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분위기 반전 메이커였다. 대통령 선거나 세월호 참사 직후와 같은 중대 국면이 되면 그가 나섰다. 아니, 더 엄밀하겐 새누리당의 1인자 박근혜가 그를 구원 투수로 호출했다.
이는 '청렴 강직'이란 그의 이름 앞에 붙었던 수식어 덕택이었다. 대중은 '차떼기' 비리를 파헤친 '국민 검사' 시절의 그를 좋아했고, 이런 점은 '박근혜의 호출'로 이어졌다.
결단력 있고 우직한 엘리트 법조인이란 표피는 새누리당이 한때 명운을 걸었던 '쇄신'이란 정치 상품과 찰떡같이 잘 맞아떨어졌다. 1인자 박근혜의 호출이란 배경은 당내 경쟁자들의 견제를 손쉽게 제어하는 유력한 무기가 됐다.
급기야 '유력 대권 주자론'까지 떠오르며 몸값이 치솟는 듯했다. 그랬던 그가 4.13 총선을 앞두고는 한 달 넘게 여기서 치이고 저기서 치이는 모습이다.
해운대냐, 마포냐, 동작이냐, 광진이냐, 노원이냐….
거론되는 출마지만 다섯 손가락을 넘는다. 어느 곳(동작·광진 등)은 당선이 쉽지 않고 어디(마포·해운대)서는 당내 경쟁자가 '딴 데를 알아보라'며 법석을 떠니 고민이 깊어지는 모양이다.
한 때 삼권분립의 한 축인 사법부의 최정점에 서 있었던 그로서는 너무나 초라한 모습이라고 평할 수밖에 없다. 벌써 몇 주째 출마지를 정하지 못 하고 있어 또 다른 '반전 메이커'가 된 안대희 전 대법관 얘기다.
"나는 예외로 해달라"는 '칭얼' 안대희…'청렴 강직'은 옛말
안 전 대법관은 억울한가 보다. 고난의 때가 오면 자신을 찾았던 박근혜 대통령도, 당을 위해 '험지 출마'를 결심하라 등 떠미는 김무성 대표도, 누구 하나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고 있다는 느낌에 서운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안 전 대법관이 이렇게 '우왕좌왕'하게 된 것은 누구보다 자신 때문이다.
안 전 대법관은 지난 시간 자신의 가장 큰 상품을 제 손으로 조금씩 망가 뜨려왔다. '청렴'은 '5개월 만에 16억'으로 요약되는 전관예우 논란으로 사실상 수명을 다했고, '강직'은 당과 수도권 의원들의 거듭된 '험지 출마' 요청에도 선뜻 마음을 굳히지 못하는 모습에서 서서히 사라졌다.
게다가 안 전 대법관 특유의 '꼿꼿한 자세'는 작금의 새누리당에는 외려 짐이다.
그는 15일 기자들을 만나 "험지로 보내면서 경선까지 하라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며 당 지도부를 향해 불만을 쏟아냈다. "100% 여론조사 방식으로 경선을 하면 야당의 공격까지 받을 수 있다. 더 어려운 상황에서 본선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부닥칠 수 있다"고도 했다.
이를 김무성 대표 등 새누리당 지도부가 긍정적인 의미의 '강직함'으로 받아들일 리는 만무해 보인다. 안 전 대법관의 이런 거듭되는 '칭얼거림'을 쉬운 말로 바꾸면, '당에서 공천룰을 어떻게 정하건, 나는 예외로 해달라'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친박계와 일전을 해오며 줄곧 '상향식 공천' 사수에 매달려 왔던 김 대표가 만약 안 전 대법관의 이 같은 요구를 받아준다면 어떻게 될까. 앞으로 새누리당의 공천은 아비규환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당장 '험지 출마' 요구에 몸을 사리는 후보가 어디 안 전 대법관뿐이던가. '나는 예외로 해달라'는 주장은 새누리당의 간판 후보로서 총선 승리에 주역이 되겠다면 쉽사리 하기 어려운 주장이 아니던가.
이른바 '진박(진실한 박근혜)' 후보들마저도 텃밭인 TK(대구·경북)나 강남에서 당내 경선을 치르는 중이다. 이들처럼 경선을 감내하며 자신이 원하는 출마지를 우기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패기 있게 '험지 출마로 새누리당의 승리를 이끌겠다'고 외치지도 못 하는 안 전 대법관의 모습은 '성골도 진골도 아닌 6두품'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준다.
본선 경쟁력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은 새누리당이나 정치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번쯤 해야 할 때다.
안대희의 원죄…쓰레기통에 던진 '삼권분립'
무엇보다 안 전 대법관이 또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뿌리이자 정체성이다.
그는 검사 출신이고, 무엇보다 대법관이었다. 한때 사법부의 정점에 올라 있던 이가 국무총리 후보자가 되었다가 전관예우 논란으로 자진 사퇴를 하더니, 62세의 나이에 '초선 의원'이 되겠다고 한다. 이는 민주사회의 기본 통치 원리에 민감한 이들이라면 곱게 볼래야 볼 수 없는 행보다.
과거 안 전 대법관은 퇴임 때만 해도 "대법관은 모든 공직의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이 발언은 명예로웠고 또 바람직했다. 아마도 그렇게 '자연인 안대희'로 남았다면, 존경받는 사회의 원로로 기록되었을 테고 또 여러 조건이 갖춰진다면 대법원장 자리에 거론됐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안 전 대법관은 제 입으로 뱉었던 말을 다 잊어버린 듯, 2012년 박근혜 당시 대선 후보의 호출로 '쇄신특별위원장'이 되며 새누리당의 문을 연다.
문제는 그 때까지만 해도 반짝반짝했을 '청렴' 캐릭터는 막상 총선을 앞둔 지금에선 사라지고 없다는 점이다. 안 전 대법관은 이제 '청렴'이 아니라 '전관예우'의 대명사다. 삼권분립이란 큰 룰도, 당내 경선이란 작은 룰도 따르지 않으려는 언행을 예쁘게 봐줄 만한 이유는 사라졌다.
그럼에도 굳이 입법부의 말단 의원이 되고 싶다면, 안 전 대법관은 대체 왜 정치를 하려는 것인지에 대한 '큰 그림'이라도 제시했어야 했다. '이 지역이 나의 지역인 이유'는 뒤늦게 말을 만들어 갖다 붙이더라도, 대법관 출신인 자신이 '굳이' 신인 정치인이 되려는 이유는 지금이라도 설명해야 한다.
그럴 수 없다면 이런 우여곡절 헤프닝 끝 안 전 대법관의 출마는 '금배지'로 표상되는 정치 권력을 향한 욕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된다. 그리고, 그런 대권 주자는 이미 우리 정치에 충분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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