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수소 폭탄 실험이라는 매머드급 사건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2월 28일 한일 외교 장관 회담에서 타결된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합의를 둘러싼 논란이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 또한 수소 폭탄급의 파급력을 가진 중요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양국 관계의 발전을 위해 합의했다는 내용이 오히려 향후 양국 관계는 물론 국내 정치에서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킬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정부는 "가능한 범위에서 충분한 진전을 이뤘다는 판단으로 합의"를 했다며 불가피성을 주장하고 있지만, 위안부 피해자는 물론이고 전문가 및 일반 시민들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여기에는 피해 당사자인 할머니들과 사전 논의가 없었다는 점, 일본 대사관 앞 소녀상 철거를 전제로 합의가 이뤄졌다는 의혹, 위헌 논란 등 다양한 이유가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동북아 지역의 국제 관계라는 시각에서 이번 위안부 합의를 살펴보면 어떤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
족쇄가 될 "최종적", "불가역적"
국제 정치학 영역에서 논의되고 있는 수용 가능한 사과(사죄)란, △사건에 대한 진상 규명(clarification)과 그에 대한 후회(remorse) △책임 인정과 함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mortification) △그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수정 행위(rectification) 그리고 △피해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충분한 배·보상(reparation, compensation)을 포함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번 한일 위안부 합의는 매우 불충분한 사과 행위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번 합의에서 양국 정부는 "군의 관여"와 "일본 정부의 책임 통감"으로 접점을 찾으려 했지만, 이는 사실상 식민 통치 시절의 구 일본군에게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전가하고 일본 정부는 이에 대해 도의적 책임만을 질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결국 일본 정부의 법적 책임을 면하게 하여, 일본 정부로 하여금 법적 배상과 진상 규명 및 역사 교육, 추모 사업, 책임자 처벌과 같은 후속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면죄부를 준 셈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충격적인 것은 일본군 위안부 문제가 이번 합의로 "최종적 및 불가역(不可逆)적으로 해결"됐다는 내용이다. 물론 여기에는 "일본 정부가 표명한 조치가 착실히 이행된다는 전제"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전제의 성립 여부를 둘러싸고 양국이 다른 해석을 내놓을 가능성이 있는 만큼 "최종적", "불가역적"이라는 표현이 양국 사이의 또 다른 불씨가 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
특히, 1965년 체결한 한일 협정(한일 청구권 및 경제 협력 협정) 제2조 1항에서 동 협정을 통해 한일 간의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또 최종적으로 해결될 것을 확인함"이라는 문구가 들어감으로써, 이것이 한국 측에 족쇄가 되어 왔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암담하다.
왜냐하면 일본 정부는 이 문구를 근거로 한일 사이에는 더 이상의 청구권 문제가 없다고 주장해 왔으며, 이것이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일본의 책임 회피에 구실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번 합의를 근거로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요구대로 별도의 합의를 했으니 향후 위안부 문제에 대한 어떠한 새로운 증거가 나오더라도 이미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됐다고 주장할 것이 뻔하다.
이미 일본 언론은 "최종적 및 불가역적으로 해결"이라는 문구를 끊임없이 강조하며 향후 한국의 태도를 지켜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한국이 또다시 위안부 문제를 제기할 경우 신용할 수 없는 국가로서 국제 사회의 일원이 될 자격이 없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한일 위안부 합의와 북-일 납치 문제의 공통점
더 심각한 것은 이번 합의를 계기로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한국과 일본의 입장이 뒤바뀔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또 다시 양국 사이에 마찰이 발생할 경우, 한국은 위안부 문제의 피해 국가에서 합의를 파기한 문제 국가로 전락하고, 반대로 일본은 역사의 가해자에서 약속 파기에 따른 피해자로 입장이 180도 뒤바뀔 수 있다. 이러한 걱정이 기우(杞憂)가 아니라는 것은 북한과 일본 사이의 일본인 납치 문제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이 전후 처리를 완전히 해결했다고 선포하지 못하는 데에는 두 가지 과제가 남아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러시아와의 북방 4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과 과거사를 청산하고 국교 정상화를 맺는 것이다. 특히 러시아와는 달리 북한과는 국교 수립조차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북일 간의 국교 정상화에 가장 큰 걸림돌 중의 하나가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이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란, 일본에서 1970년대부터 1980년대에 걸쳐 다수의 일본인이 행방불명되는 의심스러운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러한 행방불명 사건의 다수가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일본은 줄곧 의혹을 제기해 왔고 북한은 이에 대한 관련성을 부정했기에 이것이 양국의 국교 정상화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다가 2002년 북일 정상 회담에서 북한은 국교 정상화의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해 납치 사실을 전격적으로 시인하고 말았는데, 이것이 북일 관계의 진전은커녕 도리어 양국 관계의 발목을 잡는 역효과를 내고 말았다. 무고한 일본인을 납치한 북한에 대한 일본 국민의 분노가 양국의 국교 정상화를 더욱 어렵게 만든 것이다.
그런데 이 납치 사건 인정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이를 계기로 북한은 역사의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일본은 역사의 가해자에서 피해자로 입장이 뒤바뀌었기 때문이다. 즉, 북일 관계에 있어서 줄곧 북한은 일본으로부터 식민지 지배에 대해 배상을 받아야 할 피해자였고 일본은 배상을 해야 할 가해자였지만, 이제 북한은 납치 문제의 가해자, 일본은 납치 문제의 피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일본은 지금도 북한에 대해 납치 문제의 해결 없이는 역사 청산을 비롯한 국교 정상화는 없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주객전도가 이번 위안부 합의를 통해 한일 관계에도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다. 그리고 한 가지 더욱 놀라운 것은 일본인 납치 문제와 관련한 북일 교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인물인 바로 얼마 전 위안부 합의를 이끌어 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라는 점이다. 아베 총리는 2002년 당시 관방부장관으로서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평양을 방문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바 있다.
합의 이면에 존재하는 미-중 경쟁
좀 더 시야를 넓혀 보면, 이번 위안부 문제 합의는 중국의 부상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한 해를 며칠 남기지 않은 12월 28일 합의가 급박하게 도출된 것이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의 해를 넘기지 않기 위해서라는 것은 사실 핑계에 불과하다. 한일 간의 합의를 더욱 독촉했던 것은 미국의 압박이었고, 이러한 압박에 따른 졸속 합의를 '국교 정상화 50주년'이라는 포장지로 잘 꾸며보려 했을 것이라는 해석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미국은 중국의 부상을 견제하기 위해 한-미-일 공조 체제를 강화해야 하는데, 한국과 일본이 역사 문제로 좀처럼 관계 개선의 기미를 보이지 않자 양국에 합의 도출을 독촉(?)했을 개연성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존 케리 국무장관과 수전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합의 발표 당일 "한국과 일본 양국 정부가 민감한 과거사 이슈인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합의를 도출한 것을 환영한다"고 했고, 대니얼 크라이튼브링크 백악관 아시아 담당 선임보좌관은 12월 16일, 국내의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한-미-일 협력은 매우 중요하다"면서 "이것이 우리가 한국과 일본이 서로 유연성과 용기를 발휘해 과거사 해결을 위한 전향적 접근을 하도록 독려하는 이유"라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1965년 한일 협정이 국내의 격렬한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강행된 배경에는 동북아 지역의 대표적 공산국가인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독촉이 작용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이번 합의에 미국의 힘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해석에 더더욱 힘을 실어 준다.
여러모로 이번 한일 위안부 문제 합의는 반갑지 않은 역사의 반복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부상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려는 미국의 전략이 위안부 문제에까지 영향을 미쳐,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 맺힌 가슴속에 또다시 상처를 입히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마저 돋는다.
(허재철 교수는 원광대학교 한중관계연구원 정치외교연구소 연구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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