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기억'을 기억하다 : "진실을 요구하는 일에는 '강단'이 필요하다"
<2> '기억'을 기억하다 : "현실이 이러니 우리가 할 말 없지요"
<3> '기억'을 기억하다 : "4.11 총선에서 10만3811표 얻었어요"
한 숟갈의 밥,
한 방울의 눈물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밥을 눈물에 말아 먹는다 한들.
원고 송부를 차일피일 미루다 더는 밀려날 구석이 없어서, 이제는 정말 써보겠다 마음을 다잡았다. 여전히 자신은 없다. 실은 지난 주말 안에 탈고하겠다고 끙끙 싸매고 앉아 있었다. 세월호 특조위, 세월호 특별법, 세월호 시행령안, 검색어를 바꿔가며 지독하게 시간을 물고 늘어졌지만 겨우겨우 몇 자 쓰다만 것이 다였다. 그 밤, 광화문 광장에서 농민 한 분이 물대포에 맞아 쓰러졌다. 캡사이신이 섞인 물거품이 광장을 뒤덮을 때 나는 마른 발을 비벼대며 백지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것이다. 하루를 살면 꼭 하루만큼의 죄가 불어나는 시간이 차마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제가 든 생각은 이걸 내가 못한다고 할 주제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못한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이 제안이 왜 저한테까지 왔나 알아보니 정말 선뜻 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나서지 못한) 그 사람들이 무책임해서가 아니라 사안 자체가 너무 무거우니까요. 이 일이 제게 온 이유가 있겠지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석태 위원장님을 만나러 갔죠."
세월호와 광화문을 양쪽에 두고 무력함에 신열을 앓을 때 번뜩 그의 말이 떠올랐다. 야당추천인사로 임명되어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 비상임위원으로 있는 김진 변호사였다. 그는 세월호 특조위 비상임위원직 제안이 들어왔을 때, 이 일 못 하겠다 말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가 주로 맡고 있는 노동문제도 산적해 있고 개인적으로 박사논문도 써야 하는 바쁜 시기였지만 세월호는 거절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월호 특조위가 꾸려질 때 부담감 때문에 다들 고사하는 분위기였는데, 유족분들이 이석태 위원장님께 유족대표를 부탁하시면서 막 우시더래요. 그때 이석태 위원장님이 드신 생각이, 대체 왜 이분들이 미안해하고 울어야 하지? 라는 거였대요. 특조위 활동을 하게 된 배경이 저랑 비슷한 거죠."
못한다고 할 주제도 아니라는 그의 말에 용기를 얻어 더듬더듬 지금의 글을 쓴다. 김진 변호사의 진심을 따라 쓰기로 했다. 무능을 탓하기 전에 아픔을 보고, 누구나 피하고 싶은 무게를 끌어안은 것, 매일매일 세월호를 본인의 눈앞으로, 사람들의 눈앞으로 불러 오는 것. 어렵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다. 세월호 참사는 애도만으로 끝나서는 안 되는 사건이기에 그렇다.
그러므로 이젠 비유로써 말하지 말자.
모든 것은 콘크리트처럼 구체적이고
모든 것은 콘크리트 벽이다.
비유가 아니라 주먹이며,
주먹의 바스라짐이 있을뿐,
김진 변호사도 알고 있었다. 특조위를 바라보는 날선 시선들이 많다는 것을 말이다. 600만 명의 서명으로 지난해 11월 7월 제정된 세월호 특별법과 12월에 꾸려진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는 국민들의 기대와 성원을 한 몸에 받으며 출발했다. 그러나 법이 제정 된지 일 년이 넘은 상황이고 특조위의 활동도 곧 일 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특조위의 권한을 대폭 축소한 시행령안과 올 7월까지 한 푼도 지급되지 않은 예산(그나마 뒤늦게 책정 된 예산은 특조위가 신청한 예산의 3분의 1수준이다), 주요 보직의 늦은 임명과 정부여당의 비협조, 특조위에 우호적이지 않은 주류 언론들, 세어보자면 손가락이 모자란 걸림돌을 넘어가며 지금까지 왔지만 여전히 넘어서야 할 것들이 많고 그 사이 국민들 사이에 쌓이고 있는 오해를 풀 길도 당장은 막막하다.
"이 법이 정말 피와 눈물로 만든 법인데 위원회가 1년 동안 너무 무력한 모습을 보이니까 유족들의 실망과 원망도 받고 있어요. 정말 면목이 없고 부끄러워요. 정부여당이 방해를 한다는 얘기도 많이 있는데, 그건 주어진 조건이니까 거기서 사실은 위원들이 많은 일을 했어야 했죠...지난 1년 동안 위원회를 쥐고 흔들었던 절차적이고 의무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연의 업무는 해야 하는 상황이에요."
그는 특조위가 갖고 있는 환경이 낯설고 익숙하지 않다고 했다. 세월호 참사 특조위는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유족추천, 야당추천 위원)과, 이들과는 달리 정부여당과 뜻을 같이하는 소수의 위원(여당추천 위원)이 함께 모여 있다. 모두 같은 의견을 갖고 있는 인사들이 모이거나 그 반대의 비율로 구성되었던 대개의 상황들과 사뭇 다른 것이다.
"다수의 위원들이 야당추천, 유족추천 인사들이다 보니 위원회 내부를 보면 저희가 다수인 것 같아 보이죠. 하지만 실제로는 예산도 안 줘, 직원도 못 뽑아, 자료도 안 보여줘, 이런 식이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예요. 다수인 당신들이 뭐하고 있느냐라는 질문을 많이 받지만 위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에는 무력한 상황들이 이어지고 있지요. 정말 황당한 상황이 있는데, 위원회에 진상규명국장이라는 자리가 있어요. 별정직 중에서는 제일 높은 직급이고 제일 중요한 직급인데 아직까지 청와대에서 인사검증을 안 해줘서 채용을 못했어요. 정부여당의 계산대로 따지자면 올 1월 1일부터 위원들의 임기가 시작됐기 때문에 12월 31일로 법적인 1차 활동기간이 끝나거든요, 그런데 아직까지도 제일 중요한 국장자리를 임명을 안 해줘요."
이런 상황에서 오는 12월 14일부터 16일에는 세월호 참사 특조위의 첫 번째 청문회가 예정되어 있다. 그가 처음 특조위 활동에 뛰어들었을 때, 해경청장, 사회지방청장까지는 책임을 묻겠다, 적어도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다가설 것이라는 낙관이 있었다고 했다. '멍청한 낙관' 이었다고 그가 말했다. 정작 위원회에 들어와 보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앞을 가로막는 벽은 견고하고 그 뒤에 숨어 있는 거대한 진실을 찾아 들어가는 길이 쉽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죽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너를 위해
살아,
기다리는 것이다,
다만 무참히 꺾여지기 위하여.
세금도둑으로 몰리는 모욕과 활동제약 속에서도 김진 변호사는 늘 약속된 특조위 회의에 나가 싸우고,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 고개를 숙인다. 한심스럽다는 손가락질을 받아 내더라도 위원회를 지키고 위원회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진척 없는 특조위 활동을 그만두라는 주변 권유도 있었지만, 위원회에서 유가족들의 외로움을 만날수록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만 든단다.
특조위 활동을 하며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지난한 싸움도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얼굴에 날 생채기가 두렵고 수족의 안녕을 바랐다면 아마 이 자리에 그가 서있지 않았을 것이다. 과연 그가 바라는 날은 그의 몸이 꺾어지고 분질러져, 세월호가 품은 진실의 꽃병에 꽂아지는 날일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그는 바스러지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이나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김진 변호사 덕분이다. 그의 말이 아니었다면 난 진작 포기하고 도망갔을지도 모른다. 졸작의 원고는 여기서 끝나지만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여전히 진행 중이고 특조위의 역할도 계속 될 것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사건을 기억하며, 진실에 한 발짝이라도 가까이 다가가기 전까지는 끝내지 않겠다는 그에게, 마침표가 없는 시 한편을 응원과 신뢰의 마음을 대신해 전한다.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
내 몸을 분질러다오.
내 팔과 다리를 꺾어
네 꽃 병 에 꽃 아 다 오
덧) 김진 변호사와 인터뷰를 진행하고 며칠 후 진상규명국장이 1년 만에 내정되었다는 보도(한겨레, 11월 14일자)가 있었다. 원고에 인용된 시는 최승자의 <그리하여 어느날, 사랑이여>에서 부분 발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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