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야당과 '좌파'를 잡기 위해 어느 날 덫을 쳤다. 그런데 열어보니 친박계, 그리고 보수진영이 엉겨붙어 있다. 자충수(自充手)로 인한 자중지란(自中之亂)이다.
박 대통령의 친위 그룹(친박 강경파)으로 분류되는 새누리당 김태흠 의원은 26일 친박계 의원 모임인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주최한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왜 필요한가' 토론회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추진 중인 교육부의 대응을 두고 "미흡했다"고 평가하며 "교육부가 첫 대응을 잘못했으니 (황우여) 장관을 경질해 갈아 치워야 한다"고 과격한 주장을 내놓았다.
김 의원은 "처음에 올바른 교과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대명제로 본질적 문제를 앞에 내걸고 방법론적으로 검인정 강화냐, 국정화냐로 갔어야 한다"면서 "이후 검인정 강화는 (좌파의) 카르텔 때문에 어려우니 국정화로 가야 한다는 형태로 진행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전략이 잘못됐고,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황 장관을 자리에서 내쫒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특이한 점은 황 장관 역시 김 의원 못지않은 자타공인 친박이라는 점이다. 친박계 내부 역시 국정화 이슈 때문에 강경파와 온건파로 분화되고 있는 셈이다.
나아가 국정화 이슈가 계파를 막론하고 수도권과 영남권 등 지방 출신 의원 간 미묘한 갈등의 뇌관이 되고 있다는 관측도 조심스레 제기된다.
실제로 황 장관은 국정화에 거부감을 느끼는 여론이 높은 수도권(인천 연수구)을 지역구로 두고 있다. 국정화 이슈에 총대를 메긴 했지만, 수도권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황 장관의 미온적 태도에 대해 친박 강경파의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황 장관이 박 대통령의 의지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있다는 친박 친위 그룹의 불만도 읽힌다. 국정화에 비판적인 견해를 보인 적이 있는 김재춘 교육부 차관이 경질된 데 대해 '국정화를 강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머뭇대는 황 장관에 대한 청와대의 경고'라는 해석이 나오고 있는 것 역시, 이같은 기류와 무관치 않다.
황 장관이 박 대통령에게 찍힌 것 아니냐는 분석도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은 최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국무위원들에게 "모든 개인적 일정을 내려놓고 국가 경제와 개혁을 위해 매진해달라"고 당부해 왔다. 유승민 퇴출 파동 당시 박 대통령이 내놓은 논리도 "자기의 정치 철학과 정치적 논리에 정치를 이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박 대통령의 이같은 성향에 비춰보면 친박 친위 그룹에서 "황 장관이 자기 정치를 위해 대사를 소홀히 한다"는 인식을 드러낸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다.
김태흠 의원은 충청권이지만, '강경 친박'의 주류는 주로 영남권에 포진해 있다. 영남권은 보수색이 강해 차기 총선에서 새누리당 간판으로 낙선할 우려가 적은 곳이다. 그러나 주로 비박계인 수도권 의원들의 고민은 다르다. 이미 이재오, 정두언, 김용태 등 서울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의원들이 국정화를 중단하라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수도권 여론이 심상치 않음을 본능적으로 감지해냈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도권 친박'의 미온적인 태도까지 감지되고 있다. 친박 강경파의 불만은 2중으로 겹쳐 있는 셈이다.
대통령의 지지율 하락과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여론 악화 역시, "황우여 퇴진"까지 외친 친박 강경파들을 초조하게 만들고 있는 주요 원인이다.
코미디 같은 보수층의 분열…국정화 동력 '셀프 소진'
새누리당 뿐일까? 보수층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나고 있다. 야당으로부터 '극우 편을 든다'고 뭇매를 맞고 있는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에 대한 불신임도 제기되고 있다.
이날 국가경쟁력강화포럼이 주최한 토론회의 발제자로 나선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는 김정배 위원장을 향해 "현행 구조 하에서 (국정화 추진을 위한) 싸움을 지휘해 나가야 할 기반은 교육부와 국사편찬위원회다. 헌법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학부형들과 자녀들을 오염된 역사관에서 지켜나가기 위해 이런 싸움은 정당한 싸움이라고 국민들에게 알려야 하는데, 국편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빨리 정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권 교수는 '뉴라이트 교과서' 논란을 일으켰던 교학사 교과서의 대표 저자다.
권 교수는 "김정배 위원장이 (국정교과서) 집필진에 극우를 배제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을 배제하겠다고 했다"며 "이것은 국정화의 이름으로 좌편향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것 아닌가. 국편이 반역하겠다는 것이다. 가만 놔두어서는 안된다"는 주장까지 내놓았다.
보수 강경파가 같은 보수 진영에 속한 현직 국편위원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그 이유로 "좌편향" 우려를 들고 있는 것은 코미디에 가깝다. 김정배 위원장조차 강경 보수의 '사상 검증'을 넘어서기 힘든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가진 색안경의 힘은 매우 강력하다.
결국 자충수다. 정두언 의원은 이같은 현상을 '강경 보수의 전략적 실책'으로 분석했다. 정확한 진단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던진 '국정화의 덫'에 보수 진영 스스로 걸려든 모양새다. 특히 친박계 안의 내분, 보수 시민 사회 안의 내분은 분명 흥미로운 모습이다.
선거를 앞두고 결집하는 여권과 보수진영의 특성상 이같은 내분이 격화돼 내년 총선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은 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있다. 보수진영과 여권 내부의 국정화 동력이 점점 소진돼 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스스로 가둔 덫에 의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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