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꿈, '세상을 바꾸는 꿈'(☞바로 가기 : 바꿈)은 2015년 7월에 출범한 시민 단체입니다. 흩어져 있는 사회 진보 의제들을 모아 소통하고 공동의 지혜를 그러모으는 장을 만들어보려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바꿈이 기획한 '기억을 기억하다'는 많은 이가 외면하고 잊어가는 이 땅의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고 있는 얼굴들을 만나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누려는 기록 연재입니다. (필자)
창신동 전태일 재단을 찾아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다. 초행길이라면 재단 건물을 쉬이 지나칠 지도 모른다. 건물의 외관이 주변 봉제공장들과 허물없이 생긴 통에 그렇다. 전태일 재단 이사장인 이수호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골목을 더듬거리며 다니느라 진이 빠진 상태에서 건물 내부의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르려니 숨이 턱턱 막혔다. 계단을 밟아 오르며 선생이 지나온 자리를 하나씩 곱씹었다. 국어교사, 전교조위원장, 민주노총위원장, 민주노동당 최고위원. 내 딴에 어설프게 알아 봐둔 약력만으로도 이러했다. 선생이 머무르는 재단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나도 모르게 큰 숨을 고르게 된 것이 오직 계단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이수호 선생을 만나기 전 공부가 필요했다면 너무 부끄러운 고백일까. 하지만 사실이 그렇다. 선생이 교육운동,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투쟁하던 80년대는 내가 태어난 시대이기도 하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세월이기에 그의 삶을 어쭙잖게라도 아는 체 하려면 사전공부가 필요했다. 그러나 선생의 인생을 몇 줄 이력으로 알아보려는 무모함은 이수호 선생의 인자함 앞에서 백기를 들었다. 찾아 온 이들을 향한 애정 어린 그의 눈빛에 나는 그만 고백해버렸다. 선생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없다고 말이다. 나의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선생이 사람 좋게 웃으며 1948년, 경북 영덕에서의 출생부터 털어놨다.
영덕에서 태어나 대구 변두리에서 청소년기를 보내고 가난한 집안 살림을 생각해 대학 진학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의 권유로 야간학교를 가게 됐는데, 교직 이수가 가능한 국문학과였다. 실은 대학을 가게 된다면 꽃을 만지는 농대에 가고 싶었다며 선생이 멋쩍어 했다. 꽃을 만지고 싶었다는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그도 그럴 것이 교육, 노동계의 최전선에 서서 투쟁을 이끌던 그였다. 그러나 이내 원예도 그가 하면 참 어울렸겠단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 쓰는 위원장, 시 읽어주는 위원장이었다.
"노동조합에 상근하는 사람들이나 활동가들은 탄압을 이겨내고 민주화를 이뤄내기 위한 싸움, 투쟁을 주로 하기 때문에 항상 긴장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어요. 또 노동자들은 고된 노동을 이겨내는 우악스러움 같은 것들도 있죠. 그럴수록 정서적이고 따듯한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민주노총 위원장일 때 회의 시작 전에 짧은 시를 읽었어요. 거친 싸움을 하는 사람들이지만 마음 속엔 항상 따듯함을 간직하고 있거든요. 저는 그것을 살려내고 싶었어요."
노동 운동의 부드러운 결을 알아보고 밖으로 되살리려 했던 그의 안목이 새삼스럽지 않은 것은 꽃을 사랑하던 소년 이수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와 운동의 간극은 크다. 물렁함이 오히려 독이 되지는 않았을까, 부드러움이 도리어 해가 되는 건 아닐까.
"도종환 시인의 시 중에 <부드러운 직선> 이라는 말이 있어요. 직선이라는 것은 힘 있게 쭉 뻗어가는 것인데, 그것도 사실은 부드러울 때 더 힘이 있고 강해지고 그러면서 부러지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강하기만 하면 부러지잖아요. 부드러우면 유연하게 헤쳐 나갈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그런 태도가 굉장히 중요해요."
부드러운 직선, 도종환 시인에게서 탄생한 시어가 이수호 선생의 삶으로 살아지고 있는 듯 했다.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다 학교에서 해직당하고 반복되는 투옥을 경험했지만 물러섬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그만의 부드러운 기개로 부러지지 않고 지난한 시절을 이겨왔을 것이다.
"지금 현실을 보면 우리 세대가 좀 더 잘 했더라면 이런 사회는 안 물려줬을 텐데 하는 안타까움이 있어요. 제가 겪어 온 시절과는 개념이 조금 달라졌지만 청년실업과 빈곤문제는 상대적으로 훨씬 더 심하고 구체적인 문제로 남아있어요. 현실이 이러니 저희 같은 선배세대가 할 말이 없어요..."
그러나 선생의 단단함도 지금의 현실을 얘기할 때만큼은 급히 초라해졌다. 말끝을 흐리는 그의 얼굴에서 착잡함이 묻어났다. 이제는 젊은이들이 새로운 시각과 방식으로 자기들이 살아갈 시대에 맞는 정답을 써야 하는데 당신 세대가 발목을 잡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숨기지 않았다. 그렇기에 전태일 재단에도 젊은이들이 북적였으면 좋겠다했다. 전태일 정신을 박물로 남기지 않고 젊은 세대와 함께 살아 숨 쉬게 하려는 마음이 간절해 보였다. 마음만큼 젊은 세대와 더불어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역력했다.
"부끄럽기 그지없는데, 지금의 제가 아주 작은 만큼이라도(이 마음도 버려야 하는데) 청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니 젊은 세대들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나를 수단으로 삼으세요."
나는 자신이 보내온 세월을 한 없이 낮추는 선생의 초연함이 존경스러우면서도 서글펐다. 단지 우리가 청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선배 세대들의 통렬한 반성문을 받아 볼 자격이 있나 스스로 되물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청년은 답이 아니다. 건강한 시대를 만드는 합은 서로를 그러안는 세대 간의 포옹이 아니던가. 이수호 선생이 청년에게 거는 기대는 쭈뼛거리는 청년에게 그가 먼저 내밀어 준 손이다.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아낌없이 내밀었던 그의 손을 이번엔 나도 덥석 잡고 가능한 오래 함께 걷고 싶다.
"이제 우리 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뒤에서 밀어주는 일이겠지요. 제가 운동을 해오며 깨달은 것 중 하나는, 우리가 기울인 노력이 씨앗이라면 봄과 같은 조건만 되면 일시에 새파랗게 싹을 틔운다는 것입니다. 씨앗을 뿌리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런 과정의 총합으로 어느 날 자기도 모르게 젊은 그대들이 착 피어날 때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해요."
선생의 위로와 배웅을 받고 건물을 나와 걷다가 문득 돌아봤다. 창신동 골목길에 오롯이 자리한 전태일 재단. 그곳에 가면, 다시 시인의 말을 빌려, ‘한 생애를 곧게 산 나무의 직선이 모여 가장 부드러운 자태로 앉아 있는’ 이수호 선생을 만날 수 있다. 위로가 말장난처럼 번져가는 세상에서 온 몸으로 마음을 전하는 어른이 거기 있었다.
덧) 이수호 선생님은 1974년 울진군 제동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기 시작하여 1989년 전교조 결성에 앞장섰다가 해직이 될 때까지 서울 신일중고등학교에서 선생님으로 근무했습니다. 전교조 활동과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에 걸쳐 구속되어 2년의 투옥생활을 했고 전교조가 합법화 되면서 1998년 10년 만에 선린인터넷고등학교에 복직하여 2008년까지 33년을 교사로서 살았습니다. 그 동안 전교조 위원장,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 노동당 최고위원을 지냈고 지금은 전태일 재단 이사장을 비롯해 이주노동희망센터의 이사장, 한국갈등해결센터의 상임이사, 손해배상과 가압류로 고통 받는 노동자들을 돕는 손잡고의 공동 대표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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