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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배움의 길

[탁오서당] 속분서 권1 마력산에게(與馬歷山)

지난 주 연재는 〈명등도고록〉 상권 제4장에 관해서였다. 〈대학〉 첫머리에 나오는 지어지선(止於至善)과 격물(格物), 수신(修身) 등의 관계를 논한 글인데, 해설은 본문이 아니라 이지 특유의 글쓰기가 유래한 배경에 집중되었다. 정작 중요한 바에 대해 다루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았고, 그래서 이에 대한 보충으로 앞으로 두 차례에 걸쳐 명등도고록이 아닌 속분서와 분서에 실린 이지의 다른 편지글을 소개한다. 두 편 모두 〈대학〉의 첫 번째 장에 관한 해설이다.


속분서 권1 마력산에게(與馬歷山)


어제 가르침을 받은 〈대학〉 장구는 손님이 자리에 계셨던 관계로 미처 잘 생각해 대답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저는 〈대학〉이란 어른(大人)의 배움을 말한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태어나 여덟 살이 되면 부형·스승·선배의 가르침을 입어 소학1)을 배우게 됩니다. 이른바 인사하고 양보하고 나아가고 물러서는 예절이며 예의(禮)·음악(樂)·활쏘기(射)·수레 몰기(御)·글씨 쓰기(書)·산수(數) 같은 학문과 오늘날까지 백·천·만 년의 세월을 전해 내려온 선성후현(先聖後賢)의 격언이 전부 해당되는데, 그 모두는 아이들을 위해 강구해낸 배움에 불과하지요. 열다섯 살에 이르러 성인이 되면 대인의 학문을 하게 되니, 그때는 어떻게 다시 아이들과 똑같이 밤낮으로 어른들의 침방울 세례를 받는 일이 달갑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대학〉이란 책은 첫머리에서 대인의 학문을 설명하였습니다.


▲촌동요학도(村童閙學圖).시골 소학(小學)의 풍경을 담았다.


대인의 학문에서 그 도리는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은 원래 저마다 대원경지2)를 구비했으니, 이른바 나의 명덕(明德)이 바로 그것이지요. 이 명덕이란 위로는 하늘과 같고 아래로는 땅과 같으며 그 중간으로 수없이 많은 성인과 현인 같아서 천지와 성현에는 보탤 것이 없고 내게는 뺄 것이 없는 그런 존재입니다. 기왕에 더하고 뺄 것이 없다면 제아무리 성현을 떠나 그 품에 머물지 않고 대인의 학문을 사양하여 배우지 않으려 해도 그것은 불가능하지요. 그러나 공부하지 않는다면 명덕이 내게 있는 줄 알 수가 없고, 또 결국에 가선 평범한 우민(愚民)이 되고싶어하면서 자신이 그런 줄조차 모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덕을 밝힘에 있다"(在明明德)고 말하였지요. 대저 명덕을 명확하게 알고싶은 마음은 그것이 나 자신의 고유한 무엇이기 때문이니, 이는 〈대학〉에서 가장 첫 번째이자 또한 절실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특별히 첫머리에서 그 일을 언급하였지요.


하지만 나의 명덕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까요?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 실체는 비록 볼 수 없지만 사실상 집안과 나라와 천하 사이에 두루 충만하여 돌아다니는 중이라고요. 일상에 언제나 운행되고 있어 지극히 친밀하면서도 가까우니, 누가 거기서 떨어질 수 있겠습니까? 만약 즉각적으로 친민할 수 있어 나의 명덕을 밝히게 된다면, 나의 덕은 본래가 밝은 것이니 분명하게 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또 "백성과 친함에 있다"(在親民)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대저 도(道)는 하나인 것이고, 배움 역시 하나입니다. 이제 "명덕을 밝힘에 있다"고 말하더니 또 "백성과 친함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는 분명 두 가지 다른 일이지요. 사물인즉슨 저절로 본말이 있기 마련입니다. 백성과 친함으로써 나의 명덕을 밝히는 것이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지만 거기에는 당연히 한 가지 일로서의 끝과 시작이 있기 마련이지요. 세상만사 역시 저마다 그 일의 끝과 시작이 있습니다. 시작과 끝이 분별되면 본말이 드러나는데, 이는 두 가지 다른 일입니다. 도가 어떻게 둘일 수 있으며, 배움이 어찌 두 가지 다른 일일 수가 있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어떻게든 "지선의 경계에 드는 것"(在止於至善)은 우리가 마지막으로 귀착해야 할 바가 됩니다. 다만 사람들은 이 지선이 멈추는 곳을 쉽사리 알지 못하지요. 이러한 지선의 종착점을 알면 저절로 안정되고 고요하며 편안하고 생각이 깊어져 모든 일이 자연스럽게 제 자리를 찾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만약 지선이 머무는 곳을 안다면 명덕을 밝히는 자는 공허하거나 무용한 일을 하지 않게 되는데, 바로 명덕과 친민의 방법이 이미 다 그 안에 구비된 때문이지요. 친민하는 자는 쓸데없는 짓을 남발하여 아무 공훈도 없게 되진 않으니, 바로 백성과 친하고 덕을 밝히는 실질이 저절로 다 드러나는 까닭입니다. 만약 머물 곳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면 '명덕'은 공허하기 짝이 없는 잡학(雜學)이 되고 '친민'은 지리멸렬한 속물 학문이 되어 모두 그 본령을 잃어버리고 마니, 어찌 명덕과 친민이 별개의 일이 되는 것에만 그치겠습니까!


이런 까닭에 〈대학〉의 도는 결국 지선(至善)이 멈추는 곳에 귀착하니, 지선의 경계를 아는 것을 가장 큰 공덕으로 알고 그 경계에 도달하면 성과를 거뒀다고 말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배워도 평생 그 경계를 얻지 못하는 자는 또 그 경계가 어딘지 미처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인 거지요.


오호라! 지선의 경계를 아는 것은 명덕과 친민의 핵심이고 치지(致知)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노력이니, 이는 대인의 학문에서 지선의 경계를 아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스승·벗·부형과 더불어 그것을 토론하고 연구하다보면 삶에는 즐거움이 없고 죽더라도 고통이 없게 되지요. 수없이 많은 성인과 현인들이 어찌 여기서 벗어난 분들이겠습니까!


해설


속분서에 실린 이 편지는 이지가 제자이자 후원자인 마경륜(馬經綸)의 부친 마력산에게 보낸 것이다. 만력 29년(1601) 이지가 죽기 일년 전 북경 근처의 통주(通州)에서 씌어졌다.


바로 전해에 이지가 거처하던 호북성 마성(麻城)의 지불원(芝佛院)이 불타고 미리 마련해놓은 묘지까지 훼손되는 사건이 있었다. "중놈이 공공연히 음란을 선동한다"(僧尼宣淫)는 무고 때문에 지방 관원이 저지른 일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이지는 그곳을 떠나 전임 어사였던 마경륜의 집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거기서 전부터 교류하던 마력산의 부탁으로 〈대학〉의 요지를 설명해주었다. 만년의 무르익은 학문이 간명한 풀이로 드러나니, 가히 심입천출(深入淺出)의 경지였다.


이지는 우선 공부에는 소학과 대학이 있음을 밝힌다. 소학은 사람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교양인데, 여덟 살부터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익히는 공부를 말한다. 대체로 예절이나 도리,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의 습득을 일컫는다. 이에 상응하는 대학은 대인지학(大人之學)의 줄인 말로 "어른이 되는 공부"를 뜻한다. 공자는 〈논어〉'위정'(爲政)편에서 "나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학문에 뜻을 두게 되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고 말했는데, 바로 소학 아닌 대학을 알게 되었다는 고백이었다.


〈대학〉은 유학의 큰 틀을 제시한 공부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내용은 뜻밖에 간단해서 전문이라고 해봐야 1750여 글자에 불과하고, 공자의 말씀을 증자(曾子)가 직접 옮겨 적은 것이라 하여 주희(朱熹)가 다른 장과 구분해 '경'(經)으로 받든 제1장도 겨우 이백 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서술 역시 크게 삼 강령과 여덟 조목으로 나뉠 뿐이다. 주희는 이 책을 얼마나 중시했던지 〈대학장구〉를 쓰고 난 뒤 읽는 방법까지 덧붙이면서 적어도 하루에 한 번씩은 이 책을 읽으라고 요구했다. 반드시 〈대학〉을 이해한 다음이라야 다른 책도 진도가 나갈 수 있다고 하면서 공부하는 이의 필독서로 삼았다.


"큰 배움의 길은 명덕을 밝히고, 백성과 친하고, 지극한 선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고인(古人)이 했던 공부의 시작과 끝이 명명덕과 친민, 지어지선의 세 가지 강령으로 정리되었다. 유학을 수기치인(修己治人)의 학문이라 부르는 것도 명명덕과 친민이 수기·치인과 서로 조응하는 때문이었다.


이지가 불교용어 '대원경지'로 표현한 명명덕은 자신을 구명(究明)하고 자기를 바로잡는 것이다. 외부의 자극과 욕망 때문에 가려진 마음 속의 밝고 완전한 도덕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하늘로부터 주어진 본연의 마음은 반드시 되찾아야 하니, 그것은 어떤 무엇에 의해서도 제한되지 않는 완전한 나 자신, 자유의 선이기 때문이다.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는 명덕은 저마다의 내면에 고유한 무엇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공부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반해 친민은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삶의 현장이다. 실체가 드러나지 않던 명덕이 확인되는 자리로, 집안과 나라와 천하 등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장소가 그 무대가 된다. 이지는 세상에 두루 존재하여 돌아다니는 명덕이 친민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둘은 분리될 수 없다고 하였다. 둘 사이에는 본말이라는 차이에 따른 선후의 차서가 존재할 뿐이니, 서로 다른 일로 보아선 안 된다고 하였다. 어디서나 자신의 밝은 덕을 드러내 실천하면 그것이 친민이지만 친민의 본질은 명덕이니, 둘은 안팎의 관계라는 것이다.


내적 수양과 외부활동의 결과가 하나로 통일되면 그 다음은 이상적 세계인 지선(至善)으로 나아가게 된다. 명명덕에서 출발하여 친민으로 검증하고 치지(致知)의 노력을 통해 귀착하는 최종 목적지가 지어지선이란 것이다. 지선의 세계는 모두가 꿈꾸는 이상향이다. 그곳으로 나아간다는 목표는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이상사회의 달성이고 개인이라면 최고선을 완성한 성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경지에 도달한 이를 두고 우리는 '성인'(聖人)이라 부른다.


그러나 현재를 넘어 목표지점인 지선에 도달했더라도 그 자리에 머물기 위해선 끊임없는 치지, 즉 공부하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로부터 분리된 명덕은 겉돌기나 하는 공허한 잡학이 되고, 내면적 수양이 받쳐주지 않는 친민은 속물들의 위선적 치레로 전락하거나 혹은 더 위험한 도구로 쓰이게 될 뿐이다.


공자는 "오십이 되어서 천명을 알았다"(五十而知天命)(논어 '위정'편)고 했는데, 바로 지선의 경계에 이르렀다는 말이었다. 이지는 지선을 알기 위해 공부하다 보면 "삶에 즐거움이 없고 죽더라도 고통이 없어진다"고 묘사했는데, 곧 도를 깨쳐 생사의 고통에서 벗어나겠다는 간절한 마음의 표현이었다.


오늘날의 흔한 말로 풀이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명명덕은 나를 밝혀내는 일이니, 나는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이라고 말이다. 친민은 내 안의 선을 검증하는 것이니, 곧 내가 누구인지 확인받는 일이다. 사람은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서만 자기가 누구인지 더 분명히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은 오직 지선에 이르려는 치지(致知)의 노력에 의해서만 뒷받침된다는 것이 〈대학〉의 관점이었다.


▲북경 국자감 전경. 편액에 쓰인 벽옹(辟雍)은 고대 주(周)나라가 설치한 대학의 명칭인데, 이후로 최고 학부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가끔씩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질문하곤 한다. 적어도 15~16년째 학교를 다니고 있으니 투자한 시간만 봐도 결코 적게 배웠다고 할 수 없는데 지금 이 수준밖에 안 되는 자신이 너무나 놀랍지 않냐고 말이다. 기초교육은 옛날에도 그랬듯이 여덟 살부터 열다섯 살까지 행해지면 된다. 그 다음에는 어른 되는 공부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위로 올라갈수록 공부하는 이유를 단지 먹고 사는 한 방향으로만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것을 너무나 당연시한다.


우리 교육의 문제는 대개 외부로부터 온 것이지만, 그렇다 해도 결과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내가 뒤집어쓴다는 점에서 인생의 목표에 대한 자각과 설정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런데 "어른 되는 공부"가 부재하다 보니 배움에는 자발성이 없고, 성찰은 결여되었으며, 심원한 이상은 그저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날마다 넘쳐나는 세상의 험악한 문제들이 이런 상황과 아주 무관하진 않을 터이다.


사람은 하루를 살아도 그 이유를 알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공자는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闻道, 夕死可矣.)(〈논어〉'이인里仁'편)고 말하였다.


각주


1) 소학(小學) : 초등교육기관. 서주(西周) 시대부터 존재했으며, 명칭은 시대마다 일정치 않았다. 주희는 〈대학장구〉'서'(序)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람이 나서 여덟 살이 되면 왕공에서 서민의 자제에 이르기까지 모두 소학에 들어간다. 그들에게는 물을 뿌려 바닥을 쓸고, 손님을 응대하며, 나아가고 물러서는 예절, 예와 음악, 활쏘기와 말타기, 글씨와 산수 등의 교양을 가르쳤다. 열다섯 살이 되면 천자의 원자와 뭇 아들로부터 공경대부와 천자에게 속한 사의 적자, 평민의 뛰어난 인재가 〈대학〉에 들어가는데, 거기서는 궁리·정심·수기·치인의 도리를 가르쳤다."(人生八歲, 則自王公以下, 至於庶人之子弟, 皆入小學, 而敎之以灑掃·應對·進退之節, 禮樂·射御·書數之文; 及其十有五年,則自天子之元子·子,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


2) 대원경지(大圓鏡智): 불교에서 말하는 '네 가지 지혜'(四智)의 하나. 크고 둥근 거울 안에 온갖 상이 드러나듯 세계를 꿰뚫어 비추는 청정하고 진실한 지혜를 일컫는다. 줄여서 대원지(大圓智)라고도 한다.


▲북경 국자감의 정문 역할을 하는 패루(牌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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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대전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와 국립대만사범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지금은 대전의 한밭대학교 중국어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여기저기 다니며 하는 세상 구경을 좋아하다 보니 하버드 대학교 옌칭 연구소와 영국 런던 대학교(SOAS)에서 견문 넓힐 기회를 가졌고 중국 무한대학교 초빙교수를 지내기도 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싶어 여러 번 읽다가 포송령의 <요재지이>와 이탁오의 <분서>, <속분서> 같은 중국 고전을 우리말로 옮기기도 했다. 지행합일을 지향하는 자칭 개인주의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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