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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밝힌다(明心)'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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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밝힌다(明心)'는 것

[탁오서당] <명등도고록> 상권 제6장

회림1)의 말이다.

"사람들은 모두 부처님께서 '마음을 밝히라'(明心)2)고 가르치셨다 말하는데, 공자님만큼 심성을 잘 밝혀낸 이가 없다는 걸 대체 누가 알까요! <대학> '정심장'(正心章)은 분명코 심성의 의미를 밝히는 내용입니다. 마음에는 본래 물상이 없습니다. 만약 분노 등의 감정이 맺힌다면 마음속에 뭔가가 들어있는 거지요. 사물이 마음속에 들었는데, 어떻게 다른 사물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이미 분노하는 바에 휘둘리고 있다면 분노가 내 마음속에 도사린 격이라,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이 찾아온들 또 어떻게 응대할 수 있겠는지요? 왜 그럴까요? 손님이 항상 내 거처에 죽치고 있다면, 주인에겐 한가한 겨를이 생겨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또 분노가 이미 자리를 잡았다면, 그것이 동쪽에 있을까요? 서쪽에 있을까요? 아니면 가운데일까요? 동쪽에 있다면 서쪽이 비니, 서쪽은 필시 바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서쪽에 있다면 동쪽에 결함이 생기므로 동쪽은 틀림없이 반듯해질 수 없겠지요. 가운데에 있다면 동과 서에 모두 틈이 생겨나 동서가 다 같이 바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 이로부터 유추하건대 물상이 소재한 곳이라면 어디든 그러하지 않음이 없으니, 누가 그 바른 위치를 확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분노 등의 감정에 휩쓸리면 누구든지 그 바른 상태를 얻지 못하게 되지요. 바로 마음은 태허(太虛)와 같아서 본래 어떤 물상도 없으니, 존재 자체는 인정될지라도 찾아내 증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다면 마음은 정녕 그 소재지가 없다고 해야 할까요? 만약 마음에 거처가 없다면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듣지 못하며 먹어도 맛을 모를 테니, 온갖 행위가 다 소용없는 짓거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만약 보았을 때 보이고 귀 기울이면 들리며 먹었을 때 맛이 느껴진다면 정신적 감응이 결핍되지 않은 것이죠. 상황이 이와 같은데 또 어떻게 마음은 깃드는 곳이 전혀 없다고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거처가 있다면 바르게 되질 못 해 사물에 감응할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 씀씀이가 사물에 쏠리면서 정신이 맥을 추지 못하니, 마음을 바로잡는 방도가 되지 못하는 거지요. 거처가 없다면 결국 그 주체가 없다는 말이니, 어떻게 사물에 반응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마음은 공허하여 작용이 없으므로, 역시 마음을 바르게 할 방도가 되지 못하겠지요. 거처가 있다면 실로 제대로 된 마음이 아니고, 거처가 없다 해도 역시 제대로 된 마음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이치를 확실히 알아야만 마음을 바로잡게 되지요. 그래서 '이를 두고 일컫기를 수신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달렸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어떻게 해야 바로 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끝내 말하질 않았는데, 왜냐하면 공부하는 사람들 스스로 그 이치를 깨달아 알길 바란 때문이지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대학>의 이 '정심장'은 바로 공부자의 명심도(明心圖)이다. 복희(伏羲)씨의 한 획은 천 획 만 획으로 자연스럽게 변환3)하며 끝이 없으니, 이를 상도4)라고 한다. 물상이 생겨난 다음에는 이미지가 만들어지지만, 내 마음의 처음 모습은 아니라고 하겠다. 불교에서는 "마음에는 본디 물상이 없다"(心本無物)고 인식하는데, 상도는 사물이 있은 연후에나 가능하기 때문에 태초에 물상이 없는 그 마음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위대한 우임금의 구주5)와 여기서 나온 천 종류 만 종류의 법은 저절로 널리 드러나면서 후세에까지 전해지게 되는데, 이는 숫자로 이뤄진 수도(數圖)이다. 그림이 있은 연후에 숫자가 생겨나니6), 내 마음으로부터 더한층 멀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자고이래 마음만큼은 그리기가 어려웠는데, 공부자 한 분만은 그것을 그려내실 수가 있었구나. 오호라! 누가 알았으랴, 그분이 <주역>과 '홍범'을 뛰어넘은 훨씬 높은 차원에서 과거의 성인들이 표현하지 못한 바를 펼쳐내실 줄 말이다!

▲ 광동의 소관(韶關)시 남화사(南華寺)에 모셔진 육조 혜능의 진신(眞身)상.

해설


이번 장도 지난번처럼 '수신'에 관한 내용인데, 불교의 관점에서 수신과 마음의 관계를 풀었다.


용담에서부터 산서성 대동까지 스승을 따라온 승려 회림이 먼저 마음의 작용에 관해 설명한다. 그는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을 밝히는 일'(明心)과 유학에서 강조하는 '정심'(正心)이 같은 개념이라고 단언하면서 그 근거로 주희의 <대학장구> 제7장 '정심장'을 든다.

"이른바 수신이 자기 마음을 바르게 하는데 달렸다 함은 다음과 같은 뜻이다. 내 몸에 분노가 있으면 마음을 바르게 할 수 없고, 두려움이 있어도 마음이 바로 될 수 없으며, 편애함이 있으면 마음이 반듯할 수 없고, 근심이 있어도 마음을 단정하게 할 수가 없다. 마음이 어지러우면 집중하지 못하니, 보아도 보이지 않고 들어도 들리지 않으며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한다. 이를 두고 수신은 그 마음을 바르게 함에 있다고 일컫는다."(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心不在焉, 視而不見, 聽而不聞, 食而不知其味. 此謂修身在正其心.)


뜻인즉슨, 수신의 핵심은 정심에 있다는 것인데, 정심은 또 마음을 집중시킴으로써 감정의 치우침에서 벗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래서 마음에 쏠림이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고 수련하라 요구한다. 그런데 이런 수행의 가르침은 원래 불교의 능사이고 수많은 선사들이 인증한 바인지라, 회림에게 정심은 곧 명심과 같은 개념으로 간주된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마음을 밝힐 수 있는가는 결코 간단치 않아서 역대로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은 매우 치열했다.

선종(禪宗)에서 '남돈북점'(南顿北漸)이라 일컬어지며 종파가 갈리게 된 계기 역시 수행의 방법론 때문이었다. 이와 관련해 육조 혜능(惠能, 혹은 慧能)과 신수(神秀) 사이에 얽힌 유명한 고사가 있다.

초조(初祖) 달마 대사가 중국에 들여온 선종은 오조(五祖) 홍인(弘忍)에 이르러 동산법문7)을 완성하며 성황을 이루었다. 홍인은 당시 수하에 오백 명이 넘는 제자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의발(衣鉢)을 전수할 후계자를 찾기 위한 방편으로 제자들에게 선(禪)의 의미를 드러낼 기자(畿子, 게자偈子 혹은 게송이라고 한다) 한 수씩을 짓게 하였다. 제자 중 으뜸이라고 인정받던 신수는 다음과 같이 읊었다.

"몸은 보리8)의 나무이고, 마음은 밝은 거울 받침대로다.
수시로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먼지와 티끌 묻지 않게 하리라."
(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莫使有塵埃.)


어려서부터 경사(經史)를 두루 공부해 박식했던 신수의 시는 자신의 입세(入世) 포부와 결부시켜 끊임없는 공부를 강조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들은 절의 불목하니 혜능이 아직 부족하다면서 아래 게송을 읊고 신수의 시 옆자리에 내걸게 하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역시 받침대가 없네.
부처의 성품은 언제나 청정하니, 어디에 먼지와 티끌이 있을까."
(菩提本無樹, 明鏡亦無臺. 佛性常淸淨, 何處有塵埃.)


점진적인 수행을 거치지 않고 단번에 최고의 경지를 간파했음을 인증한 혜능의 게송으로부터 남능북수(南能北秀)와 '남돈북점'이란 용어가 생겨난다. 그런데 삼장(三藏) 12부(部)로 운위되는 대·소승 경전을 정리하면 돈오(頓悟)와 점수(漸修)로 귀납된다고 한다.

선종은 원래부터 돈오를 표방했지만 이는 그리 쉽게 논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심전심(以心印心)으로 경전을 거치지 않고(不立文字) 드러난 가르침이 아닌 마음으로 전수해(敎外別傳) 곧바로 본질을 장악함(直指人心)으로써 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성불에 이른다(見性成佛)는 선종의 가르침은 일반인이 감당하기엔 매우 버거운 것이었다. 육조 혜능조차도 "나의 이 법문은 바로 가장 높은 상의 상 자질을 가진 사람을 인도하기 위한 것"(我此法门, 乃接引上上根人)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래서 고안된 점수(漸修)는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는 방법인데, 그 가장 대표적인 수행법이 다른 말로 염불선(念佛禪)인 동산법문(東山法門)이었다. 사조(四祖) 도신(道信)에서 기원해 오조(五祖) 홍인(弘忍) 때에 완성된 이 법문은 불립문자·교외별전을 종지로 삼지만 불경공부를 병행함으로써 보통사람이라도 노력하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가능하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신수는 이 동산법문을 충실하게 계승해 나중에 북종의 개창자가 되었다.

이에 반해 육조 혜능의 법문은 스승의 가르침이 아니라 부처가 보여준 묵언과 염화미소(拈華微笑)의 가르침, 즉 이심전심·불립문자·교외별전의 종법(宗法)을 곧장 파고들라는 것이었다. 경전을 탈피하여 견성성불하는 선종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라 요구했는데, 이는 오조가 수제자 신수를 제치고 육조에게 의발을 전수할 수밖에 없던 이유이기도 했다.

우리나라는 남종의 세가 강한 탓에 북종선에 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꾸준히 노력해 깨달음에 도달한다는 북종의 점오(漸悟)는 유가사상의 영향 아래 형성된 중국 불교의 한 축이다. 반면 오성에 입각한 순간적인 깨달음(頓悟)을 강조하는 남종은 도가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혜능의 제자 신회(神會)가 활대(滑臺)의 논쟁에서 신수 제자 숭원(崇遠)과 겨뤄 승리한 뒤 북종의 교세는 쇠락하게 되지만, 꾸준한 공부 수행으로 깨달음에 도달하라는 북종선의 취지가 성의정심을 거쳐 지어지선으로 통하는 <대학>의 가르침과 일치함을 확인하고 이에 동조한 지식인은 역대로 부지기수였다.

회림은 또 마음이 태허(太虛)와 같다고 말하는데, 이 역시 도가·유가의 관점을 빌었다. 태허는 북송대의 성리학자 장재(張載, 1020~77)가 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설명하기 위해 내세운 개념이었다. 본래는 <장자> '지북유'(知北遊)편에서 만물을 포함하는 거대한 공간인 천공(天空)을 뜻하는 말이었지만, 장재가 공간적 의미를 떠난 형이상의 본체로 인식하며 기(氣)가 흩어져 있는 우주 만물의 근원적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한 것이다. 기가 흩어진 상태는 허(虛), 근원적인 허의 상태는 태허인데, 이는 기가 흩어진 것일 뿐 완전히 없어진 상태는 아니기 때문에 허무(虛無) 또는 공무(空無)와는 다르다고도 설명했다. 그래서 회림은 마음속에서 온갖 감정과 생각이 고였다가 흩어지는 양상이 마치 태허 같다고 본다. 태허가 기의 이합집산을 반복하듯 마음 역시 온갖 기가 충만한 터전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러나 마음의 본질이 무엇이고 어떤 상태로 존재하는지 실제로 알 길은 없다. 그래서 이지는 마음에 물상이 맺히면 그다음에 이미지가 생겨나고 또 숫자가 되기도 하지만, 그것이 마음의 애초 모습은 아니라고 말한다. 노자가 <도덕경> 첫머리에서 "도를 말하면 그때부터 이미 그 도가 아니고, 이름 지으면 그때부터 원래 실상과는 달라진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고 설파한 것과도 같다. 그렇더라도 마음에 맺힌 바를 보여주고 해석하는 일은 인간이 오랫동안 행해온 바였다. <주역>의 괘를 묘사한 상도나 '홍범'편의 내용을 표현한 수도처럼, <대학>의 '정심장'이야말로 공자가 그려낸 '명심도'라 부르는 이지의 해설이 독특하다. 복잡하거나 모호한 개념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고인들이 일찍부터 마인드맵을 활용했다는 사실이 자못 흥미롭게 다가온다.

각주


1) 회림(懷林): 용담(龍潭)의 지불원(芝佛院) 승려들 중에서 이지가 가장 총애하던 제자. 이 책의 토론이 이뤄지던 당시도 이지를 따라와 심수(沁水)에서 그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이 쓰인 다음 해 만력 25년(1597)에 이지는 '곡! 회림'(哭懷林)이라는 4수의 시를 짓는다. 아마도 그 전해 가을이나 이 해 봄에 병들어 용담으로 돌아간 뒤 거기서 사망한 듯하다.

2) 명심(明心): 불교용어. 세속의 모든 잡념을 내버리고 잡념 때문에 잃어버린 본성을 깨닫는 것을 가리킨다.

3) 전설에서 삼황(三皇)의 하나인 복희씨가 팔괘(八卦)를 처음 고안해냈고, 이는 또 64괘로 발전하였다. 먼저

(陽爻)와
(陰爻)의 두 획을 그어 양의(兩儀)를 만들고 계속해서
(太陽),
(少陽),
(少陰),
(太陰)의 사상(四象)을 그린다. 이어 양효와 음효를 더해
(乾),
(坤),
(震) 등 팔괘를 만드는데, 다시 팔괘 둘을 겹치면
(乾),
(坤),
(離) 등의 64괘가 되어 변화하는 모든 일을 묘사하게 된다. 팔괘의 성립에 대해선 <주역> '계사전' 하편의 제2장에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옛날에 포희씨가 천하를 다스렸다. 하늘을 우러러 상을 관찰하고, 땅을 굽어보며 법을 관찰했다. 금수의 아름다움과 땅에서 자라는 식물들의 마땅함을 관찰하면서 가까이로는 자기 몸에서, 멀리는 만물에서 이치를 찾아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팔괘를 만들어 신명의 덕에 통하게 하고 만물과 같은 마음이 되게 하였다"(古者包犧氏之王天下也, 仰則觀象於天, 俯則觀法於地, 觀鳥獸之文, 與地之宜, 近取諸身, 遠取諸物, 於是始作八卦, 以通神明之德, 以類萬物之情.)


4) 상도(象圖): 팔괘와 64괘의 괘상(卦象) 및 384효의 효상(爻象)을 가리킨다. 괘상과 효상은 모두 이미지와 상징의미를 지닌 도형과 부호로 이뤄져 있기 때문에 '상도'라고 부른 것이다.

5) 구주(九疇): 하느님이 우임금에게 내렸다고 하는 나라를 다스리는 아홉 종류의 큰 법. <상서> '홍범'(洪範)편에서는 구주를 오행(五行)·오사(五事)·팔정(八政)·오기(五紀)·황극(皇極)·삼덕(三德)·계의(稽疑)·서징(庶徵)·오복(五福)과 육극(六極)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홍범' 전문은 다량의 숫자를 사용해 표기하는 까닭에 '숫자로 이루어진 그림'(數圖)이라고 부른 것이다.

6) <좌전> '희공'(僖公) 15년조에 "사물이 생겨난 연후 도상이 있게 되고, 그림이 그려진 다음에는 널리 퍼지며, 수량이 많아진 뒤에 숫자가 생겨났다"(物生而後有象, 象而後有滋, 滋而後有數)는 대목이 보인다.

7) 동산법문(東山法門): 오조 홍인이 가르친 수행법을 말한다. 당시 오조는 기주(蕲州) 황매현(黄梅縣)의 황매산에서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산이 현의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동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8) 보리(菩提): 범어인 Bodhi의 음역으로 깨달음 혹은 지혜를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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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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