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가을의 정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가을의 정회'

[탁오서당] 두보를 흠모했던 이지의 가을 시(詩)

<분서> 권6 '가을의 정회'(秋懷)

몽땅 허옇게 바랜 만년의 머리카락
지닌 것이라곤 노쇠에 굴복 않는 마음뿐이지.
쓸쓸하게 떠도는 건 접여를 배워서가 아니라
깊은 사귐 바라는 간절함 때문이라네.
그리운 님 꿈속에서 찬바람에 실어 보내고
낙엽 지는 소리에 가을의 상념 읊조리오.
자고 이래 귀 밝은 사람 중에서
어쩌면 따로 지음이 있을지도.

白盡餘生髮, 單存不老心.
栖栖非學楚, 切切爲交深.
遠夢悲風送, 秋懷落木吟.
古來聰聽者, 或別有知音.

해설

이 시는 만력 24년(1596), 이지가 산서성 심수(沁水) 평상촌(坪上村)의 유동성 집에 머물 때 지어졌다. 쓸쓸한 늦가을 정경이 인생의 조락을 실감하는 일흔 살 노인의 고독과 겹쳐지면서 지음(知音)을 그리는 노래로 승화되고 있는데, 이 시를 읽은 원종도(袁宗道)는 이지에게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은 감상을 토로했다.

"갑작스럽게 들은 법문이었지만 제가 정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 최근 지으신 시를 읽었는데, '몽땅 하얘진 만년의 머리카락, 지닌 것이라곤 노쇠에 굴복하지 않는 마음뿐'과 '그리운 님 꿈속에서 찬바람에 실어 보내고, 낙엽 지는 소리에 가을의 상념 읊조린다'는 구절에 이르니 덩실덩실 춤이 나오고 몇 줄기 눈물이 주르륵 흐르더군요. 근자의 작품은 어찌 이토록 오묘한 경지에 이르셨는지요? 도를 공부하려면 어찌 젊어서 죽으면 안 되는 것뿐이겠습니까? 심수의 유동성 부자는 날마다 어르신과 어울리니, 생각건대 큰 수확이 있을 테지요."(忽得法語, 助我精進不淺; 又得讀近詩, 至‘白盡餘生髮, 單存不老心’, ‘遠夢悲風送, 秋懷落木吟’, 使我婆娑起舞, 泣數行下. 近作妙至此乎! 豈惟學道不可無年. 沁水父子日與翁相聚, 想得大饒益. <백소재유집>(白蘇齋類集) 권15 '이탁오'(李卓吾))

원종도는 육체적 노쇠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진리를 갈구하는 노인의 자세에 찬탄하면서 동시에 그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유동성 부자에 대한 부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이 편지를 쓰고 나서 얼마 뒤 겨우 마흔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니, 그가 시를 읽으며 울고 웃고 했던 것은 어쩌면 짧은 인연의 아쉬움과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 지음도(知音圖)

'시성'(詩聖)으로 일컬어지는 두보(杜甫, 712~770)에게도 '가을의 정회'(秋懷)와 비슷한 분위기의 시가 전한다. 일단 두보의 시부터 감상해보기로 하자.

'강한'(江漢)

장강과 한수를 떠돌며 고향 그리움 깊으니
천지간에 한 답답한 유자로구나.
조각구름 하늘 끝까지 떠돌고
기나긴 밤 달만이 외로운 나를 벗한다.
석양에도 마음은 여전히 벅차오르고
가을바람 불지만 병은 오히려 물러가네.
예로부터 늙은 말은 지혜로워서
멀리 가는 길 헤매지 않는다 하였지.

江漢思歸客, 乾坤一腐儒.
片雲天共遠, 永夜月同孤.
落日心猶壯, 秋風病欲蘇.
古來存老馬, 不必取長途.

이런저런 형식적 유사성은 차치하더라도 그리움과 고독, 늙음에 굴하지 않는 기개 등을 벼려내는 솜씨가 거의 한 사람 손에서 나왔다고 해도 될 정도로 흡사하다. 두보로부터 거의 천 년이나 뒤에 살았던 이지의 시가 두보의 작품과 도무지 차별이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까? 단순히 시의 속성 운운하거나 중국 역사의 정체성(停滯性) 때문이라 둘러대기엔 뭔가 미흡해 보인다.

고전시가는 본디 중국의 전통문학 중에서도 대아지당(大雅之堂)으로 일컬어지며 사대부의 필수교양으로 간주되었다. 형식과 내용을 막론해 전통에 가장 충실하고 보수적인 경향을 띠는데, 그래서인지 이지의 시도 여타 산문에 비해 독특하다거나 기발한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시에는 원종도의 말처럼 사람을 감동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이지 본인의 말처럼 '진성'(眞誠)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움이란 고금을 관통하며 사람 마음에 저절로 스며드는 때문일 터다.

이지가 설정한 인생의 목표는 생사를 초월한 자유자재 초연한 경계에 다다르는 것이었다. 구속 없는 상태의 심리적 자유, 집착하지 않는 인생관, 자연스럽고 초연물외(超然物外)한 심미적 경계 등은 창작을 하거나 문학작품을 평론할 때 이지가 가장 강조하는 바이기도 하였다. 또 문학이야말로 그런 경계에 다다를 수 있는 수단이라고 인식했는데, 그리하여 자유로운 창작은 해탈하여 세속을 초월한 심리적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통로가 된다고 믿었다.

이지는 작법이나 기교와 상관없이 일체를 본성의 흐름에 맡겨 자연스럽게 표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시와 선(禪)의 이치는 똑같이 마음을 긍정하는 것이라 여겼고, 그래서 문학은 결국 마음공부의 또 한 영역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억지로 꾸미거나 남을 모방하는 문학을 배척하는 '자연표현론'(自然表現論)은 그 문론의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는 그가 장자(莊子)와 곽상(郭象)의 도가철학이나 소동파(蘇東坡)로부터 받은 영향과 무관치 않다. 그는 소동파의 초연하면서도 탈속한 경계를 흠모했을 뿐 아니라 감정과 풍류와 해학이 넘치며 자유롭고 거침없는 문풍에 깊이 경도되었다. 그러나 시만 놓고 말한다면 이지의 스승은 단연코 두보였다. 그는 늘 두보를 닮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했고 또 그렇게 되려고 애썼다.

▲ 두보 초상.

<분서> 권6에 실린 '남쪽 연못'(南池)이란 시에서 이지는 두보의 시 '우제'(偶題)에 나오는 "문장은 천고에 남을 일, 그 득실은 마음만이 안다"(文章千古事, 得失寸心知)를 본떠 "천고에 전할 문장 자신만이 알리라"(千古文章只自知) 하고 읊기도 하고(중국 시학에서는 이런 시 작법을 표절이 아니라 환골탈태換骨脫胎라고 표현한다), "이전에는 시 짓기가 고되기만 했었지, 두보처럼 남들이 놀라는 작품을 남기고 싶었네"(從前祗爲作詩苦, 留得驚人杜甫詩)라고 고백하기도 한다.

두보는 "나의 시가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못하면 죽어서도 쉬지 않겠다"(語不驚人死不休)는 작시 철학을 지닌 노력형 천재였다. 그의 명시들은 수없이 개작을 반복한 노력의 결과였으니, 이런 두보를 배우기란 스스로 고생을 자초하는 일이었지만 이지는 그래도 두보의 수준을 목표로 했고, 그 결과 실제로 두보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유사한 풍격의 작품을 적잖이 남겼다. 특히 오언율시에 있어서는 거의 방불한 솜씨를 보인다고 일컬어지는데, '가을의 정회'도 그중 한 수인 것이다. 두보가 자기 삶의 기록으로 시를 써서 이른바 '시사'(詩史)가 된 것처럼 이지도 내면의 감정을 걸러내고 투사하는 도구로서 시를 적극 활용했다. 이렇게 해서 남은 시는 분량도 적지 않아 <분서>와 <속분서>에 실린 것만 해도 총 269수에 달한다.

시적 감흥이 증폭되는 계절이라 그런지 이지는 유독 가을을 소재로 한 시가 많았다. 내친김에 한 수 더 소개한다.

음력 구월 구일 중양절(重陽節)이 되면 문사들은 높은 산에 올라 국화향기 맡으며 시회(詩會)를 가진다. 그런데 하필이면 바로 그런 날, 꽃이 곱고 날도 좋은데 곁에는 아무도 없어 혼자인 처지다. 문득 국화의 상징 도연명이 떠오르고 그와 자신이 동일시되더니 술 한 병 받쳐 들고 찾아와주는 친구가 못내 그립고 아쉽다. 고독한 심경과 고결한 인품이 한데 어울려 한 수 서정의 세계가 창조되니, 시인은 냉정한 외양과는 달리 마음이 더없이 다감한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분서> 권6 '국화를 한탄함'(恨菊)

도연명만 국화를 사랑한 것이 아니어라.
무서리 맑은 날에 국화꽃 홀로 벌어졌구나.
온 뜨락 가을빛 만발해도 보는 사람 없으니
누군가 보내오는 술이나 기다릴까?

不是先生偏愛菊, 淸霜獨有菊花開.
滿庭秋色無人見, 敢望白衣送酒來?

▲ 명대 진홍수(陳洪綬)의 도연명고사도(陶淵明故事圖).


각주


1) 지음(知音) : 지기(知己), 혹은 뜻을 같이하는 동지. 〈열자〉'탕문'(湯問)편에서 유래하였다. "백아는 거문고를 잘 탔고, 종자기는 거문고 소리를 잘 알아들었다. 백아가 거문고를 타며 높은 산을 생각하면 종자기는 '태산처럼 참 높기도 하다' 말했고, 백아가 흐르는 물을 생각하면 종자기는 '장강이나 황하처럼 물이 참 크기도 하다'며 감탄했다. 백아가 생각하는 바를 종자기는 반드시 알아맞혔던 것이다"(伯牙善鼓琴, 鍾子期善聽琴. 伯牙琴音志在高山, 子期說'峩峩兮若泰山'; 琴音意在流水, 子期說'洋洋兮若江河'. 伯牙所念, 鍾子期必得之.) 나중에는 자신의 작품을 깊이 이해하거나 정확하게 평가하는 사람을 일컫게 되었다.

2) 접여(接輿) : 춘추시대 초나라의 은자. 〈논어〉'미자'(微子)편에 그 존재가 보인다. "초나라의 미치광이 접여가 노래를 부르면서 공자 앞을 지나쳐갔다"(楚狂接輿, 歌而過孔子.) 형병(邢昺)은 이 대목의 소(疏)에서 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접여는 초나라 사람으로 성은 육씨, 이름은 통이고, 자가 접여이다. 소왕 때 정치와 법의 집행에 일정함이 없자 머리카락을 풀어헤치고 거짓으로 미친 척하며 출사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컬어 '초나라 미치광이'라고 불렀다"(接輿, 楚人, 姓陸名通, 字接輿也. 昭王時, 政令無常, 乃被髮佯狂不仕. 時人謂之'楚狂'也.) 이 시에서는 접여와 같은 은자를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3) 백의송주(白衣送酒) : 진(晉)대의 왕굉이 하인을 시켜 도연명에게 술을 보낸 고사에서 비롯된 성어. 중양절에 친구에게 술을 보내거나 혹은 함께 마시면서 국화를 찬미하는 것을 일컫는다. 백의는 원래 평민을 말하지만, 여기서는 특별히 술을 전달하는 하인을 가리킨다. 남조 송대의 단도란(檀道鸞)이 지은 〈속진양추〉(續晋陽秋)'공제'(恭帝)에 다음과 같은 고사가 실려 있다. "왕굉이 강주자사를 지낼 때였다. 도잠이 중양절에도 마실 술이 없어 집 가장자리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밭에서 손아귀 가득 국화꽃잎만 뜯으며 시름 젖어 앉아 있었다. 오래지 않아 멀리서 어떤 흰옷 입은 사람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바로 자사 왕굉이 보낸 술심부름꾼이었다"(王宏爲江州刺史, 陶潛九月九日無酒, 於宅邊東籬下菊叢中摘盈把, 坐其側. 未幾. 望見一白衣人至, 乃刺史王宏送酒也.)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