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덕을 밝힘(明明德)은 근본이요, 백성과 친함(親民)은 말단이다. 그래서 "사물에는 근본과 끝이 있다"1) 말했고, 또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수신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였다. 만약에 덕은 밝히지 않은 채 제 몸을 수양한다면 이는 근본은 어지럽힌 채 말단만을 추구하는 행사니, 어찌 가능한 일이겠는가! 사람들이 지극히 아끼는 바로는 제 몸 만한 것이 없다. 만약 덕을 밝히지 못한 채 수신한다면 중시해야 할 바가 경시되므로 모든 것이 중요해지지 않게 된다. 하지만 경시해도 될 것이 중요해지는 그런 이치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까닭에 "그런 경우는 있질 않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작금의 논자들은 명덕을 버리고 곧장 친민을 이야기하는데, 그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어찌 근본을 버리고 말단만을 도모하며 중시할 것은 경시하고 경시할 것은 중시하고 싶은 때문이 아니겠는가! 친민에 뜻을 둔 사람은 바로 명덕을 일삼아야 할 것이다! 나의 덕이 밝아진 연후라야 그 가진 바를 옮겨 천하에 명덕을 밝히게 되니, 대인2)이 자신을 완성하고 사물을 완성(成己成物)3)시키는 도는 응당 이와 같아야 한다. 친민한 다음이라야 나의 명덕을 밝힐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라 하겠다.
게다가 명덕이란 내가 본래부터 갖고 있는 바이므로 천하에 명덕을 밝힌다함은 또 사람에게 본래 없는 바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지극한 선에 머문다"(在止於至善)고 명시하여 말할 따름이었다. 선도 없고 악도 없는 이런 상태를 일러 '지선'이라 하니, 여기에 있어 멈출 바를 알게 되면 명덕을 밝히는 일도 아울러 마쳐지게 된다. 이로부터 그 남은 여력을 옮겨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게 하니, 친민 또한 어찌 수월해지지 않겠는가! 그래서 마지막 장에서까지 백성과 어떻게 친하라고는 말하지 않고 다만 명덕만을 이야기했으며, 덕을 어떻게 밝히라고는 더군다나 말하지 않고 그저 지선에 머물라고만 말하였다. 선이 어떻게 머문다고 말하지 않고 다만 멈출 곳을 알라고만 했으며, 멈춤은 어떻게 알게 된다고 말하지 않은 채 곧장 격물(格物)하여 그 앎에 도달하라고만 일렀을 뿐이다. 궁구하는 바는 어떤 사물인가? 도달해야 할 바는 무슨 앎이란 말인가? 원래 사물을 궁구하면 저절로 알아야 할 사물이 없어지고, 사물이 없어지면 앎 자체도 자연히 없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 멈출 곳을 알면 지식의 탐구 또한 멈춰지게 되니, 만약 지식 탐구가 아직 멈춰지지 않은 상태라면 이는 또 멈출 곳을 아직 모른다는 말이 된다. 그렇게 해서 자신이 모르는 바에서 멈출 줄을 안다면, 이것이야말로 앎에 도달한 치지(致知)가 된다. 내가 살피건대 〈대학〉이 이처럼 상세하게 계시했다지만, 덕이 쉽게 밝혀지지 않아 멈춰야 할 곳을 수월하게 알 수 없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이리하여 다시 찬4)을 지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사람이 멈출 곳을 알 수 있다면
항상 고요하고 항상 안정되리라.
지극히 고요하여 욕심이 없어지고,
만사가 편안하여 옮겨 다니지 않게 되고,
백 가지 생각이 하나로 모일 것이다."
지금의 논자들은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일을 스스로 반성함에 있어 과연 언제나 고요하고 항상 안정될 수 있는가? 지극히 고요하여 욕심이 없을 수 있는가? 편안하고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가? 백 가지 심려가 하나로 일치하는가? 이는 아직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찌 그리도 성급하게 멈출 곳을 알았다 내세우고, 명덕을 자임하면서, 대인(大人)의 친민하는 학문과 똑같아지려는 것이냐! 그렇다면 안회(顔回)는 죽을 때까지 배우길 좋아한다고 알려졌고 증자(曾子)는 종신토록 약속을 잘 지키기로 유명했으면서도 끝끝내 친민에 관해서는 입도 떼지 않았는데, 과연 이들 모두가 잘못이란 말인가! 과연 이들이 한쪽으로만 치우친 불완전한 학문을 했단 말인가!
세상에는 정녕 죽을 때까지 훌륭한 스승과 친구를 찾고 덕과 학식이 높은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도 멈춰야 할 곳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자 또한 부지기수이다. 하물며 단 하루도 선지식을 가까이한 적이 없는 주제에 스스로 선지식을 자임하고 나서다니, 이것이 가당키나 한 노릇인가!
해설
이번에 싣는 주약장에게 보내는 답신은 지난번보다 구체적인 문제를 다뤘다. 앞서 마력산에게 보낸 편지가 〈대학〉이라는 책의 전모를 밝히는 총론이라면, 이번 글은 명명덕과 친민, 지어지선의 의미와 상관관계에 대해 좀더 자세히 논의하고 있다. 이 글은 만력 14년(1586) 마성(麻城)에서 씌어졌으며, 편지의 수신인 주약장이 누구인지는 알려진 바 없다.
이지는 본문에서 명명덕이 지선(至善)으로 곧장 연결되는 것이며 친민은 가외의 곁가지임을 반복해서 밝힌다. 말뜻으로만 보면 명명덕은 개인적 수양의 영역이고 친민은 공익적 삶의 지향이다. 명덕을 밝혀 친민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둘의 비중은 비등하든지 아니면 친민이 좀 더 중요할 것 같은데, 이지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안회나 증자 같은 공자의 고제(高弟)들은 친민에는 눈도 돌리지 않은 채 호학(好學)으로 일관했다면서 오로지 수신의 중요성만을 강조할 뿐이다. 왜 그럴까? 우선 〈대학〉이라는 서물(書物)이 어떻게 위상을 정립해왔는지 그 역사부터 개관해보자.
유학은 한계상황에 부닥치면 늘 근원으로 돌아가 성찰한다는 태도를 견지해왔다. 그 끈질긴 생명력의 원천이기도 한데, 그래서 유학의 복고주의는 역설적이게도 늘 혁신과 통하는 낱말로 인식되곤 하였다. 그리고 〈대학〉은 항시 그 기폭제 역할을 하는 서적이었다.
〈대학〉은 본시 〈중용〉과 더불어 〈예기〉(禮記)의 제42편과 제31편으로 분류된 한 챕터(章)일 뿐이었다. 그런데 중당(中唐)에 이르러 한유(韓愈, 768~824)는 안사(安史)의 난 이후 불교와 도교에 경도된 사회 기풍을 바로잡고 분위기를 혁신시킬 방도를 모색하다가 도학(道學)의 원류로서 이 책의 가치를 새로이 발견하게 된다. "글이란 도를 담는 도구"(文以載道)임을 입증하고자 했던 그에게 〈대학〉은 더 이상 적절할 수 없는 담론을 제공하는 서책이었다. 그는 ‘원도’(原道)라는 글을 지어 도의 근원을 설명하는 한편 공부의 목표가 이 책 안에 들어 있음을 밝혔다.
송대에 이르러 정호(程顥, 호는 明道)와 정이(程頤, 호는 伊川) 형제는 〈대학〉을 〈예기〉로부터 독립시켜 〈중용〉, 〈논어〉, 〈맹자〉와 더불어 '사서'(四書)로 묶어 내놓았다. 당시는 왕안석이 신법(新法)을 내세워 국정을 농단하던 시절이었고, 이정(二程)은 전통과 정통유학의 가치를 고수한다는 입장이었다. 이천은 순일(純一)한 마음으로 이치를 궁구하라는 거경궁리(居敬窮理)를 주장하며 그 실천의 방법으로 사물을 연구해 앎을 명확히 한다는 격물치지(格物致知)를 내세웠다. 이 과정에서 그는 〈예기〉 속 '대학'은 순서가 뒤죽박죽이라고 여겨 순서를 다시 정하기도 하였다.
성리학을 집대성한 남송의 주희(朱熹)는 순서뿐만 아니라 〈대학〉 내용에 빠진 부분도 있다면서 해설에 해당하는 '전'(傳)의 다섯 번째 장에 격물치지를 설명하는 134자를 새로 써넣는 개작까지 감행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으로 새로 해설한 〈대학장구〉를 펴냈고, 그것도 부족해 문제점을 다시 파헤치고 설명해가는 〈대학혹문〉(大學或問)을 쓰기도 하였다.
당시의 주자학은 새로운 혁신이었다. 거듭되는 이민족의 침략과 대응의 실패로 나라의 사기와 자긍심이 땅에 떨어진 상태였는데, 주자는 이런 혼란을 극복하고 민족정기를 회복시키겠다는 취지에서 격물치지의 새로운 학문에 주목했다. 그가 〈대학〉 첫머리에 나오는 '친민'(親民)을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의 '신민'(新民)으로 고친 것도 현실을 바로잡기보다는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밖에 길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주자학은 모든 사물에 선의 이치가 담겼고 그것을 다 합친 것이 만물의 궁극적 이치라고 본다. 그래서 그러한 선의 이치가 내 안에 들어있는 도덕적 본성이란 뜻에서 "본성이 곧 이치"(性卽理)라고 했는데, 그 거점은 맹자의 성선설이었다. 곧 성선설을 엄밀하게 고수하며 명교윤리(名敎倫理)에 입각한 실천궁행(實踐窮行)을 요체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명대에 들어서자 상황이 또 달라졌다. 명을 개국한 태조 주원장은 금의위(錦衣衛)라는 특무기관을 두고 정보정치를 강화하는 한편 동창(東廠)을 설치해 환관들을 정치에 참여시켰는데, 그 폐해는 명대 내내 지속되면서 민심 이반의 주요인이 된다.
당시에 주자학은 관변 학문으로서 주류의 위치를 점했지만 명교의 근본은 이해하지 못한 채 지엽말단에만 매달려 세분화된 갈래를 실천하느라 에너지를 모두 고갈시키고 있었다. '이치'(理)를 찾아 공부만 하다 보니 허례허식이 늘어났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입신양명(立身揚名) 출세가 전부였다. 사리사욕을 추구하면서도 말끝마다 "천리를 보존하고 인간의 욕심을 배제한다"(存天理, 滅人欲)고 허세를 떠는 가식이 온 천하에 만연했다.
그래서 왕양명은 맹자를 뛰어넘어 곧장 공자에게로 갔다. 그는 〈예기〉에 들어있던 원래의 〈고본대학〉(古本大學)을 취해 주희의 개작을 비판한 〈대학문〉(大學問)을 짓고 공자는 성(性)을 어떻게 보았을지 궁구해보았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공자의 성은 지선(至善)이고 상대적 선악을 초월한 절대선으로, "선이 없고 악이 없는 그 상태가 바로 마음의 본체"(無善無惡心之體)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양명의 심체(心體)를 설명한 사구교(四句敎)5) 역시 〈대학문〉에 수록되어 있다.
양명의 무선무악은 선악의 구별에만 매달려 지엽말단을 전부로 착각하는 주자학의 폐단을 발본색원 일소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호연지기를 되살리고 사람들의 혼을 다시 갈아 넣음으로써 정말 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려는 간절한 염원이었다. 주자학이 유선유악(有善有惡)의 상대적 입장에서 세상을 바로잡으려 했다면, 양명학은 무선무악의 절대적 입장에서 세계를 바로세우려 한 것이다.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본래의 마음은 전체와 근원과 직관에 연결된 무선무악(無善無惡)이라는 것이 양명학의 기본 종지였다.
이지(1527~1602)가 주로 활동했던 만력(萬曆) 연간은 왕양명(1472~1528)이 살던 성화(成化)와 가정(嘉靖) 연간보다도 험악한 시절이었다. 표면적으론 평온했을지 몰라도 병통이 이미 골수에 사무친 제국은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며 종말을 향해 치닫는 중이었다. 중증의 환자는 극약 처방 아니면 살릴 수 없는 법이니, 이지는 무선무악의 절대선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선(至善)의 의미를 인지한 밝은 덕의 실현을 강조한 것은 죽었다 다시 살아나는 정도의 각성 없이는 세상을 바로잡을 길이 없다고 본 때문이었다. 주자학이 한평생 궁리에만 진력하다 망하는 꼴을 신물 나게 보던 참이라 본체를 회복하는 공부에 주력하라 이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명등도고록〉을 지어 〈대학〉의 정신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논한 것도 바로 망해가는 세상에 대한 위기의식의 발로였다.
이지는 주약장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내 안의 고유한 명덕을 밝혀 자신이 머물러야 할 곳을 알아낸 뒤 고요히 해야 할 바에 매진하라고 당부한다. 양명보다 훨씬 강한 어조로 수신의 목표가 지선에 있고 백성을 다스리는 친민은 부대사항일 뿐이라고 설파한다. 도의가 땅에 떨어지고 말세적 현상이 기승을 부리는 아수라판에서는 오직 지선(삶의 종착지)을 인지한 내 마음만이 공리주의와 속물주의를 물리치고 세상의 맑은 정기를 되살릴 수 있다고 여긴 때문이었다. 근본을 경시하는 자들이 친민에 나섰을 때의 해악이 너무나 절실하게 다가온 때문이기도 했다.
눈앞의 현실이 꽉 막힌 상태라면 우선 ‘나’라는 근원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면 해결이 의외로 간단하고 쉬울 수 있다. 내가 먼저 나다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다시금 〈대학〉을 집어 들고 그 뜻을 새길 필요가 있다.
각주
1) 여기 인용된 구절들은 모두 〈대학〉 첫째 장에 실린 것이다. 지난 연재에서 이미 제1장 전문을 게재한 바 있다.
2) 대인(大人) : 지위가 높은 사람, 즉 왕공귀족(王公貴族) 등을 가리킨다. 덕행이 고상하고 지취(志趣)가 높으며 원대한 이를 말하기도 한다.
3) 성기성물(成己成物) : 자신으로부터 비롯하여 사물에까지 이르는 것. 자신에게 성취가 있으면 자신 이외의 다른 모든 사물에도 성취가 있기를 희망하는 것을 말한다. 〈중용〉 제25장의 다음 문장에서 나왔다. "성이란 자신의 성을 완성하는 데만 그치지 않고 기타 만물의 성까지도 완성시키는 것이다. 자신의 성을 완성시키는 것은 '인'이고, 기타 만물의 성을 완성시키는 것은 '지'라고 한다. 인과 지는 하늘이 낸 덕성인데, 안으로 자신을 완성하는 도와 밖으로 사물을 완성시키는 도를 합치시킨다."(誠者, 非自成己而已也, 所以成物也. 成己, 仁也; 成物, 知也. 性之德也, 合內外之道也.)
4) 찬(贊) : 문체의 일종. 인물이나 사물을 찬미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는데, 대부분 운문으로 지어졌다.
5) 양명의 치양지(致良知) 철학을 요약한 칠언절구. "무선무악은 마음의 본체, 유선유악은 의념의 발동이다. 지선지악은 양지라 하고, 선을 행하고 악을 없애는 것은 격물이다."(無善無惡心之體, 有善有惡意之動. 知善知惡是良知, 爲善去惡是格物.) 여기서 양명은 선을 행하고 악을 제거하는 실천행위야말로 격물이라고 정의함으로써 치양지해야 격물하게 된다고 규정한다. 공부 순서를 격물치지가 아닌 치지격물로 바꿔버린 것이다. 양명이 귀양지인 용장에서 대나무를 보고 깨달았다는 용장오도(龍場悟道) 일화 역시 지식의 축적에 얽매이는 격물치지는 답이 될 수 없으니 치양지를 통해 스스로 밝은 지혜의 태양이 되라는 가르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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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한밭대학교 교수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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