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착상태는 공고화됐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비롯해, 산적한 현안 해결에 대한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은 박근혜 대통령이다. 그러나 이번 5자 회동으로 박 대통령에게는 문제 해결의 의지가 전혀 없다는 게 드러났다. 정국은 더욱 경색될 전망이다.
야당에 줄 어떠한 명분도 없다…독불장군 되겠다는 朴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김무성, 새정치민주연합 문재인 대표가 여야 원내대표를 대동하고 22일 모처럼 한 자리에서 만났지만, 흔한 합의문 하나 도출해 내지 못했다. 공동 브리핑도 없었다. 청와대와 여야가 각각 따로 회담 내용을 밝혔을 뿐이다. 3개의 이야기가 존재하는 회담이었다.
역사 교과서 국정화 이슈를 제외하면 사실상 경제 이슈에 대한 토론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담 시간은 1시간 48분. 박 대통령은 방미 성과를 설명하고, 6가지 현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러나 5명이 각자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 치중했을 뿐, 진지한 토론이 이뤄졌을 가능성은 매우 낮아 보인다.
청와대 김성우 홍보수석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날 회동에서 6가지 이슈를 제기했고, 그 중 4개를 경제 관련 이슈로 채웠다. 박 대통령은 오히려 '일 안하는 국회'를 부각시켰고, 노동 개혁 법안 처리, 경제 활성화 법안 처리, 한중FTA 비준안 처리, 내년 예산안 법정 시한내 처리를 강하게 압박 압박했다. 국회가 경제 활성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기존의 논리로, 야당의 경제 실정 비판에 맞불을 놓은 것이다.
유일하게 대화, 혹은 토론이 진행됐던 것으로 보이는 주제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이슈인데, 박 대통령은 "정치 문제로 변질되는 것이 안타깝다"며 "올바르고 자랑스러운 역사 교과서가 필요하다"고 했다.
문제를 촉발시킨 것은 박 대통령인데, '정치적 문제'로 변질된 것이 정치권 탓이라는 논리다. 특유의 '유체 이탈' 화법으로 문 대표가 "절벽같은 암담함"을 느꼈다는 것도 이해할 만 하다.
모두가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회동이었다. 정치적 승패를 따지는 것은 별 의미가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표면적으로 박 대통령의 승리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임기 2년 이상 남은 박 대통령은 임기가 다해 힘이 빠진 19대 국회를 상대로 일방적인 주문을 쏟아냈고, 현 경제 실정과 교과서 이념 논쟁을 정치권 탓으로 돌렸다.
그러나 우려된다. 박 대통령은 야당에게 어떠한 명분도 쥐어주지 않았다. 벼랑 끝으로 몰았다. '밀리면 끝이다'라는 박 대통령 특유의 사고방식이 작동한 것으로도 보인다. 예산안 처리, 노동법 개정, 국정 교과서 드라이브 등이 걸려 있는 올 연말 정국에서는 19대 국회 들어 최악의 상황들이 펼쳐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박 대통령에게는 한 번의 발언권이 더 있다. 오는 27일 국회에서 있을 예산안 시정 연설에 직접 나섬으로써, '일 안하는 국회'와 '일하는 대통령'을 대비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박 대통령은 여야 대표의 기선을 한꺼번에 제압했다. 그럴수록 박 대통령에게 씌워진 독불장군의 이미지는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다. 정치권, 특히 야권을 궁지에 몰아 넣고 박 대통령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을까.
靑 '기습 브리핑'에 문재인 메시지 희석…전략 없는 野
문재인 대표를 포함한 야당의 대응도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야당은 전략을 미리 노출시켰다. 회동이 이뤄지기 전부터 새정치민주연합 인사들은 '경제를 팽개치고 이념 싸움에 몰두하는 박 대통령의 모습을 부각시킨다'는 5자 회동 전략을 당당히 언론에 흘렸다.
실제 문 대표가 이날 미리 공개한 모두 발언의 주 내용은 "이렇게 경제가 어려운 시기에 왜 대통령께서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매달리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러나 청와대는 이를 노련하게 받아쳤다. 김성우 홍보수석은 회동이 끝난 후 약 40여 분만에 박 대통령의 발언을 브리핑했다. 이례적인 일이고 예정에도 없던 일이었다. 심지어 김 수석은 회동 자리에 배석하지도 않았다. 배석자인 이병기 비서실장과 현기환 정무수석이 전해준 메모를 급하게 브리핑했다.
청와대는 '기습 작전'으로 박 대통령의 메시지를 선명하게, 효과적으로 전달했고, 문 대표가 제기한 박 대통령 경제 실패 책임론을 희석시켰다.
전략을 노출시킨 야당은 정부가 추진하는 경제활성화 법안의 실체에 대해 제대로 반박하지도 못했다. 문재인 대표나 이종걸 원내대표가 '대통령에 맞서는 야당의 리더'라는 이미지만 부각시키는 데 지나치게 치중한 것 아니냐는 지적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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