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우(57) 씨는 조선소 노동자다. 현대중공업 정규직이다. 1986년에 입사했다. 내년이면 일한 지 만 30년이 된다. 부산에서 생활하다 27세에 결혼했다.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했다. 일은 험해도 조선소에서 일하면 목돈을 쥘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울산 현대중공업에 입사한 이유다. 딱 5년만 열심히 일해 목돈을 모으고자 했다. 그리고는 다시 부산에 내려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계획은 계획으로만 남았다.
그 사이 자식이 자랐다. 1남 1녀를 두었다. 막내인 아들은 고등학교 졸업 후 2년제 전문대에 들어갔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아들 '스펙'으로는 비전이 보이지 않았다. 고민하다 졸업도 하기 전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아버지인 이 씨도 아들 생각을 하면 고민이 앞섰다. 일자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가방끈 긴 사람들도 취업난에 허덕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정규직인 자기와는 다른 시대를 사는 아들이었다.
군대 전역 후 집으로 돌아온 아들과 소주 한 잔을 기울였다. 조선소 비정규직으로 취업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어렵게 건넸다. "힘든 직업이지만 적응하기 나름"이라는 말도 보탰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느냐."
아버지는 조선소 정규직, 아들은 조선소 비정규직
이 씨가 생각할 때, 2년제 대학에 나와서는 답이 없었다. 남은 학기를 마치는 게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취업이 된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나마 현대중공업 하청 노동자로 일하다 보면 정규직으로 전환될 기회라도 있다고 생각했다. 이 씨가 아들에게 조선소 하청 취업을 제안한 이유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참 듣던 아들은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 뒤, 소주 한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조선소에 들어가 일하겠다"며 조선소 직업훈련원에 들어갔다. 제대한 지 20일 만이었다.
그렇게 아들은 스물두살 나이에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용접공으로 일했다. 성실하고 실력도 좋았다. 임금을 올려준다며 자기네로 오라는 제안도 여러 하청업체에서 받았다. 하지만 정규직 전환은 쉽지 않았다.
이 씨는 그런 아들이 대견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안쓰러웠다. 초등학교만 졸업한 아버지로서는 시대를 잘 타고난 것 말고는 아들에게 모든 게 부족했다. 하지만 자신은 정규직이고 아들은 비정규직이었다.
그 사이 아들은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결혼했고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그렇게 6년이 됐을 때였다. 일을 마치고 회사 사람들과 회식을 하던 중 딸에게 전화가 왔다.
"아버지, 동생 정욱이가 일하다 다쳐서 병원으로 실려 왔어요. 빨리 오세요."
급작스런운 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아들
급히 택시를 타고 아들이 누워있는 울산대학교병원으로 향했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수술하면 낫겠거니 싶었다. 병원에 도착하니 아들이 다니던 회사 대표를 비롯해 현대중공업노조 관계자들이 모여 있었다. 사태가 심각하다고 판단했다.
지난 9월 2일 밤 11시 10분께 현대중공업 4도크 2742호선 블록에서 작업하던 아들은 크레인에 실려 이동 중인 다른 블록에 부딪혀 12미터 아래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사고로 우측 두개골 골절 및 뇌출혈상을 당했다. 급히 뇌수술을 했으나 의식불명 상태가 됐다.
당시 상황을 종합해보면, 작업자들은 블록 작업을 마친 뒤, 블록을 크레인에 매달고 이동 중이었다. 하지만 균형이 어긋나 블록이 좌우로 흔들렸다. 그래서 다른 블록 위에서 작업을 하던 아들이 흔들리던 블록에 맞아 바닥으로 떨어지게 된 것.
신호수는 블록을 크레인으로 이동하기 전에는 블록 동선 주변에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고 있으면 대피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블록 안 인원만 확인하고 곧바로 블록 이동을 진행한 게 사고를 일으켰다.
오지 않는 아빠 그리워하는 손자 "아빠 어디 갔어?"
아들은 그 뒤 의식을 되찾지 못했다. 약물치료 등을 진행했으나 소용없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더구나 며느리 뱃속에 있는 셋째 손주 산달이 가까워져 왔다. 아니나 다를까. 아들이 의식불명이 된 다음날(4일) 셋째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축복받아야 마땅했지만, 온전히 축복받을 수는 없었다.
다섯 살 된 큰 손자는 연신 아빠를 찾았다. 한 번은 며느리가 아이를 데리러 어린이집을 가던 날이었다. 그날 따라 비가 많이 오자 아빠들이 차를 끌고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손자가 며느리에게 "아빠는 어디 갔어?"라며 시무룩해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며느리는 겨우 마음을 다잡았다.
"아들 맛있는 거 사주러 돈 벌러 갔어."
억장이 무너지고 가슴이 찢어졌다. 자신이 아들에게 조선소 취업을 제안한 게 이런 결과를 만든 게 아닌가 자책했다. 아들이 병상에 누워있는 내내 그러지 말았어야 했던 게 아닐까 끊임없이 반문했다.
결단을 내려야 했다. 더는 차도가 없었다. 그만 떠나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직 꽃도 못 핀 아들이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게 마음에 걸렸다. 떠나더라도 다른 이에게 희망을 주었으면 했다. 아들 장기를 기증하기로 했다. 나중에 손주들에게 "아빠는 죽은 게 아니라 어디선가 남에게 희망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떠나보낼 준비를 했고 아버지 이 씨는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여 만인 5일에서야 아들을 가슴에 묻었다. 공교롭게도 아들이 떠난 날은 이 씨 생일이었다. 앞으로 자기 생일상 대신 아들 제사상을 차려야 할 판이다. 경황이 없던 터라 이날이 미처 자기 생일인지도 몰랐다. 뒤늦게 알았지만 자기 생일 때문에 아들을 하루 더 붙잡는 게 무슨 의미인가 싶었다.
이 씨 "원청 나올 때까지 교섭 안 한다"
이 씨는 현재 △원청의 진정한 사과 △반복되는 안전문제 해결 △유가족 생활 책임 등을 요구하고 있다.
"내가 정규직 노동자지만 아들과 같은 하청노동자, 즉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나와 똑같이 일한다. 원‧하청을 떠나 노동자들은 모두 같은 노동자들이다. 하지만 회사는 원‧하청 등으로 나눠 노동자를 갈라치기 한다. 이것으로 사람 목숨의 가치도 구분하고 있다. 원청이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아들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씨는 현대중공업에서 이번 사태와 관련해 직접 교섭에 나오길 바란다. 원청에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이 문제는 지속해서 반복된다는 것. 이 씨는 원청인 현대중공업에서 협상에 참여하지 않으면 교섭 자체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씨는 "아들 사례가 원청인 현대중공업의 책임을 명확히 하는 선례가 되길 바란다"며 "그렇지 않으면 아들이 하늘에 가더라도 제대로 눈감지 못할 거 같다. 아버지로서 앞으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제껏 하청 노동자가 죽어도 원청에서는 결코 나선 적이 없다. 하청 노동자의 죽음은 자기들과 상관이 없다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하지만 이 씨는 단호하다. 그는 "아들의 죽음이 더는 반복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일은 모든 것을 다 할 것"이라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와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밝혔다.
"스위스로 가서 고인의 죽음 국제사회에 알릴 것"[인터뷰] 하창민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장프레시안 : 올해만 세 명의 노동자가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다 죽었다. 사태 해결을 위해 준비하는 게 있는가.하창민 : 7일부터 고인의 죽음 관련 △원청의 사과 및 재발 방지 △기획 폐업 중단 △하청노조 인정 등 3가지 요구를 걸고 끝장 투쟁을 진행할 계획이다. 하청 노동자의 죽음이 더는 생기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유가족도 함께하기로 했다.프레시안 : 현대중공업 대주주인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이 FIFA 회장에 출마한다. 실질적인 오너인 그가 현대중공업의 산재 사망사건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정치적 행보를 이어간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하창민 : 이번 죽음은 누가 보더라도 안타까운 죽음이다. 그런데도 회사 대주주라는 사람은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한다. 이는 인간이기를 포기했다고밖에 볼 수 없다. 그런 사람이 FIFA 회장으로 나서면서 개혁을 외친다는 게 어불성설이라고 생각한다.프레시안 : 관련해서 10월 18일 스위스로 건너가 정몽준 명예회장의 문제점을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다.하창민 : 우리는 그간 줄기차게 산재 사망사건 관련, 문제를 제기했으나 공허한 메아리로 되돌아왔다. 책임져야 하는 정몽준 명예회장이 책임지지 않고 '나 몰라라'하고 있다. 이에 국제사회에 이 문제를 물어보고자 한다. FIFA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이 이런 문제를 모른 척 한다는 게 맞는 일인지 묻고 싶다. 스위스에서 이번에 돌아가신 고인의 죽음도 알릴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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