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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에 사람이 있네"

[탁오서당] <분서> 권6 '독서의 즐거움-서문과 아울러'(讀書樂-幷引)

가을 빛깔(秋色)이 깊고 환해, 앞으로 두 주에 걸쳐 독서와 가을을 소재로 한 이지의 시를 소개한다.

조공이 말씀하셨다. "늙어서도 배울 수 있는 자는 오직 나와 원백업 뿐이다."

대저 사분오열된 땅덩이의 창과 칼이 난무하는 전쟁터에서도 그분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으셨는데, 나 같이 하릴없고 한가한 일개 늙은이야 말할 나위 있을까! 이치는 그러하다만, 이는 또 억지로 강박하기 어려운 바이기도 하다. 그런데 내게는 원래 천행이라 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다.

천행으로 하늘은 내게 밝은 눈을 주시어 고희의 나이에도 여전히 행간이 촘촘한 책을 읽을 수 있게 하셨다. 천행으로 내게 손을 내리시어 비록 고희에 이르렀지만 아직까지 잔글씨를 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점을 두고 천행이라 하기에는 아직 미흡하겠지. 하늘은 다행스럽게도 내게 평생토록 속인을 만나기 싫어하는 성격을 주셨다. 덕분에 나는 한창 나이 때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친척이나 손님의 왕래에 시달리지 않고 오직 독서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천행으로 나는 한평생 가족들을 사랑하거나 가까이하지 않는 무딘 감정을 타고났다. 그 덕분에 용호에서 말년을 보내면서 가족을 부양하거나 그들에게 핍박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 또 일념으로 독서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따위 역시 천행 운운하기에는 아직 미흡해 보인다. 천행으로 내게는 마음의 눈이 있어 책을 펴면 곧 인간이 보이곤 하였다. 또 그때마다 그 사람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대강은 볼 수가 있었다.

무릇 독서하고 세상을 의론하는 것이야 옛날부터 많이들 행하여왔다. 혹자는 거죽만 보고, 혹자는 몸뚱이와 살갗만 보며, 혹자는 신체 내를 관통하는 혈맥을 보기도 하고, 혹자는 근육과 뼈를 보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지극한 경지라야 뼈에 이른 정도에 불과한 실정이었다. 설사 스스로는 오장육부를 관통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기실 뼛골을 찌르는 정도까지는 아직 닿지 못했던 것이다. 이는 내가 바로 천행이라 생각하는 가장 첫 번째 항목이다. 요행 하늘은 나를 대담하게 낳으셨다. 무릇 옛사람들이 기꺼워하고 어여삐 여긴 현자들이 많건만, 나는 거개(擧皆)가 가짜라는 생각이었다. 또 그들 대다수는 어리석고 재주도 없으며 실제의 쓰임에는 적절치 않다고 여겨진 반면에 그들이 멸시하고 내치고 침 뱉고 욕한 사람들 모두야말로 나라를 맡기고 가정을 맡기며 몸을 의탁할 수 있는 위인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 시비에 있어 옛사람들과 이토록 크게 어그러졌으니, 대담하지 않으면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이는 또 나 스스로 천행이라 여기는 두 번째 항목이다. 위와 같은 두 가지 천행이 주어진 덕분에 나는 늙도록 학문을 즐긴다. 그래서 '독서의 즐거움' 한 편을 지어 스스로의 즐거움으로 삼기로 한다.

▲ 송대 유송년(劉松年)의 '추창독서도'(秋窓讀書圖).

하늘이 용호(龍湖)를 만드사 탁오를 기다리셨네.
하늘이 탁오를 낳으사 용호가 존재하는구나.
용호에 탁오 있으니, 그 즐거움 어떠한가?
사시사철 책만 읽을 뿐 그 밖의 일은 모르는구나.
독서란 무엇인가? 나를 많이 만나는 기회
오롯이 마음과 만나서 혼자 웃고 노래하네.
노래하길 그치지 않다 연이어 부르짖기도 하지.
통곡하고 울부짖다 눈물범벅 되기도 하지.
노래함에 이유가 없질 않으니
책 속에 사람이 있어서이네.
나는 그 사람을 보지만
사실은 내 마음을 얻는 것이라.
울 때도 이유가 없지 않으니
내용이 텅텅 비어 사람이 보이지 않아서라네.
그 사람은 보지도 못하고
공연히 내 마음만 고달프게 했구나.
"그런 때는 팽개쳐 읽지 말고
묶어서 다락에 올려놓으시라구.
편안히 정신을 쉬게 하며
노래와 울음도 그만두시고.
왜 꼭 책 읽은 연후라야 즐거워진단 말이오?"
얼핏 이 말을 들었을 때는
마치 나(不穀)를 동정하는 듯하였네.
"책을 처박아 읽지 않으면 내가 무슨 수로 기쁨 느낄까?
마음의 휴식이 바로 책 사이에 있으니.
이 세계가 얼마나 좁고 책 속의 세계가 얼마나 넓던가.
천이야 만이야 수많은 성현들이 그대와 무슨 원한이 있겠소!"
몸은 있으되 집이 없고,
머리통은 있으되 두발은 잘라버린 신세로구나.
죽는 것은 육신이요 썩는 것은 뼛골이라.
책 읽는 즐거움만 영원하니,
원컨대 죽을 때까지 더불고 싶어라.
책의 숲에서 휘파람 부니,
그 소리에 송골매 놀라 푸드득 날아가네.
노래와 울음이 연달아 이어지니,
그 즐거움 무궁무진이로다.
촌음이 아까워라,
어찌 감히 여유 부릴 수 있을까!

天生龍湖, 以待卓吾; 天生卓吾, 乃在龍湖.
龍湖卓吾, 其樂何如? 四時讀書, 不知其餘.
讀書伊何? 會我者多. 一與心會, 自笑自歌;
歌吟不已, 繼以呼呵. 慟哭呼呵, 涕泗滂沱.
歌匪無因, 書中有人; 我觀其人, 實獲我心.
哭匪無因, 空潭無人; 未見其人, 實勞我心.
"棄置莫讀, 束之高屋, 怡性養神, 輟歌送哭.
何必讀書, 然後爲樂?" 乍聞此言, 若憫不穀.
"束書不觀, 吾何以歡? 怡性養神, 正在此間.
世界何窄, 方冊何寬! 千聖萬賢, 與公何寃!"
有身無家, 有首無髮, 死者是身, 朽者是骨.
此獨不朽, 願與偕歿, 倚嘯叢中, 聲震林鶻.
歌哭相從, 其樂無窮, 寸陰可惜, 曷敢從容!

해설

이 시는 만력 24년(1596), 이지의 나이 70세 되던 해 호북성 마성(麻城)에서 쓰였다. 형식은 4언의 장편고시(長篇古詩)인데, 특이하게도 앞부분에 자신의 독서인생을 개괄하고 시 짓는 이유를 설명하는 서문(引)이 병기되어 있다.

'독서의 즐거움'이란 제목이 시사하듯 이 시와 서문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독서하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독서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다.

이지는 자신의 경우를 예로 들면서 책은 마음의 눈으로 읽으라고 말한다. 저자의 마음속으로 들어가되 고인(古人)의 말씀이라 해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비판적으로 읽을 것을 강조한다. 마음으로 읽어야 거죽이 아닌 혈맥이나 뼛골을 보고 오장육부를 관통하여 중심에 다다를 수 있는데, 또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대담하게 의심할 줄 아는 심안(心眼)을 구비해야 한다는 것이 이지의 생각이었다.

이지는 또 시에서 책을 읽는 것 말고 평생 다른 즐거움은 모른 채 살아왔다고 말한다. 책 속에 보이는 사람들 만나는 재미에 세월을 잊은 채 살 수 있었고, 또 덕분에 자신이 누군지 알고 다른 이들 마음까지 찾아낼 수 있었다고 하였다. 칠십 평생 책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발견과 만남의 기쁨, 그 안에서 감격에 겨워 울고 웃는 이지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다.

중국학술사에서 이지 보다 유명한 이단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다. 말년의 저작들이 물의를 일으켜 그 바람에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쳤고 저작들은 청나라 말기까지 금서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유통을 금지시켜도 글 읽는 자라면 누구나 책상 위에 그의 책 한 권씩은 올려놓고 읽었다는 것이니, 이탁오의 이름을 도용한 위작(僞作)들은 끊임없이 출판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명의로 나온 서적 중에 적어도 60~70%는 가짜라고 하는데, 그의 책이 이토록 인기가 높았던 이유는 '독서의 즐거움' 시만 읽더라도 금세 짐작할 수 있다.

이지는 저작이 많기도 하지만 논변을 할 때는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내 상대방 폐부를 찌르는 날카로운 논박을 가하기로 유명했다. 게다가 그 문장은 또 박학과 절제와 해학의 미덕까지 온전히 갖춘 것이었다. 어떤 주제를 갖고 논해도 장강처럼 유장하게 무불통지 거침없는 의론을 펼쳐내곤 했는데, 이는 폭넓은 독서로 인한 박학다식이 아니면 설명이 안 된다. 그의 글 앞에서 당대의 위정자나 도학선생들은 혹세무민의 이단이란 트집 말고 다른 흠은 잡아낼 길이 없었는데, 방대한 독서량으로 무장한 그 유창한 언변과 빈틈없는 논리를 깨뜨리기에 그들은 항상 역부족이고 처지는 궁색했다.

▲ 원종도 초상.

'독서의 즐거움'에 대한 구구한 설명은 필요치 않아 보인다. 다만 제자 원종도(袁宗道, 1560~1600)가 저자의 친필로 적은 이 시를 받아 읽고 남긴 오언장편고시는 이지와 시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하는 유용한 자료인 까닭에 아래에 옮겨놓기로 한다.

▲ 원종도 묘비.
원종도는 공안파(公安派)로 일컬어지는 원씨 삼형제(三袁) 중의 맏이였다. 이지의 가르침을 받은 뒤 고인(古人)의 흉내에만 급급하던 당시의 의고주의(擬古主義) 문풍을 일소하는 성령문학(性靈文學)을 주창해서 문단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주인공 중 한 사람이기도 하다.

"너만의 개성과 영혼(정신세계)를 펼쳐 보이되
기존의 형식이나 조탁에 구애받지 마라."(獨抒性靈, 不拘格套)

위와 같은 기치를 내걸었던 공안파의 소문품(小品文) 운동은 명말을 풍미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까지 전래되어 연암 박지원 등의 문학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정조가 문체반정을 내세우며 순정한 고문으로 돌아가라고 당시 문인들을 핍박했던 일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문학사의 빛나는 한 장도 근원을 따져 올라가니 이지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원종도 '독서락 시를 읽고 나서'(書讀書樂後)

용호 어르신이 무쇠 같은 필력으로
일필휘지 거침없이 써내려간 고백과 비판.
종횡무진 유창하게 고인을 깔아뭉개
옮기려니 붓이 없고 예법상 할 말도 없네.
한 마디에 죽은 귀신 간담이 서늘해지고
몇 마디는 무덤 속 해골도 벌떡 일으켜 세우네.
공과 이별한 이래 적막하여 괴롭던 참인데
병환 소식까지 듣게 되니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홀연 나타난 두 승려 공의 편지를 내미는데
바로 직접 쓰신 '독서락' 장편고시였다.
스스로 과시하길 늙어서 더 꿋꿋하니
담력과 기상과 정신이 모두 감당을 못하겠네.
음악에 취미가 없어 진짜 즐거움을 아시니
그 연세에 어찌 그리 기운 좋은지 묻고 싶네.
시 자체가 기이한데 글자마다 굳세고 빼어나
바위암벽 물결무늬처럼 기세와 격조 드높아라.
늙어 쇠약한 몸이라지만 그 정신 맑고 꼿꼿해
이 시를 마주해 읽으니 공께서 곁에 계신 듯하네.
용호의 어르신 과연 드물게 걸출한 분이라
'독서락' 이 시는 영원토록 전해지리.
세상에 지음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이 시가 구슬보다 보배롭구나.

龍湖老子手如鐵, 信手訐駁寫不輟.
縱橫圓轉輕古人, 遷也無筆儀無舌.
一語能塞泉下膽, 片言堪肉夜台骨.
我自別公苦寂寞, 況聞病肺那忘却.
忽有兩僧致公書, 乃是手書‘讀書樂’.
自夸讀書老更强, 膽氣精神不可當.
歌管無情有眞樂, 問公垂老何氣揚.
詩旣奇崛字遒絶, 石走岩皴格力蒼.
老骨棱棱精炯炯, 對此恍如坐公傍.
龍湖老子果希有, 此詩此字應不朽.
莫道世無賞音人, 袁也寶之勝瓊玖.
출전은 <백소재유집> (白蘇齋類集) 권1

▲ 송대 유송년(劉松年)의 '추창독서도'(秋窓讀書圖).

각주

1) 조공은 조조(曹操, 155~220)를 가리킨다. 자는 맹덕(孟德). 동한 말기 황건적과 여포 등을 진압하고 중국 북부를 통일해 위왕(魏王)이 되었다. 훗날 아들 조비(曹丕)가 위나라를 건립하고 무제(武帝)로 추존했고, 후인이 정리한 〈조조집〉(曹操集)이 남아 있다.

2) 원백업(袁伯業) : 원유(袁遺). 동한 말의 관리로 자는 백업. 원소(袁紹)의 사촌 형으로 여남(汝南)의 여양(汝陽, 지금의 하남성 商水 서남쪽) 사람이다. 장안령(長安令)과 산양태수(山陽太守)를 지냈고 동탁(董卓)의 연맹군 정벌에 참여했다. 훗날 원소에 의해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임명되었으나 원술(袁術)에게 축출당했다.

3) 불곡(不穀) : 불선(不善)과 같은 말로 고대의 왕후(王侯)가 자신을 가리킬 때 사용하던 겸사(謙辭)이다. 곧 '나'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이지가 운을 맞추기 위해 일부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4) 문답체의 형식을 빌었다. 독서를 그만두라는 다른 사람의 권유를 가정적으로 설정하고, 이지 또한 답변의 형식으로 독서 외의 다른 즐거움은 없다고 결론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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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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