 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재정은 주로 외자 도입을 통해 이뤄졌고 도입된 외자는 수출 기업에 대한 특혜 금융으로 이어졌다. 가계 소비를 억제하고 저축을 장려하기 위한 간접세 위주 조세 체계와 수출 기업의 직접세에 대한 각종 비과세 감면 특혜 정책이 결합했다. 개발 독재 시기의 조세 정책은 한 번도 근본적 개혁을 이루지 못하고 곧바로 신자유주의 감세 기조로 이어졌다. GDP 대비 한국의 총조세 부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보다 무려 10%포인트 정도로 낮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아버지의 꿈은 복지 국가였다"고 했지만, 수출 지상주의가 선택한 조세 재정 제도 안에서 복지의 꿈은 개꿈에 불과하다.
수출은 더 이상 시끄러운 구호로 떠받들어야 할 필요가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GDP 대비 상품 수출의 비율은 2000년 32.3%에서 2011년 49.7%로 올라섰다. 수출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고 내 삶이 무너진다. 체제의 전환이 없는 한,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출의 위기, 삶의 위기
그 수출이 위기에 처했다. 중국 경제가 경착륙할 것이냐 연착륙할 것이냐 논쟁이 일고 있다. 어떤 경우든 대중국 수출은 지난해보다 줄어들 것이다. 중국에 대한 원자재 수출에 의존해왔던 러시아, 브라질 등의 신흥국들은 마이너스 성장에 들어섰다. 실업률 하락 등 몇 가지 경기 회복 신호를 바탕으로 양적 완화를 종료한 미국도 내용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결코 10%대의 성장을 구가하던 중국의 과거 수출 물량을 소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2008년 금융 위기 당시 본격화된 유로존의 재정 위기는 계속되고 있다. 임금 덤핑에 기초한 가격 경쟁력에 의존해 변변한 기술 경쟁력을 확보하지 못한 한국의 수출 대기업들이 아무리 용을 써도 이 압도적 대외여건을 극복하기 어렵다.
또한 한국의 수출이 처한 위기는 단기적인 경기 사이클의 문제가 아니라 중장기적이고 구조적인 위기이다. 중국 중심의 수출 주도 성장과 미국 중심의 부채 의존 성장은 지속 불가능한 교환 체제였다. 개별 국가 차원에서 보더라도 노동 시장 유연화와 금융 자본주의로 집약되는 신자유주의 경제는 부채의존 소비로 유효수요를 가까스로 유지해왔고, 이제 임계점에 이른 상황이다.
종합하면, 한국은 반세기 전 수출 주도 공업화 전략의 채택 이후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장기 저성장 국면에 들어섰다. 이것의 의미는 외환 위기 때 경험한 비극적 풍경이 그보다 조금 더 긴 시간의 무대 위에 등장하리란 것이다. 부실 기업 정리와 대규모 정리 해고, 개인 파산, 가정 파탄, 노숙자들….
기댈 자산이 없는 사람들, 노동 소득을 통해 먹고사는 사람들은 이제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선택해야 한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박근혜 정부는 더 많은 비정규직, 더 긴 노동시간, 더 쉬운 해고, 더 낮은 임금, 축소 동결된 복지를 제시하고 있다. 오늘날 이 사회의 모습을 주조한 수출 주도 경제 체제를 노동의 추가적인 희생을 통해 유지하겠다는 것이다. OECD 최고 수준의 불안정·저임금·장시간 노동 체제를 더 강화하겠다는 발상의 뻔뻔스러움은 논외로 하자.
박근혜 정부의 구상은 경제 위기의 해법으로 거의 초현실적이다. 저성장은 저소비로부터 왔다. 소비 시장을 찾을 수 없는 기업이 투자를 늘릴 리 만무하다. 따라서 총고용은 유의미하게 증가하지 않는다. 행여 증가하더라도 정규직 1명의 몫을 비정규직 2명이 쪼개 갖는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저성장 위기는 박근혜 방식으로 극복할 수 없다.
'수출만이 살길'이라는 구호를 사회가 승인했을 때, 사회는 논리필연적으로 수출이 막힐 때 우리 모두 죽는다는 공포를 체제화하는 길로 나갔다. 따라서 수출이 막혀도 우리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체제의 전환만이 진정한 대안이 될 수 있다.
노동 체제와 사회경제 체제를 전환해야 한다. 비자발적 실업과 비자발적 비정규직이 없는 완전고용 상태의 노동사회, 빚이 아닌 소득에 의해 굴러가는 사회로 전환이 필요하다.
저성장 시대에는 노동 시간 단축만이 고용을 늘릴 수 있다. 주 35 노동 시간 상한제를 실시한다면 약 250만 명의 신규 일자리가 만들어진다. 저임금·장시간 노동은 약화된 노동의 교섭력을 매개로 불안정 노동 체제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노동 시간 단축으로 인한 추가 고용을 정규직 고용으로 의무화했을 경우에만 노동 소득 분배율을 높일 수 있다. 불안정 노동을 없애기 위해서는 기간제법, 파견제법 등 비정규 악법을 폐지하고 3개월 평균 35시간 이상 노동 시간에 대해서는 정규직 고용으로 의제해야 한다.
체제의 전환만이 저성장 시기의 유일한 해법
수출 절벽에 상응하는 내수 기반 확충을 위해서는 노동 시간 단축이 가계 소득의 축소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최저임금 1만 원을 법제화하고, 상여금 등 변동 급여 중심의 임금 체계를 기본급 중심으로 개편해야 한다.
노동 체제의 전환과 함께 수출 주도·부채 의존 경제 체제를 '소득 기반 경제'로 바꿔야 한다. 모든 국민에게 노동 유무에 관계없이 월 30만 원의 기본 소득을 지급한다면, 노동 시간 단축에 따른 소득 하락을 상쇄하고 소비를 진작시켜 내수 기반을 확충할 것이다. 의료, 주거, 교육 등에서 기본 복지를 확충해 생계비 지출을 줄여야 한다.
소득 기반 경제의 핵심은 근대 국가 수립 이후 한 번도 도입한 적이 없는 누진적 조세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그 최대 부담자는 마땅히 수출 주도 성장 모델의 최대 수혜자였으며 오늘날 국민 경제의 약탈자의 지위에 있는 재벌이어야 한다. 30대 재벌의 회계 장부에 비생산적 숫자로 기입돼 있는 유보금 규모의 4분의 1만 재정 정책으로 쓸 수 있다면, 저성장 국면에서도 노동자 시민의 희생으로 이룩한 경제 기반을 보존할 수 있다.
기업이 도산하고 세수가 부족한 시대에 이런 해법이 실행 가능한가? 답변은 성장 국면에서는 이런 전환의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우리의 삶을 5년이나 10년을 주기로 침체를 되풀이하는 수출 환경에 변덕에 볼모로 맡길 것인가? 저성장 시기야말로 체제 전환의 최적기이다.
(시민정치시평은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와 프레시안이 공동 기획·연재합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