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 바람 따라 11월 고을학교(교장 최연. 고을연구전문가)는 제25강으로, 근대항구도시의 유물과 조선시대 고을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금강 하류의 군산고을을 찾아갑니다.
군산(群山)은 지정학적인 요인으로 백제의 백강전투와 고려의 진포대첩의 역사적인 현장이기도 하고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지 미곡 수탈의 전진기지로 건설된 근대적 항구로서 일제강점기의 근대건축문화유산이 즐비하게 남아 있습니다. ▶참가신청 바로가기
우리 조상들은 자연부락인 ‘마을’들이 모여 ‘고을’을 이루며 살아왔습니다. 2013년 10월 개교한 고을학교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섭니다.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삶들을 만나보려 합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고을학교 제25강은 11월 22일(일요일) 열리며 오전 7시 서울을 출발합니다. (정시에 출발합니다. 오전 6시 50분까지 서울 강남구 지하철 3호선 압구정역 6번 출구의 현대백화점 옆 공영주차장에서 <고을학교> 버스에 탑승바랍니다. 아침식사로 김밥과 식수가 준비돼 있습니다. 답사 일정은 현지 사정에 따라 일부 조정될 수 있습니다.)
이날 답사 코스는 서울-동군산IC-옥구읍치구역(자천대/옥구향교/옥산서원)-근대역사문화거리(군산근대역사박물관/부잔교/근대건축관/구군산세관/해망굴/초원사진관/신흥동일본식가옥/동국사)-점심식사 겸 뒤풀이-진포대첩비-이영춘가옥-발산리유적(석등/5층석탑/시마타니금고건물)-임피역사-임피읍치구역(노성당/임피향교/채만식생가터)-군산IC-서울의 순입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제25강 답사지인 군산고을에 대해 설명을 듣습니다.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략 때 세 번의 격전장
군산은 금강의 하류에 있는 서해안의 중심 항구로서 넓은 호남평야를 뒤에 두고, 동쪽으로는 익산, 남쪽으로는 김제와 부안, 서쪽으로는 서해, 북쪽으로는 금강을 경계로 서천, 보령과 이웃하고 있습니다. 도시의 서쪽은 바다와 섬들이 있고 남쪽과 동쪽은 평야와 나지막한 야산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군산의 산줄기는 금남정맥(錦南正脈)에서 갈려나온 함라지맥(咸羅之脈)의 낮은 능선으로 대부분 충적평야와 구릉지로 되어 있으며 북동쪽으로 오성산(210m), 장계산, 천방산, 월명산을 등지고 위치한 중부 서해안의 해상관문의 도시입니다. 내륙은 곡창지대인 임옥평야(臨沃平野)가, 서해에는 고군산군도를 중심으로 풍성한 어장이 조성되어 있고, 16개의 유인도와 40여 개의 무인도가 해상에 펼쳐져 있습니다.
군산에는 연강(회현), 옥산(옥구), 취성(임피)의 3개 마을들이 마한시대부터 명칭은 바뀌지만 생활공간은 바뀜 없이 이어져 살아 왔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옥구(沃溝)와 임피(臨陂)가 고을로 발전하였습니다.
군산은 4세기 후반(근초고왕 때) 마한의 영역이었던 금강 이남 지역을 백제가 차지함으로써 그에 속하게 되었고 이후 백제의 도성이 한강 유역에서 금강 유역인 웅진성과 사비성으로 옮겨지면서 백제의 대외무역과 군사상의 중요한 지역으로서 발전하게 됩니다.
군산은 백제시대에 기벌포 혹은 백촌(白村)으로 불렸는데 넓은 의미로는 현재의 금강 하류지역이었고 좁은 의미로는 군산 인근 지역을 나타내는 지명이었습니다. 그 지리적 중요성 때문에 나당연합군의 백제 침략 때 주된 공격 대상이 되어 세 번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입니다.
첫 번째 전투는 나당연합군의 백제 기습공격 때 소정방의 당나라군이 기벌포 상륙작전을 감행한 현장으로, 이때 침입해 오는 당나라군을 맞아 항거하다 죽음을 당한 분들을 기리는 오성인 대제가 매년 군산의 오성산 정상에서 성대하게 치러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 전투는 663년 쓰러진 나라를 일으키려는 백제부흥군과 나당연합군과의 기벌포 해전으로 달리 백강전투이라고도 하는데, 이 전투에서 백제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백제가 완전히 멸망하게 됩니다.
세 번째 전투는 백제, 고구려 멸망 후 신라가 우리의 땅을 직접 지배하려는 당나라군에 맞서 싸우게 되는데 매초성 전투에서 승리한 신라군이 설인귀의 당나라 해군을 이곳 기벌포에서 20여 회의 전투 끝에 승리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서 당나라군을 완전히 몰아내게 되었습니다.
한일합병 직후 급성장, 총수출량 전국 2위에 총수입량 전국 4위
고려시대의 조창제도는 전국에서 세금으로 거두는 곡식을 개경(고려시대 서울)으로 실어 가기 위해서 해안이나 강가에 보관창고를 전국 12곳에 두었는데 이 중 하나인 진성창(鎭城倉)이 지금의 군산 성산면 창오리 망경산(望景山), 창안 방죽 근처에 있었으며 이곳에 토성을 쌓아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관하였습니다.
진성창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을 약탈하려고 왜구의 침략이 잦았었는데 왜구와의 가장 유명한 전투가 진포대첩입니다. 고려 우왕6년(1380) 8월 왜선 500척이 진포 입구에 침입하여 배를 서로 묶어 놓고 상륙하여 백성들을 죽이고 노략질을 일삼았습니다. 이때 나세, 심덕부, 최무선 세 장군이 최무선이 만든 80여 척의 병선에 최무선이 만든 화통, 화포를 설치하고 진포로 진격하여 왜의 병선에 화포를 쏘아대자 적의 배는 서로 묶어 놓은 터라 일시에 불타 가라앉았고 왜구의 대부분은 타죽거나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그중에서 용케 살아남아 육지로 도망친 왜구들이 옥천, 영동을 거쳐 곳곳에서 노략질을 하다가 이성계 부대에 의하여 황산(남원 운봉)에서 거의 전멸을 당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황산대첩(荒山大捷)입니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군산은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 강제로 개항되어 목포영사관 군산분관이 생겼는데 일본영사가 각국 거류회의 회두를 겸하고 있어 항만관리권은 그들의 소관이 되었습니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통감부의 지역기관인 이사청(群山理事廳)을 군산을 비롯한 10곳에 두었는데 군산이사청은 전북 지역 만경, 부안, 고부, 정읍, 순창, 구례, 남원과 충남 남부 지역 보령, 남포, 홍산, 정산, 공주 등을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1910년 한일합병이 이루어지자 조선총독부의 설치로 군산이사청은 폐지되고 군산은 부로 승격, 군산부청이 설치되었습니다. 1914년에 간행한 <군산안내>에 따르면 군산은 전국 12부 중 상업항구도시로서 총수출량은 부산 다음으로 전국 2위를, 총수입량으로는 전국 4위를 차지했는데 수출품은 주로 쌀이었습니다.
군산을 이처럼 급격히 항구도시로 성장시킨 배경은 호남, 충청의 농토를 빼앗아 일본의 것으로 만들어 가난한 일본 농민을 옮겨와 살게 하고, 역시 호남, 충청의 쌀을 일본으로 강제 수출시켜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하고자 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전북 지역은 가장 많은 일본인 농장이 모여 있던 지역이 되었고 가장 높은 사회 지배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던 일본 식민정책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농장이 많았는데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전북 지역에는 이미 24개의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졌고 이후 1920년에 이르기까지 다시 18개의 농장이 더 생겼습니다.
일제의 식민정책은 한국을 식량 및 원료생산지로, 또 일본 공업제품의 판매시장으로 만들고자 산미증산계획에 역점을 두었기에 10여 개의 정미소가 밤낮 없이 가동되었고, 일본인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강제 징수로 빼앗긴 곡물은 모두 군산으로 집결되어 군산부두에는 ‘쌀의 산’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옥구 자천대는 최치원이 어린 시절 책 읽으며 놀던 곳
군산에는 옥구와 임피에 읍치구역이 있었습니다. 옥구의 읍치구역에는 옥구향교, 자천대, 문창서원, 옥산서원, 염의서원이 남아 있으며 옥구향교를 제외한 다른 유적들은 모두 고운 최치원과 관련이 있습니다.
옥구향교(沃溝鄕校)는 4개의 영역으로 나눠지는데 문창서원의 서쪽으로 단군성묘(檀君聖廟)와 대성전(大成殿) 영역이 있고 그 남쪽으로 명륜당, 전사재, 양사재, 자천대가 있으며 옥구향교와 인접하여 서쪽에는 세종대왕숭모비, 동쪽에는 옥산서원이 있습니다.
옥구향교는 조선 태종 3년에 당시 교동이라 불렸던 옥구현 이곡리에 처음 세워졌다가 인조 24년 현 위치로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며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4현(宋朝四賢), 동국18현(東國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자천대(紫泉臺)는 군산의 유일한 2층 누각정자로 정면 3칸 측면 1칸의 2층 팔각지붕 형태인데 조선후기의 누각 양식이며 옥구현 서쪽에 위치한 하제 포구 인근 바닷가에 있던 바위산의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바위산 옆 연못의 빛깔이 항상 붉어 ‘붉은 연못가의 바위산’이라는 뜻에서 자천대라고 불렀으며, 일제시대 1934년 비행장 확장공사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으나 당시 옥구 군수와 유림들이 나서서 일본군의 장비를 동원하여 옥구향교로 이전하였고 이때부터 경현제 혹은 자천대로 불렀으며 1967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하였습니다.
자천대는 “최치원이 소년 시절에 신라의 무관으로 내초도(지금은 육지가 됐음)의 수군장으로 부임한 아버지 최충을 따라와 같이 살았는데, 이곳 정자에서 글 읽는 소리가 당나라까지 들려 사신이 건너와 그를 데리고 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돌아왔을 때 세상의 인심이 어지럽고 어수선하자, 자천대에 올라 책을 읽으며 근심과 걱정을 달랬다고 합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자천대는 서해안에 위치하며, 지형은 넓고 평평하며, 샘과 돌이 가히 즐길 만하다. 세상이 전하기는 최치원이 놀던 곳이라 한다”고 자천대의 위치와 유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창서원(文昌書院)은 고운 최치원을 배향하고 있으며 서원의 이름은 최치원의 시호인 문창후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숙종 때 건립되었다가 1868년 훼철되었으며 1969년 옥구 유림들이 재건립을 발의하여 다시 세워졌으며 옥구향교 경내의 동쪽에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옥산서원(玉山書院)은 일제 강점기인 1929년에 건립된 서원으로 문창후 최치원 선생을 비롯하여 옥구 지역의 문무(文武) 및 충효(忠孝)에 특출한 선현(先賢) 14분을 배향하고 있는데 사당인 옥산원, 강당, 내삼문, 원직사, 외삼문 등 총 5채의 건물이 있습니다.
염의서원(廉義書院)은 조선 숙종 11년(1685) 창건되어 순조 4년(1804)에 사액(賜額)된 서원으로서 고종5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되었다가 1920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한림사(翰林祠), 유허비각(遺墟碑閣), 어필각(御筆閣), 내삼문, 외삼문, 경부당, 원직사, 전사재 등의 건물이 남아 있습니다.
배향공간인 한림사에는 이곳 출신인 문창후 최치원(文昌侯 崔致遠), 문충공 고경(文忠公 高慶), 문영공 고용현(文英公 高用賢) 등 세 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유허비각에는 1915년 봄에 세워진 고경, 고용현 선생의 유허비가 있으며 어필각에는 1908년 순종황제의 친필인 어필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임피, 고려시대 이후 금강 하류의 중심지
임피는 삼국시대만 하더라도 군산 일대 전역을 관장했던 읍치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금강 하류의 중심 조창이 설치되어 번성을 누렸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가까운 내륙에 위치한 익산이 철도의 중심지가 되어 도시로 성장하였고 더 나아가서 쌀 수탈을 위해 전주에서 군산까지 포장된 신작로가 건설되면서 임피는 교통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나게 되고 그 입지적 기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 이후 계속해서 퇴락을 거듭하여 지금은 작은 시골마을이 되어버렸고 그 옛터에는 읍치의 흔적을 보여주는 향교, 이방청 건물과 관아 앞에 놓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공덕비들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노성당(老星堂)은 임피의 유생들이 역대 수령들의 위패를 배향하고 1년에 한 차례씩 제사를 지내고 함께 모여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겼던 곳입니다.
또한 이방청(吏房廳)의 역할도 하여 임피 장날을 정하고 물가를 형성해 주는 사람(말쟁이)을 지정해 주었으며, 대야면 복희리 신창마을에 있는 신창진(사챙이나루터)의 입, 출항하는 각종 선박을 통제하기도 했습니다. 또 무당(巫堂)의 자격과 생활 지역을 정하여 주기도 하고 또한 웃어른에게 불효하는 사람을 불러다가 곤장을 치거나 북치고 조리돌림을 하던 곳으로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는 경찰관 주재소로 사용되어 오다가 1945년 이후 적산(敵産)으로 불하되어 임피의 유지 이동석(李東錫)이 매입, 노인회에 기증하여 지금은 경로당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건물은 평지에 약간 남, 동향으로 배치된 정면 6칸,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평면은 일(一)자 형식인데 중앙의 대청과 서쪽에는 툇마루와 벽장이 있는 1칸 온돌방, 동쪽에는 툇마루와 골방이 딸린 2칸 온돌방이 있습니다.
‘崇禎紀元後四乙卯四月初八日卯時開基五月初六日未時竪柱同月初九日卯時上樑’이라는 묵서명(墨書銘)으로 미루어 보아 이 건물은 1855년(철종 6)에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공간 구조와 외관이 단순하나 기둥과 보, 도리, 창방, 추녀 등 주요 부재의 단면이 넉넉하게 사용되어 견실한 맛이 있고 세부에서도 전통건축의 법식이 잘 지켜져 있으므로 19세기 관아 건축 가운데에서도 우수한 건물에 속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피향교는 1403년(태종3) 현 경산리 교동인 대정동에 창건되었다가 1630년(인조8)에 서미곡으로 이건되었으며 1710년(숙종 36)에는 현재의 위치인 장유동으로 다시 옮겨 세웠습니다. 조선 후기의 소규모 향교 형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대성전은 공포의 양식이나 초석 등에서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어 건축사적으로 연구할 부분이 많은 건물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동국사(東國寺)는 한국 유일의 일본식 사찰
군산에는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근대건축물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동국사(東國寺)는 군산시 금광동에 남아있는 한국 유일의 일본식 사찰로, 1913년 일제강점기에 일본인 승려 우치다(內田)가 일본에서 모든 건축자재를 들여와 창건하여 ‘금강사(錦江寺)’라고 하였으나 광복 후 김남곡 스님이 동국사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한국의 전통사찰과는 다른 양식을 띤 대웅전, 요사채, 종각 등이 남아 있습니다.
대웅전은 요사채와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팔작지붕 홑처마 형식의 일본 에도(江戶) 시대의 건축양식을 띠고 있으며 외벽에 많은 창문이 있고 장식 없는 처마가 특이합니다. 석가삼존상 및 복장유물은 1650년이라는 조성시기, 조성주체, 조성에 소요된 시주물목과 시주자 등이 조성발원문에 명확히 기록되어 있어 복장의식, 사원경제사, 조선후기 불상 연구에 기준이 되는 기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특히 대웅전의 소조석가여래삼존상은 17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불상으로 조각 승(僧) 응매(應梅)의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으로, 해방 후 김남곡 스님이 주지일 때 금산사 대장전에서 옮겨온 것이라 합니다. 이 불상의 조성불사에는 조선후기 불교계를 대표하는 호연태호(浩然太湖)와 벽암각성(碧巖覺性)이 증명법사로 참여하였고 천여 명이 넘는 시주자(施主者)들이 동참하였음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2012년 세워진 참사문비(懺謝文碑)는 일본의 ‘동국사를 지원하는 모임’에서 모든 비용을 지불하여 세운 것인데 그 내용은 “석가모니 세존의 법맥을 잇는 것을 목표로 삼은 우리 종문은 여러 아시아 민족 침략전쟁에 대해 성스러운 전쟁이라 긍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며 “특히 한반도에서 일본은 명성황후 시해라는 폭거를 범했으며, 조선을 종속시키려 했다. 조동종은 그 첨병이 돼 한민족의 일본 동화를 획책하고 황민화 정책을 추진하는 담당자가 됐다”고 하며 스스로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군산시 신흥동 ‘히로쓰가옥’은 일제 강점기 포목상으로 임피 부근에서 농장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한 일본인 히로쓰가 지은 전형적인 일본식 가옥입니다. 건물의 형태는 근세일본 무가(武家)의 고급주택 양식을 띄고 있으며 목조2층주택으로, 지붕과 외벽 마감, 내부, 일본식 정원 등이 건립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건축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해방 후 적산가옥이 된 이 집은 당시 호남제분의 이용구 사장 명의로 넘어가서 지금까지 한국제분의 소유로 되어 있으며 영화 <장군의 아들>과 <타짜>의 촬영장소로도 유명해졌습니다.
군산시 임피면 술산리에 있는 임피역사(驛舍)는 1936년경 군산선의 철도역사로 세워진 건물로서 당시 농촌지역 소규모 간이역사의 전형적 건축형식과 기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원형 또한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건축적, 철도사적 가치가 높은 건물입니다. 본래는 임피면 읍내리에 세웠어야 하는데 읍내리의 유림(儒林)들이 풍수지리적 이유로 반대하여 철로가 술산리로 경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일본18은행은 일본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고 있던 은행으로 군산에는 1907년에 설립되어 조선에서 일곱 번째 지점이 되었으며, 일본으로 미곡을 반출하고 토지를 강매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금융기관이었습니다.
초기에는 대부업(貸付業)을 통해 일본인들에게 싼 이자로 돈을 빌려주고 일본인들은 이 돈으로 조선인에게 토지를 담보로 한 고리대금업을 하여 우리 농민들의 농토를 많이 갈취하였습니다. 지금은 군산근대미술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구조선은행은 1923년에 일제의 식민지정책의 총본산이었던 조선은행의 군산지점으로 건립되었고 설계자는 일본인 건축가인 나카무라 요시헤이(中村與資平)이며 일제강점기 군산을 배경으로 한 채만식(蔡萬植)의 소설 <탁류>에 등장하기도 하는데 군산의 근대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건물입니다.
해망굴은 월명산 북쪽 끝에 있는 해망령을 관통하는, 길이가 131m, 높이 4.5m인 반원형의 터널로 1926년에 시작된 제3차 축항공사 때 화물하차장 확대, 부잔교 추가 설치, 창고건설 등과 함께 군산 내항과 시내를 연결하기 위하여 만들었습니다. 곡창지대인 호남에서 생산된 쌀이 기차나 도로를 통하여 군산으로 모이고 다시 항구에서 배에 실려 일본으로 가는 운송과정에서 시내에 모인 물자를 보다 빠르고 편하게 항구로 나르기 위해서였습니다.
다양한 일제 건물유적, 많은 영화·드라마의 촬영지
이영춘가옥(李永春家屋)은 일제 강점기 군산에서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던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가 지은 별장주택입니다. 봄철과 추수철에 농장을 방문할 때 임시 거처로 사용되던 별장으로 서구식, 한식, 일식의 여러 건축양식이 절충된 다양한 양식적 특성을 보여줍니다. 해방 후 우리나라 농촌보건위생의 선구자 이영춘 박사가 거주하면서 이영춘가옥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나 평양고보 사법과 시절 담임선생이던 경성제대 와다나베 교수의 소개로 구마모토농장에 소속된 2만여 명 소작농 가족을 돌보기 위해 1935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자혜의원 원장으로 부임하는데 그는 우리나라 최초로 양호교사제와 의료보험조합을 실시하였습니다.
이영춘가옥은 건물 외관이 아름다워 <빙점> <모래시계> <야인시대> 등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구군산세관은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의 하나로 대한제국의 자금으로 시작된 제1차 군산항 축항공사기간(1905~1910) 중인 1908년(순종2) 6월에 만들어졌으며 많은 부속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헐리고 본관 건물만이 남아 호남관세전시관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건물의 지붕은 고딕 양식이고 창문은 로마네스크 양식이며 현관의 처마를 끄집어낸 것은 영국의 건축양식으로, 전체적으로 유럽의 건축양식을 융합한 근세일본 건축의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고로 국내에 현존하는 서양고전주의 3대 건축물은 구군산세관 본관, 한국은행 본점, 구 서울역사입니다.
현재 발산초교 자리에 농장을 만들었던 시마타니는 일본에서 주조업(酒造業)으로 재산을 모은 후 일본 청주의 원료인 값싼 쌀을 찾아 군산에 와서 1903년 당시 돈 7만원으로 발산리 인근의 토지를 매입하면서 농장을 만들기 시작하여 1909년이 되자 임피 외에도 2개면에 486정보의 농지를 소유한 대농장주가 됩니다.
시마타니의 집과 농장이 있던 발산초등학교에는 충청남도와 전라남북도에서 옮겨진 석조 유물 총 31기가 남아 있는데 이중에 특히 완주군 고산면 삼기리 봉림사지에 있었던 석등과 석탑은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물급의 우수한 문화재입니다.
발산리석등(鉢山里石燈)은 고려시대 작품으로 하대석에는 8장의 복련이 새겨져 있고, 간주석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웃고 있는 용의 모습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처럼 석등의 기둥에 용이 새겨진 것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일제 강점기에 시마타니가 반출하여 이곳에 갖다 놓았으며 지대석은 전북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발산리5층석탑(鉢山里五層石塔)은 2층 기단, 5층의 탑신(塔身), 정상에 상륜부(相輪部)를 장식한 일반형 석탑으로 탑신부의 경쾌함과 안정감 등으로 보아 신라석탑의 계통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백제석탑의 잘 다듬어진 아름다움을 이어받은 듯한 느낌을 주는 고려전기의 석탑으로 추정되며 이 또한 일제 강점기에 시마타니가 반출하여 이곳에 갖다 놓았습니다.
시마타니금고는 1920년대에 지은 금고용 건물로 시마타니가 수집한 골동품을 보관하던 장소입니다. 반 지하인 1층과 지상 2층으로 이어진 3층까지 하나의 구조물인 일체형으로 만들고 내부의 각층은 나무마루로 구분되어 있으며 외부로 통하는 창문에는 쇠창살을 치고 그 바깥쪽으로 철문을 달아놓아 2중의 방범장치가 되어 있습니다.
금고의 1층에 해당하는 반 지하에는 옷감과 음식들이 있었으며, 2층에는 농장의 중요서류와 현금이 있었고, 3층에는 한국의 고미술품이 다수 소장되어 있었다고 하나 3층의 고미술품은 미군정기에 미군이 모두 압수해 갔다고 합니다.
이날 준비물은 다음과 같습니다.
걷기 편한 차림(풀숲에선 필히 긴 바지), 모자, 선글라스, 장갑, 무릎보호대, 식수, 윈드재킷, 우비, 따뜻한 여벌옷, 간식, 자외선차단제, 필기도구 등(기본상비약은 준비됨)
▷11월 고을학교 참가비는 10만원입니다.(강의비, 2회 식사 겸 뒤풀이, 관람료, 운영비 등 포함).
▷참가신청과 문의는 홈페이지 www.huschool.com 이메일 master@huschool.com 으로 해주십시오. 전화 문의(050-5609-5609)는 월∼금요일 09:00∼18:00시를 이용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공휴일 제외).
▷참가신청 하신 후 참가비를 완납하시면 참가접수가 완료되었다는 문자메시지를 보내드립니다. 회원 아니신 분은 회원 가입을 먼저 해주십시오(▶회원가입 바로가기). ▶참가신청 바로가기
▷고을학교 카페 http://cafe.naver.com/goeulschool 에도 꼭 놀러오세요. 고을학교는 생활 속의 인문학 체험공동체인 인문학습원(대표 이근성)이 지원합니다.
최연 교장선생님은 우리의 ‘삶의 터전’인 고을들을 두루 찾아 다녔습니다. ‘공동체 문화’에 관심을 갖고 많은 시간 방방곡곡을 휘젓고 다니다가 비로소 ‘산’과 ‘마을’과 ‘사찰’에서 공동체 문화의 원형을 찾아보려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최근 지자체에서 시행하고 있는 <마을만들기 사업>의 컨설팅도 하고 문화유산에 대한 ‘스토리텔링’ 작업도 하고 있으며 지자체, 시민사회단체, 기업 등에서 인문역사기행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또 최근에는 에스비에스 티브의 <물은 생명이다> 프로그램에서 ‘마을의 도랑살리기 사업’ 리포터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서울학교 교장선생님도 맡고 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고을학교를 열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전통적인 사유방식에 따르면 세상 만물이 이루어진 모습을 하늘[天]과, 땅[地]과, 사람[人]의 유기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때 맞춰 햇볕과 비와 바람을 내려주고[天時], 땅은 하늘이 내려준 기운으로 스스로 자양분을 만들어 인간을 비롯한 땅에 기대어 사는 ‘뭇 생명’들의 삶을 이롭게 하고[地利], 하늘과 땅이 베푼 풍요로운 ‘삶의 터전’에서 인간은 함께 일하고, 서로 나누고, 더불어 즐기며, 화목하게[人和] 살아간다고 보았습니다.
이렇듯 인간이 함께 살아가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땅은 크게 보아 산(山)과 강(江)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두 산줄기 사이로 물길 하나 있고, 두 물길 사이로 산줄기 하나 있듯이, 산과 강은 영원히 함께 할 수밖에 없는 맞물린 역상(逆像)관계이며 또한 상생(相生)관계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을 산과 강을 합쳐 강산(江山), 산천(山川) 또는 산하(山河)라고 부릅니다.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라는 <산경표(山經表)>의 명제에 따르면 산줄기는 물길의 울타리며 물길은 두 산줄기의 중심에 위치하게 됩니다.
두 산줄기가 만나는 곳에서 발원한 물길은 그 두 산줄기가 에워싼 곳으로만 흘러가기 때문에 그 물줄기를 같은 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라는 뜻으로 동(洞)자를 사용하여 동천(洞天)이라 하며 달리 동천(洞川), 동문(洞門)으로도 부릅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산줄기에 기대고 물길에 안기어[背山臨水] 삶의 터전인 ‘마을’을 이루며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을’에서 볼 때 산줄기는 울타리며 경계인데 물길은 마당이며 중심입니다. 산줄기는 마을의 안쪽과 바깥쪽을 나누는데 물길은 마을 안의 이쪽저쪽을 나눕니다. 마을사람들은 산이 건너지 못하는 물길의 이쪽저쪽은 나루[津]로 건너고 물이 넘지 못하는 산줄기의 안쪽과 바깥쪽은 고개[嶺]로 넘습니다. 그래서 나루와 고개는 마을사람들의 소통의 장(場)인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향하는 희망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마을’은 자연부락으로서 예로부터 ‘말’이라고 줄여서 친근하게 ‘양지말’ ‘안말’ ‘샛터말’ ‘동녘말’로 불려오다가 이제는 모두 한자말로 바뀌어 ‘양촌(陽村)’ ‘내촌(內村)’ ‘신촌(新村)’ ‘동촌(東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렇듯 작은 물줄기[洞天]에 기댄 자연부락으로서의 삶의 터전을 ‘마을’이라 하고 여러 마을들을 합쳐서 보다 넓은 삶의 터전을 이룬 것을 ‘고을’이라 하며 고을은 마을의 작은 물줄기들이 모여서 이루는 큰 물줄기[流域]에 기대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을들이 합쳐져 고을로 되는 과정이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방편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을’은 토착사회에 중앙권력이 만나는 중심지이자 그 관할구역이 된 셈으로 ‘마을’이 자연부락으로서의 향촌(鄕村)사회라면 ‘고을’은 중앙권력의 구조에 편입되어 권력을 대행하는 관치거점(官治據點)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고을에는 권력을 행사하는 치소(治所)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이를 읍치(邑治)라 하고 이곳에는 각종 관청과 부속 건물, 여러 종류의 제사(祭祀)시설, 국가교육시설인 향교, 유통 마당으로서의 장시(場市) 등이 들어서며 방어 목적으로 읍성으로 둘러싸여 있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았습니다.
읍성(邑城) 안에서 가장 좋은 자리는 통치기구들이 들어서게 되는데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중앙에서 내려오는 사신들의 숙소로 사용되는 객사, 국왕의 실질적인 대행자인 수령의 집무처 정청(正廳)과 관사인 내아(內衙), 수령을 보좌하는 향리의 이청(吏廳), 그리고 군교의 무청(武廳)이 그 역할의 중요한 순서에 따라 차례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의 교통상황은 도로가 좁고 험난하며, 교통수단 또한 발달하지 못한 상태여서 여러 고을들이 도로의 교차점과 나루터 등에 자리 잡았으며 대개 백리길 안팎의 하루 걸음 거리 안에 흩어져 있는 마을들을 한데 묶는 지역도로망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고을이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한 관계로 물류가 유통되는 교환경제의 거점이 되기도 하였는데 고을마다 한두 군데 열리던 장시(場市)가 바로 그러한 역할을 하였으며 이러한 장시의 전통은 지금까지 ‘5일장(五日場)’ 이라는 형식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의 왕래가 빈번하였던 교통중심지로서의 고을이었기에 대처(大處)로 넘나드는 고개 마루에는 객지생활의 무사함을 비는 성황당이 자리잡고 고을의 이쪽저쪽을 드나드는 나루터에는 잠시 다리쉼을 하며 막걸리 한 사발로 목을 축일 수 있는 주막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고을이 큰 물줄기에 안기어 있어 늘 치수(治水)가 걱정거리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물가에 제방을 쌓고 물이 고을에 넘쳐나는 것을 막았겠지만 우리 선조들은 물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숲을 이루어 물이 넘칠 때는 숲이 물을 삼키고 물이 모자랄 때는 삼킨 물을 다시 내뱉는 자연의 순리를 활용하였습니다.
이러한 숲을 ‘마을숲[林藪]’이라 하며 단지 치수뿐만 아니라 세시풍속의 여러 가지 놀이와 행사도 하고, 마을의 중요한 일들에 대해 마을 회의를 하던 곳이기도 한, 마을 공동체의 소통의 광장이었습니다. 함양의 상림(上林)이 제일 오래된 마을숲으로서 신라시대 그곳의 수령으로 부임한 최치원이 조성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중앙집권적 통치기반인 군현제(郡縣制)가 확립되고 생활공간이 크게 보아 도읍[都], 고을[邑], 마을[村]로 구성되었습니다.
고을[郡縣]의 규모는 조선 초기에는 5개의 호(戶)로 통(統)을 구성하고 다시 5개의 통(統)으로 리(里)를 구성하고 3~4개의 리(里)로 면(面)을 구성한다고 되어 있으나 조선 중기에 와서는 5가(家)를 1통(統)으로 하고 10통을 1리(里)로 하며 10리를 묶어 향(鄕, 面과 같음)이라 한다고 했으니 호구(戶口)의 늘어남을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군현제에 따라 달리 불렀던 목(牧), 주(州), 대도호부(大都護府), 도호부(都護府), 군(郡), 현(縣) 등 지방의 행정기구 전부를 총칭하여 군현(郡縣)이라 하고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 현령(縣令), 현감(縣監) 등의 호칭도 총칭하여 수령이라 부르게 한 것입니다. 수령(守令)이라는 글자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고을의 수령은 스스로 우두머리[首領]가 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명령[令]이 지켜질 수 있도록[守] 노력하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삶의 터전’으로서의 고을을 찾아 나설 것입니다. 물론 고을의 전통적인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만 그나마 남아 있는 모습과 사라진 자취의 일부분을 상상력으로 보충하며 그 고을마다 지닌 역사적 향기를 음미해보며 그곳에서 대대로 뿌리박고 살아온 신산스런 삶들을 만나보려고 <고을학교>의 문을 엽니다. 찾는 고을마다 인문역사지리의 새로운 유람이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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