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지령'은 꽤 효과적인 것 같다. 박 대통령은 지난 27일 국회 예산안 시정연설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와 관련해 "역사를 바로 잡는 것은 정쟁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되는 것"이라며 "앞으로 올바른 역사교과서를 통해 분열된 국론을 통합하고, 우리 아이들에게 대한민국의 자부심과 정통성을 심어줄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각고(刻苦)의 노력. 고통을 새겨가며 노력한다는 것이다. 뼈를 깎는 노력, 살을 에는 노력의 의미다. 돌아갈 길은 없다는 것으로, 배수의 진을 친 박 대통령의 결기가 뚝뚝 묻어난다. 선전포고(새정치민주연합 정청래 최고위원)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다.
시정연설이 있던 27일을 기점으로 여권은 총궐기에 나선 모습이다. 여권은 '전략'을 틀었다.
朴 연설 기점으로 실패한 '설득 전략' 버리고 색깔 공세 총동원
28일 보수 언론인 <문화일보>는 "정통한 대북소식통"을 취재원으로 해 "북한 통일전선부와 정찰총국 등 대남공작기관은 최근 조총련 등 해외 친북 단체와 국내 친북 조직 및 개인에게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방침에 대한 반대 투쟁과 선동전을 전개하도록 지시하는 지령문을 보냈다"고 확정 보도했다. 이 신문은 1면, 3면, 그리고 사설을 동원해 북한의 지령과 야당의 주장이 흡사하다는 색깔론을 전개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으로 불리는 새누리당 이정현 최고위원은 같은 날 야당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반대에 대해 "언젠가는 적화(赤化)통일이 될 것이고, 북한 체제로 통일이 될 것이고, 그들의 세상이 되게 됐을 적에 남한 내에서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미리 교육을 시키겠다는 이런 불순한 의도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그렇게 온몸을 던져서 정치생명을 걸고서 이것을(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야당이) 막아내려고 하느냐"고 주장했다. 야당의 국정화 반대는 적화통일 대비용인 셈이다.
29일 친박 핵심인 서청원 최고위원이 전날 <문화일보> 보도 내용을 그대로 받았다. 그는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반정부 투쟁 조성에 나서고 있을 뿐 아니라 대남 공작 기관을 통해 총궐기 투쟁 지시까지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며 "북한의 남남 갈등 전술에 가장 큰 도움 주고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사법 당국에 "이 문제를 조사해야 한다"며 수사 의뢰까지 내놓았다.
공안 검사 출신인 황교안 국무총리가 서 최고위원의 말을 받았다. 황 총리는 이날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종합정책질의에서 "(북한 지령설이) 확인되면 필요한 조치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문화일보>는 이날 또 하나의 '단독' 기사를 냈다. 이번에는 청와대 관계자다. 공식 브리핑을 제외하고 언론에 나서는 것을 극히 꺼리는 청와대가 유독 이 신문의 '단독 취재'를 허용했다는 것은, 그 의도와 관련해 여러 가능성을 추정케 한다.
이 관계자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는 좌편향 문제점을 바로 잡기 위해 출발했지만, (야당과 시민단체가) 집필진 구성을 막고 인신공격을 가하는 협박과 장외 투쟁으로 번지고 있다"고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신문은 이 관계자를 인용, 집필에 참여할 의사가 있는 일부 인사가 불안해하고 있다고 전한 후, 정부에 협조적인 인사들이 '적색 테러' 위험에 노출돼 있는 현 상황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를 전했다.
적색테러, 공포심을 불러 일으키는 용어다. 외국인이 이런 기사를 접한다면 국내에 알카에다와 같은 '공산주의 혁명 조직'이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을만 하다. 이런 선동적인 단어를 연일 사용하는 여권에 대해 야당이 비판하면, 보수 언론은 '막말 공방으로 치닫는 정치'라는 식의 보도를 내보낸다. 여도 야도 잘못했다는 것인데, 정치 불신을 부추기는 보도다.
일련의 흐름을 짚어보자. 한 가지 합리적 의심이 든다. 청와대를 비롯한 여권이 국정화 드라이브 전략을 바꾼 것이다.
실제 지난 26일 친박 강경파인 김태흠 의원이 황우여 교육부장관 경질론을 주장하며 내놓은 이유는 '전략 실패'였다.
김 의원은 "처음에 올바른 교과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로 본질적 문제를 앞에 내걸고 방법론적으로 검인정 강화냐, 국정화냐로 갔어야 한다"면서 "이후 검인정 강화는 (좌파의) 카르텔 때문에 어려우니 국정화로 가야한다는 형태로 진행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 의원은 "국정 역사교과서의 주무부처는 교육부이다. 그런데 일련의 과정을 보면 교육부 수장이 발 벗고 야당을 설득한다든가 아니면 국민들을 설득하고, 오해가 있으면 진실에 대해 국민들에게 적극 홍보하고 해야하는데 그런 부분에 대해서 여러 가지 미흡했다"고도 했다.
마침 26일에는 이정현 최고위원이 국정화 추진에 반대하면 "국민이 아니다"라고 규정했다. 일정한 흐름이 감지된다. 기존 전략 실패에 대한 반성, 그리고 '두 국민 전략'이라는 새로운 기조다.
27일 박 대통령이 시정연설을 통해 '배수의 진'을 쳤고, 정부는 익명 뒤에 숨어 '적색 테러'에 대한 우려를 보수 언론을 통해 풀어낸다. "정통한 대북소식통"에 의해 촉발된 확인되지 않은 의혹을 여당이 받아 여론전을 펴고, 공안 검사 출신 총리는 수사 가능성을 내비친다. 새누리당 의원 입에서는 요새 군 정훈교재에서나 볼 수 있는 '적화통일'이라는 말이 튀어나온다.
다음 수순은? 예상 가능하다. 압수수색, 야당과 연관성, 이적 서적 발견…. 이와 관련된 예측은 소설에 가까워 이 글에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소설이 틀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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