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된 27일, 손 대표와 박 의원 역시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다. 손 대표는 낡은 회색 운동화를, 박 의원은 검은색 운동화를 신고 부지런히 종로바닥을 훝는 데 여념이 없었다.
손학규 "한달 동안 이명박이 한 게 뭐냐"
광장시장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손학규 대표의 목소리는 쉬어 있었다. 공식적인 선거운동에 돌입한지 한나절 만의 일이다. 보온병을 들고 따라다니는 보좌진들에게 물을 청하는 그의 손길은 유난히 바빠 보였다.
정치1번지에 나선 통합민주당 대표로서, 차기 대선을 노리는 정치인으로서, 여기서 밀리면 안 된다는 절박함이 묻어났다. 목소리 톤도 평소에 비해 경직돼 있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지 한 달 동안 한 게 뭐냐"며 포문을 연 손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에 대한 집중적인 십자포화를 퍼붓기 시작했다.
손 대표는 "강부자(강남 땅부자) 내각, 고소영(고대-소망교회-영남) 내각, 특권층을 위한 정부를 구성한 게 전부가 아니냐"며 "국민을 만만하게 보고, 서민을 우습게 보는 정부, 이명박 정부를 견제할 힘을 저 손학규와 통합민주당에게 달라"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나가는 시민들이나 시장상인들에게도 '손학규'라는 이름은 익숙한 듯 했다. "어머 손학규네"라면서 휴대전화 카메라를 들이대는 학생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경선 중도포기와 탈당으로 귀결되긴 했지만 한나라당에서 이명박-박근혜와 함께 '빅3'로 분류될 만큼 대중적인 정치인이었고, 민주당 대표를 맡고 있는 만큼 인지도 면에선 박진 의원을 압도하고 있다는 게 손 대표 측의 판단이다.
그래서인지 손 대표는 유세 현장에서 상대방인 박진 의원의 이름은 단 한 차례도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영어공교육 강화방안, 조각파동, 대운하 논란 등 각종 악재로 이미지를 구겨 온 이명박 대통령은 유세 내내 도마에 올랐다.
손 대표 측 관계자는 "이쪽은 당 대표인데, 박 의원은 한 명의 국회의원이 아니냐"면서 "박진 의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철저하게 이명박 정부의 문제점을 파고든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손 대표는 "이명박 대통령을 견제해야 한다. 건전한 야당에게 힘을 달라"며 "첫째도 민생, 둘째도 민생, 셋째도 민생이라는 생각으로 오직 서민과 중소기업을 위해 뛰는 것이 민주당의 '민생 제일주의 경제'"라고 한 표를 호소했다.
시장 상인들과의 대면 접촉에도 신경을 쓰는 모습이었다. 종로구 안에서도 지역에 따라 빈부의 격차가 심한 점을 감안해 창신동, 숭인동, 이화동 등을 서민들의 주거지역을 중점적으로 파고들 계획이다. 종로에 상대적으로 호남출신 유권자의 비율이 높다는 점도 잇점으로 꼽는다.
그러나 '종로의 아들'을 내 세우며 3선에 도전한 박진 의원은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손 대표와의 지지율 격차를 두 자리 이상으로 벌리면서 선두에 나서 있어 상황이 녹록치는 않다.
충신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한 상인은 "나도 전라도가 고향이지만 지난 총선에서도 박진의 팬이었다"며 "그래도 경제는 한나라당이 잘 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박진 "이명박 한나라당에 힘을 모아 달라"
박진 의원도 손 대표와 마찬가지로 상대방 대신 '이명박'이라는 이름 석자를 중점적으로 호명하는 전략으로 방향을 잡았다.
일부 한나라당 후보들이 정부출범 초기부터 불거진 각종 부정적인 이미지들을 털어내기 위해 알음알음 'MB 지우기' 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과 달리 박진 의원은 '정면돌파'를 선택한 듯 보였다.
숭인동 아파트촌 앞에서 유세에 나선 박 의원은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한 달 동안 잘못도, 시행착오도, 미숙한 일도, 공천잡음으로 인한 우려도 있었다"며 "그러나 이는 새로운 정치, 깨끗한 정치를 위한 진통이었음을 알아 달라"고 말했다.
박 의원은 "조금 실수가 있었더라도 10년 만의 정권교체가 아니냐"며 "경제를 살리고 일자리를 만들수 있도록, 한나라당과 이명박 대통령에게 강력한 힘을 몰아 달라"고 지지를 호소했다.
박 의원 측 관계자는 "지금 청와대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은 게 사실인데 부담스럽지 않느냐"는 질문에 "실수는 실수대로 인정하더라도, 물러서지 않고 정면에서 이명박 정부에 힘을 실어 달라는 점을 호소할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네거티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지난 대선에서도 한나라당의 선거전략이 아니었느냐"며 "우리가 먼저 손학규 대표에 대해 언급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박 의원은 이날 종로지역 곳곳을 누비며 소화한 유세일정 내내 '손학규'라는 이름을 단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다.
대신 박진 의원은 "대한민국 선진화와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명박 정부뿐"이라면서 "대통령이 추진하는 경제살리기가 힘을 받기 위해선 여당인 한나라당이 반드시 안정적인 과반의석을 확보해야 한다"고 유권자들의 표심을 자극했다.
지난 대선기간 내내 한나라당이 '이명박 성공신화'의 상징으로 활용해 왔던 청계천 역시 선거운동 첫 날 빼놓을 수 없는 방문지이었다. 이 대통령 역시 지난 해 공식적인 선거운동을 청계천에서 시작한 바 있다.
'한나라당의 얼굴' 나경원 전 대변인과 함께 청계천을 찾은 박진 의원은 '국민 성공시대', '이명박'을 외치며 지지를 호소했다. 박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여당에 압도적인 의석을 몰아줘야 정부가 성공할 수 있다"며 "서울 중심부에서 태풍 일으킬 것"이라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도 박 의원은 "지명도나 명성으로 국회의원 하는 시대는 지났다"며 "국민 성공 시대가 아니냐, 국민을 위한 일꾼이 누군가"라면서 인지도 면에서 앞서 있는 손 대표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지난 대선 기간 한나라당을 지원했던 황영조, 유남규, 최윤희, 김수녕 등 전 국가대표 운동선수들이 유세현장에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박 의원은 이 대통령의 사저가 종로구에 위치해 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가회동 사람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들어주신 종로구민 여러분께서 이번에는 명륜동 사람 박진을 다시 종로의 일꾼으로 만들어 달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일단 지지율 면에선 앞서고 있지만 그렇다고 방심하지는 않는다는 게 박진 의원 측의 설명. 한 관계자는 "필승을 장담하고는 있지만 넉넉하게 이긴다고까지는 말할 수 없다"면서 "아무래도 (상대방은) 당 대표니까…"라고 상대방에 대한 부담감도 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현역 지역구 의원에 여당 프리미엄까지 더해진 박진 의원의 자신감은 만만치 않아 보였다.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도 함께 평가받겠다"는 자세는 이런 자신감 속에서 나온 듯 했다. 유세 현장에서도 목청을 돋우는 대신 차분하고 평온한 말투로 지지를 호소하는가 하면 운동원들과 함께 가벼운 율동을 곁들이는 여유도 보여 줬다. 나경원 전 대변인과 함께 찾은 청계천에서는 운동권, 지지자들과 함께 한 강강수월래가 벌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경제대통령'을 내세우고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의 전략을 '박진化'하는 것으로 방향을 잡은 만큼 정부출범 직후 꿈틀대고 있는 바닥민심은 그로서도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출범 초기임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에 대한 국정운영 지지율은 이미 반토막난 상황. 반갑게 내민 박진 의원의 손을 덤덤한 표정으로 잡아 주고 돌아선 한 시장상인은 이렇게 말했다.
"경제란 게 별거 아니여, 시장 앞에 차 많이 서고 사람들 많이 들어오면 되는 거여. 그래야 우리같은 사람들 먹고 사는 거 아니여? 이명박이 서울시장 한다고 시장통 돌아다닐 때 내가 그 야그를 그렇게 했어도 달라지는 건 별로 없던디…박진이라고 다를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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