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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줏집을 사랑한 독재자, 히틀러!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 ⑧]

"책은 고통을 주지만 맥주는 우리를 즐겁게 한다. 영원한 것은 맥주뿐!"

괴테의 시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불후의 명작을 쓴 대문호도 독서보다 맥주 마시기를 즐겼습니다. 16세기 벨기에의 풍속화가 피터르 브뤼헐(Pieter Bruegel)의 그림 속 농민들의 결혼식과 축제 장면에는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맥주를 마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와인이 귀족과 부자들의 술이었다면, 맥주는 왕부터 농노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의 사랑을 받은 '평등의 술'이었습니다.

맥주의 역사를 더듬으면 유럽 근·현대 민중의 삶을 이해하는 사회 경제사적인 의미가 보입니다. 나치 독일을 이끈 히틀러는 '독일 민족의 우수성은 건강한 아이에 달려있다'며 갓난아기를 둔 엄마에게 맥주 마실 것을 권했습니다. 혁명과 독재뿐 아니라 사랑과 예술의 뒤편에는 어김없이 맥주가 있습니다. 맥주를 이해하는 것은 유럽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맥주를 사랑했던 역사적인 인물들과 유럽 역사에 녹아있는 서민들의 맥주 이야기를 찾아가다 보면 여러분도 '악마보다 검고 사랑보다 쓴' 맥주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한국에 수제 맥주의 참맛을 소개한 하우스 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의 대표를 지낸 백경학 푸르메재단 이사가 유럽 역사 속 서민과 함께한 맥주의 재미난 이야기를 여러분께 들려드립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독자 여러분께 왜 중세 수도원을 통해 맥주의 전통이 유지되었는지,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와 종교 개혁을 이끈 독일 성직자 마르틴 루터가 왜 그토록 맥주를 사랑했는지를 밝혀주는 실마리를 드리고자 합니다. 연재 '삶과 문화가 있는 유럽 맥주 이야기'는 격주 목요일 발행됩니다. 많은 관심 바랍니다.

8회 맥줏집을 사랑한 독재자 히틀러

감브리누스(갈리아의 전설적인 맥주 대왕)의 고결한 이슬방울이여,
너는 생명의 묘약이로다.
즐거이 술을 마시는 벗들 사이에서
나는 기쁨에 찬 잔을 드노라.
잔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외치세.
거룩하리라, 너 독일의 술이여!
건배하세, 잔을 비우세.
-울리히 비르바(독일의 맥주 전문가)

1910년 오스트리아 수도 빈(Wien)의 조형미술아카데미 정문을 한 청년이 힘없이 빠져나오고 있었습니다. 비쩍 마른 몸매에 텁수룩한 머리카락과 다듬지 않은 수염이 그를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습니다. 20살 청년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였습니다. 화가가 되길 열망했지만, 히틀러는 미술대학에 연거푸 세 번이나 낙방했습니다. 큰 좌절감에 빠진 히틀러의 눈빛이 세상을 향해 이글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선동적인 연설을 연습하는 히틀러. ⓒvictoriarossi.livejournal.com

히틀러는 1889년 독일과 맞닿은 오스트리아의 작은 도시 브라우나우(Braunau)에서 세관원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누군지 모르고 태어난 알로이스는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구두 수선공으로 일하다 국경감시 세관원이 됐습니다. 어린 시절 히틀러는 아버지의 안정적인 직업 덕분에 경제적으로는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폭군에다 술고래인 아버지로부터 초주검이 될 정도로 얻어맞곤 했습니다. 성격이 괴팍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가혹했던 히틀러의 아버지는 이웃들로부터 늘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모습은 히틀러의 성격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히틀러는 미술에 관심을 보였지만 좋아하지 않던 수학과 과학 과목은 낙제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과 과정을 좇아가지 못하자, 결국 실업계 학교로 전학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곳에서도 낙제하면서 결국 학교를 자퇴했습니다. 학교를 그만둔 히틀러는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였던 미술을 독학으로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세 번이나 미술대학 입시에 떨어지면서 노동자 합숙소와 싸구려 하숙집을 전전하다, 결국 노숙자 생활까지 하게 됩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의 실패와 사회적인 혼란의 원인을 유대인에게 돌리며, 그들에게 적개심을 갖게 됩니다.

히틀러는 미술대학을 준비하면서 이따금 오스트리아 제국의회를 방문하곤 했습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보헤미아(체코), 헝가리로 구성돼 있었습니다. 히틀러는 뮌헨폭동 실패 후 감옥에서 쓴 <나의 투쟁(Mein Kampf)>에서 "독일어 발음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혐오스러운 이방인들이 신성한 제국의회의 단상을 두드리며 연설하는 것에 환멸을 느꼈고, 그때 게르만족의 위대한 조국 건설을 다짐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의 열병을 앓던 히틀러는 군대에 입대해 용감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나 전투 도중 상처를 입어 1급 철십자 훈장을 받고 중사로 제대하게 됩니다. 조국이 반겨줄 것으로 기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히틀러가 맞닥뜨린 것은 제대군인에 대한 냉대였습니다.

패전국 독일이 치러야 할 대가는 너무 혹독했습니다. 국민 200만 명이 희생된 채 막을 내린 전쟁 때문에 독일인은 높은 실업률과 천문학적인 인플레이션으로 고통받았습니다. 하룻밤 호텔에 묵으려면 40만 마르크를 지급해야 했고, 저녁식사비로 180만 마르크를 내야 했습니다. 돈을 큰 수레에 싣고 가야 겨우 식빵 한 개를 살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독일은 알자스-로렌 지방과 광대한 서프로이센 등 영토의 13%를 빼앗겼고, 오늘날로 환산하면 30조 원에 해당하는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독일은 굴욕감에 몸을 떨었습니다. 이때부터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복수를 꿈꾸게 됩니다.

▲히틀러가 그린 그림1. The Courtyard of the Old Residency in Munich (1914) ⓒwikipedia.org

▲히틀러가 그린 그림2. Mother Mary with the Holy Child Jesus Christ (1913) ⓒwikipedia.org

사회적인 혼란 속에서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DAP)이라는 우익 정당에 입당했습니다. 그 안에서 선동가로서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됩니다. 첫 무대가 된 곳이 1919년 9월 뮌헨 사람들이 자주 찾는 맥줏집 '호프브로이하우스(Hofbaeuhaus)'였습니다. 히틀러는 첫 연설부터 배우처럼 능수능란한 표정으로 주먹을 휘두르며 분노하고, 때로는 호탕하게 웃는 극적인 연기로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히틀러는 제국의회를 "얼간이들이 모인 수다스러운 기관", 신문을 "황실의 당나귀 앞에서조차 굽실거리며 꼬리를 흔드는 종이호랑이"라고 맹비난했습니다. 히틀러를 오스트리아의 촌뜨기 퇴역군인 정도로 여기며 냉소했던 사람들도 점점 그의 연설에 환호했습니다.

히틀러 연설의 특징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짧은 문장과 저속한 표현입니다. 히틀러는 청중을 하나로 만드는 탁월한 재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연설 때마다 "당신이 바로 나이며, 내가 곧 당신입니다. 당신이 독일이며, 우리가 바로 독일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패전 독일을 이끌어갈 민족의 지도자(Fuehler)가 히틀러 자신임을 확신시키면서 독일 민족은 위대하다는 것을 끊임없이 강조했습니다. 청중 사이에 인기를 얻게 되자 히틀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와 퇴역군인뿐 아니라 소상공인과 학생, 심지어 보수적인 기업가까지도 그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맥주 이야기로 돌아가 볼까요. 히틀러는 정작 맥주를 좋아하지도, 많이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모든 집회와 행사를 꼭 맥줏집에서 열었습니다. 공부는 하지 않아도 책가방은 도서관에 두고 다녀야 마음이 놓이는 학생처럼 말입니다. 1919년 말 독일노동자당의 본부를 맥줏집 지하실에 차린 것을 비롯해 이후 대부분의 집회를 맥줏집에서 개최했습니다.

히틀러는 왜 맥줏집을 고집했을까요? 독일인에게 맥줏집은 단순히 술만 마시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돌아가는 정보를 교류하는 곳이었고, 패전으로 좌절감에 빠진 사람들이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으며 격려하고 원기를 회복하는 신성한 교회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독일어에 '스탐티쉬(Stammtisch)'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손님용 식탁, 혹은 단골손님의 모임을 뜻합니다. 재미있는 게, 독일의 작은 식당이나 맥줏집에 가면 단골손님이 앉는 자리가 정해져 있습니다. 퇴근 후나 휴일이면 어김없이 사람들은 자기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눕니다. 스탐티쉬는 바로 지역사회의 정보를 교환하고 정치적인 토론을 하는 곳입니다. 매개가 바로 맥주지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맥줏집 대담'이라고 말합니다. 독일인이 모여서 정치적인 현안을 토론하고 정치의식을 키워나가는 곳이 바로 맥줏집이었기에, 히틀러는 이곳을 자신의 정치적 무대로 활용했습니다.

파란색과 초록색, 가끔은 회색빛 눈을 가진 독일인은 바라보면 볼수록 냉정하고 차갑게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처럼 냉정한 독일인들도 맥주 한 잔을 들이켜면 비로소 눈가의 힘이 풀립니다. "맥주를 통해 웃을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는 독일 농담이 있습니다. 차가운 독일인일수록 맥주를 한 잔 마시면 미소 짓고, 두 잔 마시면 대화할 수 있고, 석 잔을 마시면 비로소 마음을 통할 수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 패망 후 아무런 희망 없이 암울한 상황에 있던 독일인에게 맥주는 영혼을 고양하는 음료였습니다.

이런 분위기와 맥주의 속성을 히틀러는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그는 맥주를 마시고 알딸딸해진 청중에게 초등학생도 알아듣기 쉬운 단어와 비속어를 쓰며 하루에 많게는 56번이나 연설을 했습니다. 보통 이런 투였습니다. "유대인은 냄새가 나서 기분 나쁘다. 옷이 더럽고 행색도 꾀죄죄하다. 몸은 불결하고 정신은 타락한 작자들이다. 혐오스럽다. 부정한 일, 파렴치한 일 뒤에는 언제나 유대인이 있다. 그들은 썩어가는 시체를 먹고 사는 구더기 같은 존재다."

맥줏집에서 히틀러는 패전조약에 서명한 정치인과 무거운 배상금을 요구한 연합국을 강하게 비난한 뒤, 위대한 독일을 위해 단결하자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청중은 손뼉 치고 발을 구르며 히틀러를 환호했습니다. 노숙자와 하급 군인생활을 경험하면서 독일인의 심리를 누구보다 깊이 꿰뚫었던 히틀러는 대중이 미워하고 좋아하는 것을 적절하게 배합하면서 나치에 동조할 사람을 끌어모았습니다.
히틀러에 협력한 사람들은 특별히 나쁘거나 잔인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밀턴 마이어(Milton Mayer)는 나치에 가담했던 평범한 독일인 10명과의 심층 인터뷰 모음집 <그들은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생각했다>(박중서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에서 "유대인을 탄압하고 전쟁의 죽음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은 지극히 평범하고 착했다. 새로운 질서에 대한 독일인의 기대와 동조, 그리고 협력이 참극을 낳았다"고 진단합니다.

▲나치 집회. ⓒwikimedia.org

▲부펜바르트 강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유대인들(둘째 칸 왼쪽에서 일곱 번째가 1986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유대인 작가 엘리 위젤) ⓒbuzlu.org

히틀러는 나치 창당식과 중요한 정치행사, 심지어 뮌헨 폭동을 일으킬 때도 어김없이 호프브로이하우스에서 집회를 열었습니다. 이곳은 민주주의와 독일 공화국에 반대하는 나치의 근거지였습니다. 나치 독일의 역사를 만든 주연이 히틀러였다면, 조연은 히틀러에 협력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히틀러는 독일노동자당을 1920년 국민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NSDAP), 즉 나치스로 바꿔 출범시키면서 독일 사회를 되돌아올 수 없는 파멸의 늪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알코올에 대한 결벽증이 있었던 히틀러는 정작 맥주를 한잔 정도만 마셨다고 합니다. 게르만의 바른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서 늘 깨어있어야 하는데, 술을 마시면 정신이 흐트러질 수 있다고 믿은 거지요.

나치의 해외공보실장을 지냈던 에른스트 한프슈탱글(Ernst Hanfstaengl)은 "히틀러는 뮌헨 폭동 후, 석방되자마자 와인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 점점 배가 나오자 비만을 경계해 그때부터 육식과 술을 멀리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맥주는 가끔 마셨습니다. 히틀러는 자신이 만든 폭력조직인 SA돌격대(Sturmabteilung) 집회 때 맥주 한 잔을 들이켠 뒤, 잔을 바닥에 던져 행동의 시작을 상징적으로 알렸다고 합니다. 그 후에도 무언가 정치적 결단을 요구하는 행사 때에는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맥주를 벌꺽벌꺽 들이켠 후, 맥주잔을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일설에는 히틀러가 젊을 때부터 술을 마시지 않았고, 선거로 권력을 거머쥐게 되는 1932년부터는 위암 때문에 홍차나 커피도 마시지 않고 채식을 했다고 합니다.

▲열정적으로 연설하는 히틀러. ⓒwikimedia.org
하지만 히틀러의 요리사였던 빌리 칸넨베르크(Willy Kannenberg)의 증언은 다릅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맥주나 와인을 마시지 않았지만, 측근을 만났을 때는 맥주는 물론 희석한 와인을 자주 마셨고 특히 송아지고기로 만든 뮌헨 소시지인 바이스부어스트(Weissburst)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생선은 먹지 않았지만 달콤한 후식을 좋아해 사탕에 절인 과일이나 크림을 듬뿍 올린 과자를 즐겼고, 커피와 차에도 설탕과 크림을 너무 넣어 마셔서 과체중으로 늘 고생했다고 말합니다.

역사에 가정이 없지만, 만약 히틀러가 삼수 끝에 미술대학에 합격했더라면, 같은 시기 이 대학을 다녔던 관능적인 구상화가 에곤 실레(Econ Schiele, 1890~1918)와 공부하며 현대예술발전에 크게 이바지했을지 모릅니다. 반유대주의와 위대한 게르만국가 건설이라는 망령 대신 이웃과 맥주를 사랑하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었다면 유럽에서만 5000만 명이 희생되는 2차 세계대전이라는 참극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히틀러 치하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1972년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하인리히 뵐(Heinrich Boell)은 "1차 세계대전 후 독일의 혼란이 히틀러라는 괴물을 만들었다. 나치 독일에 대한 철저한 반성 없이 올바른 독일을 세울 수 없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도 그들만큼의 권력을 휘두른 적은 없었다"고 평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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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경학

CBS, <한겨레>, <동아일보> 기자로 일했습니다. 평소 맥주를 사랑하다, 독일 통일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방문한 맥주의 본고장 독일 뮌헨에서 슈바빙(Schwabing) 거리의 흑맥주에 크게 감동했습니다. 중세 문화의 요람이었던 독일 안덱스(Andechs)와 스위스 장크트 갈렌(Sankt Gallen) 등 오래된 수도원을 방문해 마시는 연금술인 맥주 양조술과 맥주의 역사에 관심을 두게 됐습니다. 귀국을 앞두고 영국으로 자동차 여행을 갔다, 부인의 교통사고를 계기로 재활 병원의 필요성을 절감해 국내 최초의 하우스 맥주 회사인 옥토버훼스트(oktoberfest.co.kr)를 창업했습니다. 현재는 푸르메재단에서 시민의 기금을 모아 장애 어린이를 위한 재활 병원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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