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자산'인 핵 폭격기 B-52가 한반도 상공을 유유히 날았다. 경기도 오산 기지 상공을 저공 비행으로 통과했다. 기자들은 약 30초 동안 B-52의 실물을 지켜 본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었던 것 같다. 이 곳이 어디인지. 그리고 바로 당신들이 살고 있는 그곳 하늘 저 높은 곳에 핵 폭격기가 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B-52는 오전 10시30분쯤 제주도에 나타나 부산, 대구, 그리고 강원도 동해를 찍고 기수를 돌려 오산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을 맞이했다.
거대한 양 날개를 펴고 하늘을 가르는 B-52의 위용은 그 곳에 탑재될 수 있는 핵무기의 끔찍한 살상력을 숭고미로 포장한다. 그리고 모든 언론이 탄성을 지른다. 아, 저 비행기의 잘 빠진 날개 곡선 좀 봐.
KBS 뉴스 꼭지 제목이다.
"美 전략폭격기 B52, 한반도 상공 출동"
"한반도에 나타난 B-52, 어떤 위력 가지고 있나"
"B-52는 길이 48미터, 무게 220톤으로 공대지 핵미사일과 지하시설 파괴용 벙커버스터 등을 탑재할 수 있고, 최대상승고도는 1만 6000 킬로미터(km), 최대항속거리 2만 킬로미터인 최신예 장거리 폭격기"라는 설명이 붙는다. 북한의 핵실험에 미국이 무력 시위로 대응했다는 정치적 해석까지 곁들인다.
<조선일보>, <동아일보>, <중앙일보>, 경제지, 종편을 비롯해 거의 대부분의 언론이 이를 대서특필한다.
"전략 폭격기 B-52 전격 출동, 대북 압박", "B-52 3~4대가 융단폭격하면 평양은 사라져" 특히 <조선일보>의 중간 '미다시(언론계 은어로 제목, 표제의 일본식 표현)'가 매끈하다. 잘 빠졌다.
이 신문은 B-52의 항공 사진 촬영을 담당한 두 명의 공군 상사 인터뷰도 실었다. "B-52 비행 공군 최초 항공 촬영 "연출 불가능해 곡예비행 수차례"라는 부제가 달렸다. 우람한 근육질의 '패션 모델' 촬영을 마치고 지상으로 귀환한 두 군인은 환하게 웃고 있다.
B-52의 재원은 전 국민이 다 알 것 같지만 그래도 몇 몇 중요한 부분을 소개해 본다. 최대 31톤(t)의 폭탄을 싣고 64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를 날아가 폭격한 후 복귀할 수 있다. 땅 깊숙이 파고들어 지하 동굴을 파괴하는 가공할 폭탄인 '벙커버스터'를 탑재할 수 있다. 재래식 폭탄 35발, 순항미사일 12발, 사거리 200킬로미터의 공대지 핵미사일, 사거리 2500∼3000킬로미터의 공중 발사 순항미사일도 탑재한다.
B-52가 핵무기를 어떻게 싣고 어떻게 떨어뜨리고, 그 핵무기가 떨어지면 몇 명이 죽는가 하는 부분까지도 잘 연상이 된다. 술술 읽힌다. 북한을 위협할 것이라는 해석, 분석도 덧붙이는 것은 기본이다. 보라, 이 엄청난 무기를, 당신들을 모조리 살상할 수 있을 만큼의 위력을 가진 인류 최악의 발명품을.
그렇다. 핵 폭격기가 한반도 위에 떠 있었다. 다른 사실을 다 차치하고, 우리는 핵 폭격기가 우리 영공을 자유자재로 다닐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우리는 알 수는 있지만, 느낄 수는 없는 일이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우리 말고 또 있다. 끔찍한 살상 무기 실험을 자행해 놓고 "우리 인민은 최강의 핵억제력을 갖춘 존엄높은 민족의 기개를 떨치게 되였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핵실험으로 "주체조선은 무궁번영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 그리고 그에 동조하는 '인민'들이 저 위에 어딘가에 살고 있다.
새삼스럽지만, 핵을 대하는 두 문법이 닮아 있다고 한다면 '종북'으로 몰릴까.
우리 머리 위에 재래식 폭탄 35발, 순항미사일 12발, 사거리 200킬로미터 핵미사일, 사거리 2500∼3000 킬로미터 순항미사일, 그리고 1메가톤급(전략 핵무기의 기준100만 톤)으로 반경 7킬로미터 이내의 모든 사람을 즉시 사망시킬 수 있는 핵무기를 실을 수 있는 폭격기가 바람을 일으키며 지나갔다. 이쯤 되면 한반도 상공은 '판타지'의 세계다. 그걸 머리 위에 이고 사는 사람들이 바로 여러분들이다. 그 사실이 오히려 당신들에게 평안과, 위안을 선사해 준다.
슬픈 일이다.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허망한 존재인지, 다시금 깨닫게 해 주는 일이다.
어느 누구도 '핵 폭격기가 머리 위에 떠다녀서 무섭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 언어는 멸종된 것 같다. 반경 7킬로미터의 살상력 따위 '계량의 언어'들. 그 언어가 가리키는 곳에는 당연히 '적'이 있을 것이라고, 그 '적'은 우리와 같은 인간 따위가 아닐 것이라고 전제한다. 이 모든 과정은 당신의 의지와 상관 없이 이행된다.
2차 대전 당시, 10명의 적군을 죽인 지상군 병사와, 1만 명을 죽인 폭격기 조종사의 인식 사이 어딘가가, 한반도에 사는 모든 생명체의 인식의 좌표다.
B-52 폭격기가 당신 머리 위에 떠 있다는 사실에 '아' 하고 반응하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게 이 칼럼의 목적이다. 다른 것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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