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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부처님 내려오고, 그 머리에 연꽃 피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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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부처님 내려오고, 그 머리에 연꽃 피어나니…

1월 폐사지학교 <문경·괴산 폐사지들>

2016년 1월 폐사지학교(교장 이지누. 폐사지 전문가·전 <불교신문> 논설위원)의 열아홉 번 째 강의는 경상북도 문경 사불산 일대입니다. 사불산에는 대승사를 비롯하여 윤필암과 묘적암과 같은 암자들이 돋보입니다. 그중 윤필암에서는 사불전(四佛殿)을 따로 두었습니다.

▲윤필암 사불바위와 묘적암 Ⓒ이지누

그 전각에는 적멸보궁처럼 부처님을 모시지 않은 채 손가락 만하게 보이는 이 바위를 올려다보고 절을 합니다. 곧, 예배의 대상인 것이다. 그것은 신라 진평왕 때부터 그랬는데, 587년, 진평왕 9년 난데없이 하늘에서 돌기둥이 내려왔답니다. 그 큰 돌기둥의 사면에는 여래가 새겨져 있었으며, 붉은 비단 보자기에 싸여 있었습니다. 왕이 그 소문을 듣고 사불산으로 바위를 찾아갔더니 과연 사면에 여래가 새겨진 바위가 산정에 세워져 있었습니다. 왕은 기이한 모습을 보고 예경을 올린 후 절을 창건했으니 지금의 문경 대승사가 바로 그 사찰입니다. 그로부터 산 이름을 역덕산(亦德山) 혹은 사불산(四佛山)이라고 불렀으며, 고려 때에는 공덕산(功德山)이라고도 불렀다고 전합니다.

그런데 대승사를 창건한 진평왕은 몸소 주지를 모셨는데 <묘법연화경>을 잘 외는 스님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묘법연화경>을 지송(持誦)하던 주지 스님이 입적하자 다비를 치르고 묘를 썼는데 신기하게도 그 무덤에 연꽃이 피었다고 전해집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폐사지(廢寺址)는 본디 절이 있었지만 지금은 향화가 끊어지고 독경소리가 사라진 곳을 말합니다. 전각들은 허물어졌으며, 남아 있는 것이라곤 빈 터에 박힌 주춧돌과 석조유물이 대부분입니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은 불탔거나 삭아버렸으며, 쇠로 만든 것들은 불에 녹았거나 박물관으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폐사지는 천 년 전의 주춧돌을 차지하고 앉아 선정에 드는 독특한 경험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주춧돌 하나하나가 독락(獨樂)의 선방(禪房)이 되는 곳, 그 작은 선방에서 스스로를 꿰뚫어보게 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입니다. 아울러 폐사지 답사는 불교 인문학의 정수입니다. 미술사로 다다를 수 없고, 사상사로서 모두 헤아릴 수 없어 둘을 아울러야만 하는 곳입니다.

▲암자 이정표 Ⓒ이지누

이지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1월 답사지에 대해 들어봅니다.

대승사 못미처 갈림길에 자동차를 세우고 걷기 시작했다. 윤필암과 묘적암으로 향하는 길은 어쩌면 이리도 고요할 수 있는가. 세속의 번잡한 소리가 사라지고 오로지 적막하여 결이 고운 흰 무명을 펼쳐 놓은 것 같았다. 윤필암을 오른쪽으로 두고 묘적암 길로 들어서서 백 걸음이나 떼었을까, 아! 아직 햇살 비쳐들지 않은 바위에 부처님이 계셨다. 향 한 자루 사르고 윤필암 사불전 뒤의 3층석탑에 비쳐든 해를 바라보며 부처님을 등지고 앉았다.

그때부터였다. 정오가 되어 다시 일어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 말이다. 부처님에게 해가 비쳐들 때 사진 한 장 찍은 것 말고는 다섯 시간을 앉아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는 정적은 오체투지로 몸을 날려 뛰어들고 싶을 만큼 매혹적이었으며 들리는 소리라고는 오로지 새들의 지저귐뿐이었다. 딱따구리가 썩은 나무를 쪼는 소리는 마치 목탁소리와도 같았으며, 분주한 몸놀림으로 이 나무 저 가지로 날아다니며 재재거리는 박새들의 지저귐은 아직 어린 동자승들이 경을 외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아름다운지 내 눈길은 부처님을 향하기보다 그들을 쫒고 있었으니 들고 갔던 공부마저도 팽개치고 말았다. 선(禪)도 아니요, 관(觀)도 아니었던 그 시간, 그러나 허망치만은 않았다. 비록 눈길은 새들의 아름다운 몸짓을 쫒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부처님보다 더 크게 부모님들의 얼굴이 떠올랐으니까 말이다. 부처님 앞에 와서 그는 우러르지 않고 등지고 앉은 채 난데없이 부모님 생각에 젖어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것은 여말선초의 문인이었던 양촌(陽村) 권근(1352~1409)이 지은 <사불산 미륵암 중창기> 때문이었다. 그는 글에서 산 정상에 밑둥이 땅에 박히지 않은 바위가 하나 있는데 사면에 불상을 새겨 사불산이라 이르고, 그 중간에 법왕봉(法王峯)이 있는데, 남쪽 절벽에 자씨(慈氏)의 얼굴이 새겨 있으며 그 곁에 있는 조그마한 절이 미륵암이라고 했으니 그곳이 바로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곳이다. 비록 암자는 스러져 그 흔적조차 가뭇없지만 자씨란 곧 미륵보살을 뜻하는 것이니 지금 내가 등지고 앉은 부처님이 당시에는 미륵 부처님으로 섬김을 받았던 것이다.

기문에 따르면 미륵암은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폐허가 된 암자를 1385년 새로이 중창을 시작할 무렵에도 마애불의 모습은 완연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내가 이곳에서 부모님을 떠 올린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암자의 중창을 발원한 백진(白瑨)이라는 사람 때문이었다. 그는 경북 영해(寧海)에서 살았으나 1383년 봄, 왜구의 침탈을 견디지 못하고 피난을 떠났다고 한다. 어머니를 등에 업고 이산 저 고을을 떠돌다 이윽고 다다른 곳이 사불산 기슭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고행길을 견디지 못한 어머니는 병을 얻어 그만 이듬해에 숨을 거두고 말았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았을까.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 Ⓒ이지누
어느 날, 백진은 산에서 만난 스님에게 눈물로 하소연하기를 낮이나 밤이나 근심하며 부모를 위하여 정성을 다하고 마음을 다해 정결한 집을 마련하여 명복을 빌며 은덕을 갚고 싶다고 말을 꺼냈다. 그러자 스님은 “절을 새로 짓는 것은 국가에서 정한 금법이 있어 어렵고, 이 산에 신라 때 있었던 미륵암의 옛터가 오랫동안 묵어 있으니 새로 중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그러자 백진은 눈물을 거두고 쾌히 마음을 열고 서둘러 미륵암 옛 터에 가보았다. 골짜기가 맑고 깊숙한가 하면 경내의 지형이 시원스러우며, 자씨 불상이 완연할 뿐 아니라 옛터 또한 그대로 남아 있어 비로소 불사를 할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윽고 백진과 비구인 혜안(惠眼)·승부(勝孚) 스님이 힘을 합하고 사람을 모았는가 하면 일 하는 사람들이 굶지 않을까 하여 한쪽에서는 농사를 지어가며 중창불사를 일으켰는데 그 때가 1385년이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387년에 불사가 끝났는데 집이 모두 4채에 2중 서까래를 얹고 대청과 부엌도 마련해 아쉬움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단청을 하지 못해 마음에 걸렸으나 어느 떠돌이 스님이 단청하는 물감을 지니고 있어 그에게 부탁하여 단청까지 마치니 비로소 절집으로 모양이 갖추어졌다. 그 후, 지운(志雲) 스님의 도움으로 <묘법연화경> 1부와 <부모은중경> 3권을 인출하여 비치하고 이어 낙성식을 하며 경을 외우니 그 해는 1388년 정월이었다.

백진은 다음 해인 1389년에도 경을 외며 공을 들이고 난 다음 영해로 돌아갔던 모양이다. 그해 12월에 양촌이 영해로 귀양을 가서 백진을 만났는데 판사(判事)였던 그가 양촌을 맞아 기문을 부탁했으니 말이다. 양촌은 그의 효성에 감동하여 쾌히 기문을 써 주었으며 “아아! 세속의 어버이 섬기는 사람들은 구차히 초상 치르는 데만 힘쓸 뿐인데, 백공은 능히 예절을 다하고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겨, 왜구를 피하느라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와중에도, 절을 중창하고 경문을 인출하여 영구히 한없는 복을 도모하였으니, 윗사람에게 예절을 다하고 제사 때 정성을 다하는 효성이 남들보다 한층 더하다 하겠다”라며 끝을 맺었다.

아! 이 일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쏘냐. 백진의 말마따나 매양 고생하시며 낳아 기르신 은덕을 생각하면 하늘과 같아 보답할 길이 없는 것이 어버이 은혜 아니던가. 내가 말을 잃고 또 부처님을 바라보지도 못하고 하릴없이 새들의 몸짓만을 쫒으며 앉아 있었던 것은 백진의 마음에 비하면 나의 마음은 모래 한 알만큼도 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서 말 여덟 되의 응혈(凝血)을 흘리며 낳고, 여덟 섬 네 말의 혈유(血乳)를 먹이며 키운 어머니를 떠 올리면 정녕 부끄러워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던 것이다.

옛글에 허물을 알면 고친다고 했거늘 언제쯤이나 부모님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허물을 고칠 수 있을까. 아무리 “자기의 허물을 아는 것이 남의 착한 일을 듣는 것보다 나으므로, 오직 허물을 아는 것이 절실하지 못함을 걱정해야 하고, 허물을 고치는 것이 빠르지 못한 것은 걱정할 것 없다(知己之過 勝於聞人之善 故惟患知過之不切 不患改之之不敏)”고 하지만 이미 허물을 깨달은 지 오래이거늘 늘 이 모양이니 어찌 해야 옳단 말인가. 언제쯤이면 아버지를 왼쪽 어깨에, 또 어머니를 오른쪽 어깨에 업고서 수미산을 백 천 번 돌더라도 갚을 수 없다는 그 가없는 은혜의 한 자락만이라도 덮을 수 있을 지 난감하기만 한 것이다.

[문경시 대승사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

대승사 마애여래좌상은 유형문화재 제239호로 지정되었으며 대승사의 사내 암자인 윤필암과 묘적암 사이에 있다. 양촌 권근의 기문에 따르면 마애불이 있던 자리에 미륵암이 있었으며 미륵암 중창불사를 하던 1385년에 이미 마애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으니 그로 미루어 조성연대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마애거불(磨崖巨佛)은 고려시대에 중점적으로 조성되었으며 같은 문경 지방에서는 봉암사의 백운대 마애보살상(유형문화재 제12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미륵암의 존재와 더불어 마애불이 있었으니 미륵불로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며 마애불의 전체 높이는 6m에 이르고 아래 연화대좌의 너비는 3.7m에 달한다. 마애불을 처음 대하면서 놀라는 것은 머리에 뿔처럼 나 있는 연꽃이다. 이는 다른 마애불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독특한 양식이다. 그러나 앞에 말했듯 대승사가 창건 될 당시 <묘법연화경>을 독송하던 주지의 무덤에서 연꽃이 피었다고 하니 그것을 형상화한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머리 위에는 별석을 사용하여 천개(天蓋)를 만들어 비나 눈으로부터 상호가 상하는 것을 막기도 했는데 이와 같은 양식은 서울 구기동의 승가사 마애여래좌상(보물 제215호)에서도 찾을 수 있다. 법의는 통견이며 목의 삼도는 뚜렷하다. 광배는 상체 전부를 둘러싸고 있으며 세 겹의 두광 주위는 화염문이 표현되었으나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으니 눈여겨봐야 한다. 마애불에서 가까운 묘적암은 나옹 스님이 출가한 곳이다.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이지누
[괴산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보물 제 97호)]
어째서 부처님이 두 분이며 그들이 같이 계실까. 그 궁금증은 <묘법연화경> ‘견보탑품(見寶塔品)’에서 풀렸다, ‘견보탑품’의 시작은 이렇다.

그때 부처님 앞에 칠보탑(七寶塔)이 하나 있었으니, 높이는 5백 유순이요 너비는 250유순으로, 이 탑은 땅으로부터 솟아나 공중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은 가지가지 보물로 장식되어 있으며, 5천의 난간과 천만의 방이 있으며, 한량없이 많은 당번(幢幡)을 장엄하게 꾸미고, 보배 영락을 드리우고 보배 방울을 또 그 위에 수없이 달았으며, 그 사면에는 다마라발전단향(多摩羅跋栴檀香)을 피워 향기가 세계에 가득하고, 모든 번개(幡蓋)는 금·은·유리·차거·마노·진주·매괴 등 7보를 모아 이루니, 그 탑의 꼭대기는 사천왕궁에까지 이르렀다. 삼십삼천(三十三天)은 하늘의 만다라꽃을 비 내리듯 내리어 그 보배탑에 공양하고, 그밖에 하늘·용·야차·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등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천만억의 중생들은 온갖 꽃과 향과 영락과 번개와 기악들로 그 보배탑을 공양하며 공경하고 존중하며 찬탄하였다.

그 탑은 다보(多寶)여래의 탑이며, 그 안의 사자좌에 앉으신 분은 다보불(多寶佛)이었다. 그 다보탑이 그렇게 공중 떠 있는 까닭은 <묘법연화경>을 설하는 곳이 있으면, 그것을 듣기 위하여 그 앞에 나타나 증명하고, 거룩하다고 찬양하려는 것이다. 이윽고 석가모니불이 <묘법연화경>을 설하려 하자 다보불이 자신이 앉았던 자리의 반을 내 놓으시며 “석가모니불께서는 이 자리에 앉으소서”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불이 사자좌에 가부좌를 틀었다. 그로부터 허공에 두 분의 부처님이 함께 앉으셨고, 석가모니불이 신통력을 발휘하여 대중들까지도 허공을 끌어 올려 <묘법연화경>을 설하였다. 이와 같은 ‘견보탑품’부터 ‘촉루품(囑累品)’까지의 법회는 공중에서 이루어졌다. 그것을 허공회(虛空會)라고 하며,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은 이러한 허공회의 장면을 형상화한 것이다.

▲김용사 전경 Ⓒ이지누

2016년 1월 폐사지학교 제19강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1월 16일 토요일>

07:00 서울 출발(정시에 출발합니다.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폐사지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제19강 여는 모임
-문경 윤필암 입구 도착
-사불바위 도착
-윤필암 도착
-미륵암터 마애여래좌상 도착
-점심식사 겸 뒤풀이(문경)
-김용사(김룡사) 도착
-괴산 원풍리 마애이불병좌상
-서울 향발

▲폐사지학교 제19강 답사로 Ⓒ폐사지학교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보온 차림(가벼운 산행복/배낭/등산화), 방한모, 선글라스, 장갑, 스틱, 아이젠,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의(+접이식 우산), 따뜻한 여벌옷, 간식(초콜릿, 과일류 등),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1월 폐사지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왕복교통비, 2회 식사비 겸 뒤풀이, 강의비, 운영비 등 포함). 버스 좌석은 참가 접수순으로 지정해드립니다.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폐사지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pyesajischool 에도 많이 놀러 오시고 회원 가입도 해주세요. 폐사지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이지누 교장선생님은 <폐사지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전각은 무너지고 법등조차 꺼진 폐사지(廢寺址)는 쓸쓸하다. 그러나 쓸쓸함이 적요(寂寥)의 아름다움을 덮을 수 없다. 더러 푸른 기운 가시지 않은 새벽, 폐사지를 향해 걷곤 했다. 아직 바람조차 깨어나지 않은 시간, 고요한 골짜기의 계곡물은 미동도 없이 흘렀다. 홀로 말을 그친 채 걷다가 숨이라도 고르려 잠시 멈추면 적요의 무게가 엄습하듯 들이닥치곤 했다. 그때마다 아름다움에 몸을 떨었다. 엉겁결에 맞닥뜨린 그 순간마다 오히려 마음이 환하게 열려 황홀한 법열(法悅)을 느꼈기 때문이다.

비록 폐허일지언정 이른 새벽이면 뭇 새들의 지저귐이 독경소리를 대신하고, 철따라 피어나는 온갖 방초(芳草)와 들꽃들이 자연스레 헌화공양을 올리는 곳. 더러 거친 비바람이 부처가 앉았던 대좌에서 쉬었다 가기도 하고, 곤두박질치던 눈보라는 석탑 추녀 끝에 고드름으로 매달려 있기도 했다. 그곳에는 오직 자연의 섭리와 전설처럼 전해지는 선사(禪師)의 이야기, 그리고 말하지 못하는 석조유물 몇 밖에 남아 있지 않다. 그래서 또 아름답다. 텅 비어 있어 다른 무엇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화선지 같으니까 말이다.

꽃잎 한 장 떨어져 내리는 깊이가 끝이 없는 봄날, 주춧돌 위에 앉아 눈을 감으면 그곳이 곧 선방이다. 반드시 가부좌를 하지 않아도 좋다. 모든 것이 자유롭되 말을 그치고 눈을 감으면 그곳이 바로 열락(悅樂)의 선방(禪房)이다. 폐허로부터 받는 뜻밖의 힐링,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는 혜안을 얻는 길, 폐사지로 가는 길은 파수공행(把手共行)으로 더욱 즐거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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