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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떠돌았던 이탁오, 황학루를 노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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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떠돌았던 이탁오, 황학루를 노래하다

[탁오서당] <속분서> 권6 '강물 위에서 황학루를 바라보다'(江上望黃鶴樓)

서리 맞은 단풍, 흰 갈대꽃, 강물 위 피어나는 아지랑이
비단 바위, 은빛 고기, 맑디맑은 빛이 참으로 아름답다.
장사치 태운 돛단배 구름 헤치며 나타나고
신선의 누각이 거울 같은 수면에 걸렸구나.
늦가을 뗏목 그림자 은하수를 가로지르니
매화곡 한 자락이 먼 하늘에서 흘러내리네.
가없는 창주1)에 어부는 뜻을 두었어라

깊은 밤 읊조리며 홀로 뱃전 두드린다. 楓霜蘆雪淨江烟, 錦石流鱗淸可憐.
賈客帆檣雲裏見, 仙人樓閣鏡中懸.
九秋槎影橫晴漢, 一笛梅花落遠天.
無限滄州漁父意, 夜深高詠獨鳴舷.


해설


이 시가 언제 작품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다만 '황학루'라는 장소로 유추하건대 만력 19년(1591)에서 21년(1593) 사이 이지가 무창2)에 거주하던 시절인 듯한데, 그래서 오늘은 이 지역과 이지의 인연을 알아보겠다.


이지는 태어날 때부터 죽기까지 중국 전역을 끊임없이 이동한 천생의 방랑객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종종 부평초나 기탁할 곳 없는 늙은 나그네로 묘사하곤 했는데, 두보가 가는 곳마다에서 심회를 읊었던 것처럼 이지도 장소의 기억을 떠올리는 작품을 남기곤 하였다.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그 자취부터 한번 따라가 보자.

복건성 천주(泉州)에서 태어난 이지는 26세 때 성시(省試)에 급제하여 관로에 들어선 이래 줄곧 천하를 떠도는 신세였다. 그의 첫 부임지는 하남성 공성(共城)이었다. 29세 때 발령받아 삼 년 동안 유학교유(儒學敎諭)를 지낸 뒤 남경과 북경의 국자감에서 각각 교관으로 일했고, 예부의 사무(司務)를 5년 지냈으며, 다시 남경으로 옮겨 근 5년간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뒤, 마지막으로 운남성 요안부(姚安府)에서 지부(知府)를 역임했다. 3년만인 54세(1580) 때 사직하고 호북성 황안(黃安)으로 들어가 경정향(耿定向) 형제에게 의탁하다 62세에 마성(麻城)으로 옮겼고, 65세부터 무창에서 지내다가 67세에 용호(龍湖)로 되돌아갔다. 70세 되던 1596년, 이지는 긴 여행을 떠나 대략 사 년 동안 중국 전역을 돌았다. 그는 산서(山西)를 거쳐 북으로 올라갔고 북경에서 만리장성에 올랐다. 그런 연후 배를 사서 대운하를 거쳐 남쪽으로 내려가 남경에서 책을 간행하고 1600년에 다시 용호로 돌아갔다. 75세 때 거주하던 지불원이 화재로 전소되자 다시 북경 근처의 통주(通州)로 옮겼고, 76세 되던 해 삼월 그곳의 감옥에서 자살했다.

얼핏 봐도 당시 중국이 거의 망라되는 범위다. 남긴 발자취만 따라가더라도 명말의 문화지형을 일러주는 좌표가 그려질 성싶다. 이지는 사상과 문화의 최전방에 자리한 인물이었고 주변에는 항시 교유를 희망하는 명사와 학자들이 포진하고 있던 까닭이다. 그는 항상 자신을 자극하고 지적 욕구를 채워주는 만남에 목말라 했기 때문에 지기(知己)를 찾아 천하를 주유해야 할 당위성을 피력하곤 하였다. 그래서 시를 짓더라도 꼭 두보 같지는 않았으니, 그의 시에는 가까운 사람들에 관한 내용이 많다.

만력 19년(1591) 공안파 삼원(三袁) 중의 둘째인 원굉도3)가 마성까지 찾아와 석 달 넘게 기거하면서 같이 학문을 토론했다. 나이는 비록 40여 세나 어렸지만 그 깊은 식견에 탄복한 이지는 원굉도와 완전히 의기투합했고, 떠날 때는 아쉬운 나머지 무창까지 배웅하겠다고 따라나섰다.

오월 어느 날 그들은 무창에서 함께 황학루에 올랐다. 그런데 즐거운 유람 중에 뜻밖의 사건이 발생하니, 바로 지방 관원의 사주를 받은 한 떼의 무뢰배가 이지를 지목해 '대중을 미혹시키는 이단'(左道惑衆)이라면서 공격해온 것이었다. 이 사건은 그전부터 조짐이 있었는데, 이지가 황안에서 마성으로 옮긴 사정과도 무관치 않았다.

원래 이지가 벼슬을 그만두고 호북의 황안으로 옮긴 것은 경(耿) 씨 일가의 후원을 기대한 때문이었다. 경 씨는 그 지방의 명문세가로 형제 셋이 모두 출중했는데, 이지는 그중 둘째인 경정리(耿定理)와 가까웠다. 하지만 만력 12년(1584) 경정리가 죽자 집안의 맏형 경정향과의 사이가 급격히 틀어졌고, 원굉도와 함께 무창에 간 그즈음은 양자 간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한 시점이었다. 경정향은 재상 장거정의 측근이자 호부상서를 역임한 권신이었으므로 비록 직접 지시하진 않았더라도 그에게 아첨하고 싶은 지방 관료가 그런 사건을 일으킬 개연성은 충분한 참이었다. 이지도 습격당한 뒤 친구와 제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건의 배후로 경정향을 지목한 바 있다.

생명의 위협마저 느낀 이지는 사건 직후 원굉도와 함께 무창에서 이십 리 떨어진 홍산사(洪山寺)로 대피했다. 여기서 그는 소문을 듣고 찾아온 호광좌포정사4) 유동성과 만나게 되는데, 이지의 식견에 깊이 감탄한 유동성은 그를 다시 무창으로 모셔와 자신의 관아에 머물게 하고 보호해주었다. 그들은 조석으로 얼굴을 맞대며 학문을 토론하는 친구가 되었고, 이렇게 시작된 우정은 나중에 유동성이 산서의 고향 집으로 이지를 초청해 <명등도고록>이란 결실을 맺기에 이른다.

▲ 지금의 황학루.


비록 위와 같은 곡절을 겪으며 쓰였지만 '강물 위에서 황학루를 바라보다'는 매우 아름다운 시다. 가없는 은둔의 땅에 뜻을 두고 깊은 밤 홀로 뱃전을 두드리는 어부의 모습이 선연히 그려진다. 쓸쓸한 가을 정취에 은자(隱者)의 고독까지 더해지지만 시의 분위기는 외려 담담해서 노년의 한 자락 이지의 심경이 섧게 다가오기도 한다.

그렇게 무창은 황학루와 더불어 이지에게 특별한 장소가 되었다. 호북성의 성도(省都)인 이곳은 양자강과 그 지류인 한수(漢水)가 만나는 곳이라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였는데, 그래서 황학루는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작품을 남긴 명승지로 이름을 떨친다. 무창의 별칭은 '강물의 도시'(江城)인데, 이 역시 이백(李白)이 지은 "누군가 황학루에서 옥피리 흐드러지게 부니, 강성은 오월인데도 매화꽃이 쏟아져 내리네"(黃鶴樓中吹玉笛, 江城五月落梅花)라는 시구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백은 황학루를 소재로 또 다음과 같은 시도 남겼다.

'황학루에서 광릉으로 떠나는 맹호연을 배웅하다'(黃鶴樓送孟浩然之廣陵) 친구랑 황학루서 이별하였네

꽃 피는 삼월에 양주로 가는구나.

돛단배 그림자 푸른 산 다 지나치면
하늘 너머 흐르는 양자강만 보이겠지. 故人西辭黃鶴樓
烟花三月下揚州.
孤帆遠影碧山盡
唯見長江天際流.


양자강 남쪽을 바라보는 사산(蛇山)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황학루가 처음 세워진 시기는 기원 223년 삼국시대 오나라 손권의 치세였다. 바다처럼 드넓은 양자강 물결에 몸을 맡겨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기 위해 가장 높게 누각을 세우니, 무창에 온 사람은 반드시 이곳을 유람했고 떠나는 이를 위한 전별연도 여기서 열렸다. 이지도 거기 올라 남쪽으로 떠나는 원굉도를 오래오래 바라보고 싶어 무창까지 따라왔을 터였다. 신선이 황학을 타고 떠나간 자리에 세워졌대서 명칭도 황학루인데, 거기서 봄날 매화꽃잎 흩날리듯 이름조차 어여쁜 '매화락'(梅花落) 곡조가 누각을 휘감으며 강변으로 울려 퍼질 때 어렵사리 만난 지기를 전송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매화락이 어떤 음악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든 초나라 음악(이 지역은 전국시대 초나라 강토였다)이고, 그렇다면 필시 심신을 정화하는 맑고 그윽한 소리였을 것이다. 옛 초나라 무덤에서 발굴된 악기들로 구성된 연주를 듣노라면 그저 시끄럽기만 한 중국의 다른 지역 음악과는 달리 오로지 청아한 음색이 돋보였다. 우리네 아악과도 비슷한데, 그다지 끌지 않고 산뜻하게 퍼져나가는 곡조가 마음을 가라앉히면서도 영혼을 뒤흔드는 하늘의 소리처럼 들렸다.

신기하게도 초 땅의 정서는 우리랑 많이 닮았다. 일설에 의하면 진시황이 초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유민들은 우리 땅에 건너와 진한과 변한을 세웠다고 한다. 중국의 하고많은 성 중에서 유독 호북의 지명이 우리랑 겹치는 게 많고(강릉, 양양, 한양, 단양, 한강 등등), 음식에 관한 취향까지 비슷하다. 다른 지방 음식과 달리 여기는 담백한 맛 위주인 데다 설사 기름진 음식이라도 붉고 푸른 고추를 잘게 썰어 넣어 미각을 돋운다. 쌀의 주산지이다 보니 나오는 음식도 비슷한 게 많아서 누룽지나 증편 같은 떡이 주식으로 식탁에 오르는 경우도 있다. 초나라는 장기판에만 남아있지 않음을 실감하는 곳이다.

이지는 왜 말년을 고향이 아닌 초 땅에서 보내고 이곳에 뼈를 묻으려 했을까? 구구하게 짚을 것 없이 초 땅의 경물을 사랑하고 거기 사는 사람들이 좋았기 때문일 것이다. '강물 위에서 황학루를 바라보다'는 바로 그런 노년 나그네의 압축된 심경이다.

이지와 별 상관은 없지만 내친김에 '황학루' 버전의 압권이면서 오언율시의 절창인 최호의 시도 읽어보기로 한다. 근 이천 년 동안 전란이나 화재로 수없이 소실되면서도 황학루가 거듭 중건된 이유가 절로 깨우쳐질 것이다.

황학루(黃鶴樓) 최호(崔顥) 옛사람 벌써 황학 타고 떠나가
이곳엔 쓸쓸히 황학루만 남았네
황학은 한번 떠나 돌아오지 않으니
빈 하늘엔 흰 구름만 유유히 떠돈다.
맑은 냇물 사이로 한양의 나무 무성하고
앵무주에는 향기로운 봄풀 우거졌구나
날은 저무는데 내 고향은 어드메뇨
물안개 자욱한 강 굽어보며 수심에 젖네. 昔人已乘黃鶴去
此地空餘黃鶴樓.
黃鶴一去不復返
白雲千載空悠悠.
晴川歷歷漢陽樹
芳草萋萋鸚鵡州.
日暮鄕關何處是
煙波江下使人愁.


▲ 명대 중엽의 궁정화가 안정문(安正文)의 황학루도(黃鶴樓圖). 상해박물관 소장.


각주

1) 창주(滄洲) : 물에 인접한 지역. 예로부터 늘 은사(隱士)의 거처로 인식되었다.

2) 무창(武昌)은 지금의 무한(武漢)시를 가리킨다. 인접한 한구(漢口) 및 한양(漢陽)과 합병되면서 무한으로 개명되었고, 지금은 구(區)의 명칭으로만 남아 있다.

3) 원굉도(袁宏道, 1568∼1610) : 자는 중랑(中郞) 혹은 무학(無學), 호는 석공(石公), 호북 공안(公安)현 사람이다. 1592년 진사에 등과했지만 출사하지 않고 형인 원종도(袁宗道)와 더불어 향리에서 성명지학(性命之學)을 연구했다. 이듬해에 상경하여 오령(吳令)을 제수받고 1592년 봄 부임했지만 2년 뒤 사직하고 친구와 동남방을 유람하였다. 그 뒤 몇몇 벼슬을 거쳤지만 대부분 곧 사직하고 학문과 글쓰기에만 전념했다. 이지는 삼원 중에서 그를 가장 사랑했다. 1591년 용호를 방문했을 때는 석 달 넘게 함께 지내며 황학루에 오르고 장강을 건너서까지 전송하며 시를 지어 이별을 아쉬워했다. 1593년 또다시 용호를 방문한 중랑은 열흘을 머물면서 ‘용호의 스승과 작별하며 지은 절구 다섯 수’(別龍湖師五絶)를 지었고, 이지도 거기에 화답하는 8수의 시를 〈이온릉외기〉(李溫陵外記) 권3에 남겼다.

4) 호광좌포정사(湖廣左布政使) : 호광은 옛날 행성(行省, 지방의 최고최대 행정구역)의 하나로 지금의 호북과 호남 두 성을 합친 명칭이다. 포정사는 성(省)의 인사와 재무를 주관하던 직함으로 행정장관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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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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