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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왜 '진정한 사과'를 못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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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일본은 왜 '진정한 사과'를 못하는 것일까?

[기고] 일본, 집단적 기억상실의 망탈리테

지난 12월 28일 일본외상은 한국외무장관과의 공동 기자회견 형식을 빌려 아베 총리의 이름으로 위안부 문제에 대해 사과했다. 그런데 누가 보더라도 진심어린 사과의 말투는 아니였다. 한마디로, 하긴 싫은 걸 억지로 하고 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도 그럴 것이 12·28 합의 이전 아베 정권의 행적을 볼 것 같으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향적 해결책을 먼저 제시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입을 악다문 듯이 보이는 일본외상의 굳은 표정은 누가 보더라도 20년 전 '무라야먀 담화'를 발표하던 당시, 무라야마 전 총리의 진심어린 표정과는 사뭇 대조되는 것이었다.

일본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진심어린 사과를 안하는 것일까, 아니면 못하는 것일까? 솔직히 말해서, 안하는 게 아니라 못하는 게 맞다고 봐야 한다. '안하는 것'과 '못하는 것' 사이에는 심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고 해야겠다. 무언가를 안하는 것은 사태의 옳고 그름을 떠나 자신의 의지에 따라 판단을 내리는 주체적 관점이다. 이런 경우, 상황 변화에 따라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정, 곧 반전을 가져올 수 있다. 이에 반해, 못하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한 어떤 외적, 구조적 이유로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심리를 반영한다.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24년 이상 끌어온 데는 어떤 역사적이고 구조적인 원인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한마디로, 이처럼 사과를 불용하는 데는 전후 일본의 국민의식, 곧 집단적 망탈리테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국민들은 독도가 일본영토인 것만큼이나 조선에 대한 식민지 지배 역시 합법적이라고 믿고 있다. 또한 침략전쟁을 일으킨 가해자라기보다 원자폭탄에 피폭당한 피해자라는 의식이 지배적이다. 냉전 50년 동안, 한편으로는 점령자였던 미국의 위세에 눌렸고, 다른 한편으로는 전후 고도성장 덕에 수면아래 가라앉아 있다가 냉전이 해체되고 근 20년 이상의 경제 불황을 겪는 과정에서 전전의 집단기억이 스멀스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된 것이다. 이 말은 전후 일본사회가 전전 과거청산에 실패했음을 방증한다. 그리고 이 논란 한 가운데 천황제가 자리 잡고 있다.

전후 일본의 집단적 기억망각 현상과 천황제

현행 일본 헌법 상 천황은 실권이 없는 상징적 존재이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황, 곧 텐노오는 여전히 헌법 제1조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의 헌법이 민주공화국을 헌법 제1조에 적시하고 있는 것과 비교했을 때 일본사회에서 천황의 지위는 상징적 존재 그 이상이라고 해야겠다. 일본의 전후가 새로운 출발선에 서 있음을 만방에 선포하려 했다면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에 가장 큰 책임이 있던 천황제를 스스로의 힘으로 폐지하는 게 마땅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일본인들은 천황제 유지에 대부분 찬성했다. 이후 일본에서는 천황제 폐지는 고사하고 비판적 논의조차도 금기시됐다. 심지어 공산당마저 천황제 폐지를 공공연히 입에 올리지 못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오에겐자부로가 전후 일본의 다양한 전문분야의 지식인들에게 공통의 언어를 제공해주었다고 극찬해 마지않은 마루야마 마사오가 제시한 '국체로서의 천황제'를 극복하는 길은 국가에 의한 정신적 권위와 정치권력의 일원적 점유를 해체하는 데 놓여있었다. 한마디로, 개인의 내면화에 개입하지 않는 제도로서, 형식성과 합법성에 의해 매개되는 법기구로서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루야마에게 일본제국주의에 마침표가 찍힌 8월15일은 초국가주의 전 체계의 기반인 국체로서의 천황제가 절대성을 상실하고 비로소 처음으로 자유로운 주체가 된 일본국민에게 그 운명을 넘겨준 날로 기억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의 가장 큰 문제는 일본국민이 8·15 이후 실제로 자유로운 주체가 되었는가를 제대로 묻지 않았다는 데 있다.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일본국민과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천황은 민주주의적 맥락에서 양립할 수 없다. 일본국민이 진정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났다고 한다면 일제의 억압적 지배와 침략전쟁에 대한 책임만큼은 천황에게 반드시 물었어야 했고, 천황제를 폐지했어야 했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했는가? 천황제와 민주주의 사이에 어정쩡한 봉합, 일본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조정'이 이루어졌다. 천황제는 폐지되지도 않았고 인민은 자유로운 주체로 태어나지도 못했다.

마루야마에게 1945년 8월15일이 전쟁을 끝내고 파시즘과 결별해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현재화시킬 수 있는 "희망"의 계기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면, 다케우치 요시미는 8.15를 '포츠담 혁명'으로 부르면서 민족의 힘으로 그 혁명의 힘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것과 인민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했다는 점을 들어 '민족의 굴욕'으로 받아들였다. 그는 8.15 시기에 민주공화제를 실현할 가능성이 전혀 없었는가에 대해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가능성이 있었는데도 가능성을 현실성으로 바꾸려는 노력을 게을리 했다면 우리 세대는 자손에게 남긴 무거운 짐에 대해 연대책임을 져야 한다고 자책한다. 이런 논리적 전제라면, 일본사회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응시하는 게 마땅했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일인지 다케우치는 천황제 폐지 문제를 뒤로 미룬 채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선택한다.

마루야마는 내셔널리즘과 데모크라시의 "행복한 결혼"을 전후 사회에서 꿈꾸며 19세기의 아시아주의를 침략과 전쟁의 사상으로부터 '구출'해 국민주의의 이름으로 불러냈다고 한다면, 다케우치는 중국이라는 저항의 역사를 일본 사회에 던짐으로써 '역사의 되치기'를 꿈꾸는 '방법으로서의 아시아'를 택했다. 19세기의 아시아주의를 마루야마는 국민주의로, 다케우치는 저항의 사상으로 불러낸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때 침략사상으로 근거했던 아시아주의가 해석만 달리한다면 국민주의와 '방법으로서의 아시아주의'라는 저항의 이론으로 하루아침에 돌변할 수 있단 말인가? 억압과 침략의 물적 토대, 그리고 무엇보다 전체주의적 전시 국민동원 체계의 정점에 있던 천황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로 말이다. 이것은 사태를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방법이 아니며, 또 다른 형태의 헤겔 정신승리라 하겠다.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의 정치적 토대가 그대로 살아있음에도 국체로서의 천황제와 침략적 아시아주의로서의 대동아공영권을 머리에서만 지운다고 해서 사태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천황제 민주주의의 기원: '근대초극론'

이 대목에서 우리는 전전의 기억이 전후의 기억으로 재생되었다는 가라타니 고진의 언급에 유의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도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55년에 말이다. 이 때 미국과 소련의 이원적 대립에 기초한 세계적 차원의 냉전구조가 확립되었고, 일본에서는 여기에 호응하듯 '55년체제'가 성립되었다. '55년체제'라는 전후 체제 속에서 전쟁 전의 세력이 모습을 바꿔 다시 살아났다. 만주괴뢰국의 수뇌로 일급전범이었던 아베 총리의 외조부 기시 노부스케가 수상이 된 일이 가장 상징적 예이지만, 사상과 문학의 영역에서도 전쟁 전의 것들이 모습을 바꿔 부활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지나자 사람들은 '전쟁 후'가 '전쟁 전'과 외양만 달리 한 채 하나로 연결된 채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여기서 일본 국민들의 전전 기억을 주조하는데 크게 영향을 미친 교토학파의 '근대초극론'이 논란의 중심에 섰다.

태평양 전쟁 전과 전쟁 당시 일본의 논단에서 '근대의 초극'에 관한 논의는 일제의 대외정책과 침략전쟁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추인하고 합리화하는 성격을 짙게 띠었는데, 논의의 핵심주제가 바로 '국체로서의 천황제'와 '대동아공영권'이다. 이 과정에서 교토 학파는 일본 천황의 태평양전쟁 '개전명령'을 완벽하게 설명하는 "훌륭한 도식"을 제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교토 학파는 '근대초극론'을 통해 이제 일본이 약속되기에 이른 세계의 지도민족으로 '세계에 제시해야 할 새로운 원리'라는 식의 설교를 늘어놓다.

교토 학파의 대표적 이론가인 고오야마 이와오에 따르면 2차 세계대전은 결코 근대내부의 전쟁이 아니다. 작금의 전쟁은 "근대 세계의 차원을 넘어서 근대와는 다른 시대를 꿈꾸는 전쟁"으로 "이러한 사실은 우리 일본이 주도하는 태평양전쟁에서는 지극히 명백한 사실로서 어떤 의문도 끼어들 여지가 없다." '근대를 초극'하는 생존공간으로서의 대동아공영권은 지리적·운명적 공동연대를 기초로 하여 새로운 도덕적 원리로 묶이는 특수한 세계이다. "이 특수한 세계는 여전히 다수 국가에 의해 성립되는 역사적 세계"지만 "지리적·역사적·경제적인 연대성이나 인종적·민족적·문화적인 친근성을 기초로 하여 긴밀한 정치적 통일성을 요구한다." 그리고 이러한 통일성의 정점에 '국체로서의 천황제'가 자리하고 있다.

국체로서의 천황제의 특징은 태양이 행성의 운행을 관장하듯 천황은 체계의 정점에 위치하여 인간계의 조화와 질서를 도모한다는 데 있다. 여기서 나온 천황제의 정치이론이 '팔굉일우'론이다. 팔굉일우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가 1940년 시정 방침 연설에서 "황국의 국시는 팔굉을 일우하는 국가정신에 근거한다"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는데, 속내는 일제의 목표는 팔굉, 곧 세계를 하나의 집으로 만드는 세계 정복에 있다는 뜻이었다.

천황제를 정당화하는 황국사관의 핵심으로서 '팔굉일우'론을 정립한 교토대학 철학교수 다나베 하지메는 말하기를, '팔굉일우'에서 천황의 위치는 단순히 민족의 지배자, 종족의 수장에 그치지 않는다. 일군만민 혹은 군민일체라는 말이 나타내 주듯이 개인은 국가의 통일성 속에서 자발적인 생명을 발휘하도록 불가분하게 직접 결합되어 있다. 여기서 국가의 이념을 체현하는 존재가 바로 천황이다. 천황을 중심으로 하고 그로부터의 다양한 거리에서 모든 백성들이 서로 돕고 저마다의 자리에서 천황과 국가를 위해 맡은바 직분을 다하는 유기체적 국가를 다나베는 하나의 동심원으로 표현했다.

'국체로서의 천황제'를 떠받치고 있는 '팔굉일우'론은 태평양 전쟁 과정에서 그 위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일본이 항복할 때까지 천황은 국수주의 및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심장이자 영혼이었다. 전장으로 향하는 모든 병사들의 주머니 속에는 1941년 전 장병에게 배포된 '전진훈'이 있었다. 그 첫 문장은 이러했다. "전장이란 천황의 명을 받은 황군에 임하며 그 본령을 드러내며 일단 공격하면 반드시 정복하며, 전투가 벌어지면 반드시 이김으로써 적이 경외감에 가득 차 폐하를 우러러 볼 정도로 황도를 밝히는 곳이다."

진주만 기습 4개월 전에 출판된 유명한 소책자 '신민의 도'는 천황은 태양신 아마테라스의 직계후손이며, 일본의 국체는 "신민이 사사로움을 버리고 천황에게 충성을 바침으로써 하늘과 땅과 일체인 제위를 보필하는 신정"에 다름 아니라는 식으로 터무니없는 유사종교적 주장을 반복했다. 전세가 기울기 시작하자 일본지도자들은 1억 총일본인이 '구슬처럼 산산조각 나는' 죽음, 문자 그대로 옥쇄를 각오해야 한다고 끊임없이 떠들어댔다. "위기가 닥치면 용감하게 국가에 헌신하라"는 게 학교에 다닐 때 매일 암송해서 누구나 외우고 있던 천황이 반포한 '교육칙어'의 한 줄이었다.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의 종전선언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신적 존재인 천황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른바 '옥음방송'으로 공식화됐다. 신민들에게 하사하는 형태를 띠는 '종전조서'의 시작은 이렇다.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을 깊이 생각해본 짐은 비상조치를 취함으로써 시국을 수습하려 하며, 이에 충량한 너희 신민에게 고한다." 그러면서 그 유명한 '42장경'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시운에 따라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으면서 만세를 위해 태평을 열고자 한다."

천황의 '종전조서'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천황제를 패전 이후에도 지속되어야할 국체보존의 요체로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름지기 거국일치하여 대대손손 이어갈 신국의 불멸을 굳게 믿고,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는 점을 유념하라. 장래의 건설에 총력을 기울이고 도의를 함양하며 지조를 굳건히 함으로써, 국체의 정화를 발양하고 세계의 진운에 뒤처지지 않도록 하라."

전쟁을 시작한 사람도 천황이었고 끝낸 사람도 천황이었다. 그렇다면 패전의 책임 또한 천황이 지는 게 당연했다. 1889년 제정된 <대일본제국헌법> 제1조에는 "대일본제국은 만세일계의 천황이 통치한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그런데 '팔굉일우'론에 따르면 천황 역시 체계의 일부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전범이 될 수 없었다. 더구나 천황은 황실과 황통이 영구히 하나의 계통으로 계속되는 만세일계에서 비롯되는 신의 자손이 아닌가? 따라서 굳이 죄를 따지려든다면 체계에 속한 일본인 모두가 전범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일본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승인된 적이 한 번도 없었고 국가권력은 자신의 형식적 타당성을 의식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고 단언한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두고 그런 것이 아닌가 싶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는데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상황, 곧 '억압의 이양'과 '책임전가와 회피'에서 비롯한 전후 일본사회의 집단적 기억상실의 망탈리테가 형성되었다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천황제가 폐지될 수 있었다고 한다면 이는 오직 일본 민중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패전 이후에도 천황제 폐지를 요구하는 혁명적 상황은 조성되지 않았다. 맥아더 사령부와 연합군 점령당국의 진짜 고민은 천황제를 폐지할 수도 없었을 뿐더러 폐지한다고 해서 일본인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천황과의 일체감을 제거할 수 없었다는데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맥아더 사령부가 선택한 천황의 인간선언은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긴 했지만 나름 효과적 전략이었다. 왜냐하면, 한편으로 천황에게 법적 인격성을 부여함으로써 천황에게 언제라도 전범으로 호출될 수 있다는 식의 압박을 가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만세일계의 신성을 천황에게서 소거함으로써 일본인들이 국체의 억압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는 심리적 기초를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보다 중요하게는 이후로는 침략전쟁이 천황의 이름으로 자행될 수 있는 가능성을 차단시켰다는 데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태평양전쟁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중일전쟁이 태평양전쟁으로 확대되면서 일본군은 급격하게 팽창했다. 일본군 총수는 중일전쟁이 발발한 1937년에 69만 명이던 것이 태평양 전쟁이 끝난1945년에는 720만으로 급증했다. 전쟁에서의 사망자 수 역시 전쟁이 끝났을 때 245만 명에 달하는, '국민총동원'에 기초한 문자 그대로의 '총력전'이었다. 전쟁 과정에서 일본군의 잔학상은 유례를 찾기 힘든 것이었다. 이를 알기위해서는 30만 이상의 민간인이 죽임을 당한 난징 대학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일제의 잔학상은 비단 전쟁시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1923년 간토 대지진 당시,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살해한 조선인학살 사건을 들 수 있다. 사건 당시,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죄의식을 없애기 위해 어린애들에게조차 학살에 가담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일본정부는 난징학살과 간토대지진학살 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는커녕 사건의 존재조차 인정하지 않을뿐더러 흔적마저 체계적으로 지우려하는데 열중하고 있다. 이러한 일본사회와 국민들의 일반적 조건하에서라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사과를 기대하는 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야겠다. 일본은 전전에서와 마찬가지로 전후에도 개인의 자율성과 정치적 평등성에 기반한 민주주의를 제대로 실시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이 집단적 기억상실의 망탈리테, 곧 사과를 안하는 게 아니라 하지 못하는 사과불용의 정신상황을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12·28 합의 너머

아베정권의 등장 이후 일본사회의 우경화는 더욱 가속화하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역사는 물론, 침략전쟁에 대한 기억마저 지우려는 시도가 도를 더해가고 있다. 중등학교 교과서에서 위안부 문제를 삭제하기로 한 결정이 대표적 예다. 일본국민을 한데로 응집하기 위한 정치적 기제로서 전전의 내셔널리즘이 다시 호출되는 있는 상황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번 12·28 합의에 응해준 아베정권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번 합의가 한·미·일 삼각동맹에 걸림돌이 되는 한·일간 역사문제를 제거하려는 데 주된 목적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베정권의 경우, 이 합의를 활용하여 평화헌법 9조를 개정함으로써 영토분쟁 등 역내 문제에 군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합법적 길을 열겠다는 의도로 읽힌다.

문제는 우리다. 12·28 합의로 조성된 새로운 정세는 이제 위안부 문제가 단순히 한·일 간의 역사문제로, 민족 대 민족의 문제로 한정되지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1889년 일본의 제국의회가 '천황주권론'을 새겨 넣은 흠정헌법을 제정했다면,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19년 3·1만세운동의 영향으로 민주공화정을 임시정부 헌장에 새겨 넣었다. 근대의 초입에서 두 나라의 선택이 이후 민주주의의 수용과 발전에 큰 차이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방법'으로서의 민주주의, 곧 이번 합의에 대한 민주주의적 성찰의 필요성을 제기하는 것은 단지 상황적 요구 때문만은 아니다. 최근 아베정권의 우경화 경향과 끝없는 책임회피는 단지 정권의 보수우익적 성격 때문만이 아니라 민주주의 혁명을 통해 전전 체제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집단적 기억상실의 망탈리테로부터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정부 대 정부의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신화 내지 환상으로부터 벗어났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제 12·28 합의 너머의 문제를 사고할 때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에 관한한 일제의 의해 자행된 '비인도적 전쟁범죄'라는 세계사적 보편성을 획득했다. 그래서 이제 보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것은 지난 24년간 지속돼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투쟁으로 여겨진다.

현재적 시점에선 이 투쟁에 대한 민주주의적 관점에서의 해석이 이웃나라 일본의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결정적 고리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투쟁을 기억하는 일은 동시에 위안부 문제를 끊임없이 환기시켜 나가는 일이기도 하다. 지난 24년간의 위안부할머니들의 투쟁은 일국적 관점에 가둬두기엔 너무 아까운, 민주주의와 보편적 인권을 향한 중대한 세계사적 의미를 띠고 있다. 이 투쟁을 기리는 일이야말로 위안부 문제를 기억에서 기억으로, 세대에서 세대로 전승케 함으로써 불멸의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는 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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