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녘 스마트폰으로 사진 한 장이 날아왔습니다. 천지가 새하얀 눈으로 뒤덮인 멋진 풍광이었습니다. 어디서 보냈을까 가만히 살펴보았습니다. 옛 국가인권위원회 건물 옥상 전광판 꼭대기에서 보내온 사진이었습니다.
조금만 삐끗해서 눈길에 미끄러지면 그대로 건물 바닥으로 추락하는 곳.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하늘에서는 함박눈이 그칠 줄 모르고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늘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움직이지 마. 일어서지도 말고. 몸 단단히 묶고 있는 거지"
많은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서울의 첫눈, 학교 가는 길에 눈사람을 만들며 마냥 함박웃음을 짓는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리던 첫눈을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자 최정명, 한규협은 70미터 하늘 위에서 맞았습니다.
걱정하지 말라고, 괜찮다고 합니다. 북풍한설을 막아줄 얇은 천막 안에서 침낭 속에 침낭을 하나 더 넣고서도 하룻밤에 몇 번이고 깨고야 마는 새벽 한파를 견디고 나서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밝은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가슴이 저며 옵니다.
첫눈을 40미터 광고탑 위에서 맞이하고
기아자동차 화성공장을 떠나 서울광장 옆, 지금은 이사를 가버린 인권위 건물 옥상에 둥지를 튼 지 180일이 지났습니다. 지난 6월 11일 함께 일하던 공장의 후배들이 광고탑에 올랐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곧장 서울로 달려왔습니다. 서울광장 귀퉁이에 농성장을 차리고 후배들이 무사히 내려오기를 기다리며 보낸 시간이 반년이 되었습니다.
지난해 9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기아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468명이 기아차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소송'에서 소송을 낸 모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하고 밀린 월급을 주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런데 기아자동차 회사와 기아차 정규직 노조는 지난 5월 12일 특별교섭을 열어 비정규직 노동자 4864명 중에서 2015년 200명, 2016년 265명 등 465명을 정규직으로 특별채용하기로 합의했습니다.
법원에서는 사내하청 노동자 전원이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는데, 정규직 노사가 비정규직 전체 인원의 9.5%만 정규직으로 뽑아가겠다고 한 것입니다. 비정규직 당사자들이 강력히 반발했지만 정규직 노조는 합의를 강행했습니다.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의 극히 일부만을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는 합의를 눈 뜨고 지켜볼 수 없었습니다. 무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최정명, 한규협이 불법파견의 주범 현대기아차그룹 정몽구 회장이 해결하라는 요구를 내걸고 '하늘 살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비정규직 9.5%만 정규직으로 뽑아가겠다는 5·12 합의
이제는 서로 안부를 묻기도 겁이 나는 고공농성이 180일을 경과하고 있습니다. 수시로 불어오는 돌개바람에 몸조차 가누기 쉽지 않은 곳입니다. 경찰과 광고업계가 음식물 반입을 막아 끼니를 걸러야 했던 날이 38일입니다. 그런데도 후배들은 그저 괜찮다고 했습니다.
광고탑이 삼겹삽 불판처럼 달궈지던 뜨거웠던 여름이 지나고, 이제 선선해지는구나 했는데, 광고탑 위는 한겨울 얼음 빙판이 되어 이들의 생명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잠시라도 한눈을 팔면 그대로 미끄러져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곳에서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언론이 관심을 가져주길 바랐습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비정규직 노동자가 목숨을 걸고 고공농성을 하고 있는데, 무리한 요구도 아니고 그저 법을 지키라고 싸우고 있는데, 관심을 가지는 언론은 거의 없었습니다. 현대기아차 광고를 받지 않으면 유지될 수 없는 언론사들, 방송의 화면과 신문의 지면에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소식을 듣는 일은 극히 드물었습니다.
정치권이 무엇이라도 해주길 바랐습니다. 2010년 7월 22일 대법원은 현대자동차가 정규직이 일해야 할 자리를 불법으로 비정규직 사내하청을 사용해 불법파견 범죄를 저질렀다고 판결했습니다. 현대기아차 정몽구 회장이 파견법을 위반한 범죄자라는 사실이 6년 동안 계속 확인됐는데, 국정감사는 정몽구 이름 세 글자를 언급조차 하지 못하고 끝나고 말았습니다.
인권을 거래한 반인권위와 공권력을 욕보인 부패한 경찰, 쉼 없이 농성자들을 물어뜯는 광고사, 정몽구의 불법을 눈감아주고 비호하는 검찰과 노동부…. 이 모든 부패하고 무기력한 공공의 힘과 권력들이 자본의 편에 서서 기아차 고공 농성자들을 고립시키고 와해시키려고 했지만, 굴복시키거나 쓰러뜨리지 못했습니다.
언론과 정치권과 권력의 추악한 민낯
불의가 정의를 이길 수 없다는 믿음 하나로 긴 시간을 버텨왔습니다. 하늘로 올라가는 밥줄을 잘라버렸을 때 한걸음에 달려와 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견뎌왔습니다. 거대한 칼이 하늘로 올라와 정몽구 이름이 적힌 현수막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발 벗고 달려와 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오는 12월 27일은 최정명 한규협의 '하늘 살이' 200일입니다. 25일 성탄절부터 3일 동안 이어지는 황금연휴입니다. 공장에서 지친 노동을 잠시 쉬고, 모처럼 가족들과 여행이라도 떠날 수 있는 소중한 연휴입니다. 아이들에게 산타할아버지가 놓고 갔다며 작은 선물을 건네며 모처럼 온 가족이 둘러앉아 맛있는 저녁을 함께 먹는 시간입니다.
누구나 행복해야 할 시간에, 최정명 한규협은 불법을 바로잡으라고 광고탑 위에서 성탄절을 맞이합니다. 이들이 외롭게 싸우지 않도록 작은 발걸음을 함께 하고자 합니다. 정몽구가 틀렸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옳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합니다. 정의가 끝내 무릎 꿇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려고 합니다.
박근혜 정부는 파견법을 개악해 뿌리 산업에까지 파견을 확대하겠다고 합니다. 현대기아차 자본과 정몽구 회장에게 면죄부를 주겠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작은 발걸음이 정권의 음모를 막아내고, 우리들의 연대의 마음이 못된 재벌을 혼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고공농성 200일. 지옥 같은 '하늘 감옥'에서 이 겨울을 나게 해서는 안됩니다. 동지들을 내려오게 해야 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지상으로 내려와 어린아이들을 보듬어 안고 승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우리의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하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성탄절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12월 26일 하늘 살이 200일 고공 농성자들이 있는 곳으로 함께 해주실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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