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르르 쾅쾅. 천둥이 치고 비가 내린다. 눈이 번쩍 뜨인다. 벼락은 맞지 않을까. 비 때문에 미끄러울 텐데…. 뙤약볕. 오늘도 덥겠구나. 물도 못 올리게 한다는데…. 어떻게 견디지. 목구멍이 타들어 간다. 가을 바람이 겨울 못지않다. 아직 침낭도 없는데 차가운 강판에 찬기를 온전히 느끼고 잠은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잠을 자기가 미안하다. 그렇게 세 계절을 보내고 벌써 겨울이다.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 한규협이 "사내하청 정규직화, 정몽구가 책임져라"는 현수막을 들고 서울 시청 앞 옛 전 국가인권위 건물에 올라간 후, 서울에 사는 나는 날씨에 더 민감해졌다. 지척에서 활동하고 있으니…. 그렇게 나도 같이 잠을 깨고 잠을 못 자고 하늘을 쳐다보며 계절을 보낸 지 벌써 200일이 다 됐다.
내가 더 민감해진 것은 고공농성에 대한 나의 거리감이 좁아졌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문기주가 송전탑에 오른 후 그의 어깨와 팔이 송전탑에 흐르던 전류 탓에 더 저리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다. 구조조정과 부당 해고에 맞서다 서울신문사 광고판에 올랐던 비정규직 통신노동자 씨엔앰 강성덕이 아직도 어지러워 약에 기대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부터다. 고공농성은 끝났지만 여전히 고공농성의 흔적은 그들의 몸과 마음을 후벼 파고 있음을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난 그들이 우리 때문에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거리감은 죽음의 빛깔과 닮았으니까. 재작년 서울 양재동 현대 본사 앞 거리 바닥에 있던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김수억의 어두웠던 낯빛이 잊히지 않는다. 동료를 잃은 그는 말을 잃고 죽음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그때는 현대차 울산 촉탁계약직 노동자의 자살과 기아차 광주공장 사내하청 노동자의 분신으로 현대차,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상경 투쟁을 하고 있던 때이다.
사실 노동자들을 노예 취급도 하지 않는 세상에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삶은 언제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아니, 항상 목숨을 걸고 싸운다. 그깟 해고가 별거냐, 그깟 비정규직이 별거라고, 목숨까지 내놓고 싸우느냐고 할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싸우고 목 놓아 소리치지 않으면 법원의 판결마저 무시하는 자본의 세상에서 '노동자도 인간'임을 증명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지 않은가. 그러니 정도껏 싸우지, 목숨까지 내놓느냐고 하지 마라. 매일 싸우고 있지만 십 년을 넘게 싸우고 있지만 끄떡도 않는 기업들.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세상이지 않은가. 작년 겨울 오체투지를 하던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자 오석순이 고공농성 중인 씨엔엠 노동자들을 보더니 울음을 터트리며 하던 말이 생생하다.
"사람들이 우리더러 왜 극한투쟁을 하냐고 말해요. 왜 높은데 올라가고 굶고 그러냐고. 그런데요,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몰라요, 우리는 매일매일 싸우고 있지만 사람들은 우리가 싸우고 있다는 걸 몰라요. 모른다고요."
그래서 나는 한규협이 고혈압이라서 추위를 조심해야 하는데도 200일 가까이 버티고 있는 이유를 얼핏 알게 됐다. 이 땅에서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숨 쉬고 사는 법이 이것밖에 없다는 것을 노동자들이자 동료인 시민들이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들이 올라간 지 200일이 되는 날 따뜻한 땅의 온기를 전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또 다른 고공농성을 하는 풀무원 화물노동자 연제복, 유인종에게도 함께 응원의 박수를 보내줬으면 한다. '당신들은 혼자가 아니야', '당신들이 싸우고 있는 이유를 우리도 알고 있어', '그러니 힘내고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온몸으로 지지해', '그러니 외로워하지 마'라고.
12월 26일 전국의 노동자, 시민들이 희망버스를 타고 와 그들에게 땅의 온기를 전해줬으면 좋겠다.
그리고 직접 농성장에 가지는 못하지만 부산시청 앞 광고탑에 있는 생탁 막거리 노동자 송복남과 택시노동자 심정보에게도, 하이텍알씨디코리아 구로공장 옥상 철탑에서 있는 신애자, 구자현에게 이 마음을 전하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모욕적이었던 200일 고공농성
사실 최정명, 한규협은 그 어떤 고공농성보다도 모욕과 고통 속에서 싸웠다. 수시 때때로 물과 음식을 올려보내는 걸 막았다. 심지어 용역 깡패를 동원해 농성자들을 끌어내려고도 했다. 표면적으로는 명보 에듀넷이라는 광고업체가 막은 것이지만 현대자동차가 움직인 것이라는 걸 다 알지 않는가. 물과 음식이 또 끊겼던 늦가을 정몽구가 사는 한남동에 동료들이 1인 시위를 가자 물과 음식은 올리도록 하겠다고 기아차에서 왜 연락이 왔겠는가. 지금 현대자동차는 자신들의 계산대로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힘으로 사내하청 정규직화를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사내하청 정규직화 싸움은 막판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충 합의시키면 될 것이라고. 곧 사내하도급법으로 판세를 뒤집을 수 있다고. 그런데 갑자기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공농성을 한다. 그것도 서울 한복판에서. 얼마나 속이 뒤집히겠는가. 사력을 다해 모욕을 주고 농성을 종결시키려 했다.
지난해 9월 서울지방법원에서 기아차 사내하청 노동자들 모두가 불법파견이라고, 근로자 지위확인 소송의 결과는 말해준다. 2010년 대법원이 현대차 사내하청노동자 최병승이 불법파견이라고 했을 때도, 현대자동차는 최병승에게만 해당한다고 했다. 최병승만 정규직을 전환하면 된다고 했다. 지난해 집단소송에서 지법은 모든 공정의 파견이 불법파견이라고 했으니 모든 사내사청 노동자들을 정규직으로 해야 한다. 그런데 회사는 기아차 전체비정규직 4864명 중 465명만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했다. 10%도 안 된다. 그래서 6월 11일 두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는 하늘에 올라갔다.
최정명, 한규협의 고공농성은 2005년 현대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 2011년 현대자동차 울산 공장 사내하청노동자들의 26일 파업투쟁부터 최병승, 천의봉 고공농성, 현대차 서울 양재동 본사 상경투쟁을 잇는 싸움이다. 그래서 저들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노동자들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0년 싸움의 결과 법원마저 손을 들어줬는데도 현대차 정몽구는 이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 한규협이 동상 걸린 발을 두고도 내려오지 못하는 이유가 이것이다.
그런 그들이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더러운 자본의 세상에서 적어도 홀로 싸우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70m의 거리감을 60cm로 좁혔으면 좋겠다. 두 팔을 뻗으면 닿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세상의 추위를 같이 맞고 있다는 것을, 온 마음으로 같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러 12월 26일 모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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