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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누구 편일까?

[살림 이야기] 세상을 바꾸는 유연체조

<배틀로얄>과 <헝거게임>이란 영화의 배경은 암울한 미래, 하지만 멀지 않은 미래이고 그 사회는 살아남으려면 서로를, 때로는 동료를 죽여야 한다는 규칙을 구성원들에게 가르친다. 노골적인 폭력만큼 잔인한 규칙에 혀를 내두를지 모르나 사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르지 않다. 이대로 시간이 흘러가면 그 미래는 곧 현실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뭘 해야 할까? 또 뭘 할 수 있을까?

세상을 바꾸는 유연체조

사회가 위기다, 파국이다 하고 외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정해진 일상을 산다. 마치 규칙적으로 살기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나는 일상에서 벗어날 수 없고 그럴 생각조차 않으니 일상을 바꾸는 건 '외부인'이나 '외부세력'의 몫이 된다. 하지만 그런 외부가 나와 우리의 필요에 맞게 사회나 일상을 바꿔 줄 가능성은 낮고, 더구나 우리가 원하는 시기에 그런 외부가 등장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우주의 기운을 모을 수 있는 '그분'이라면 몰라도.

조금 더 현명한 해결책은 일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세력을 만들거나 지지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정당이나 시민단체, 협동조합과 같은 결사체들이 그런 세력들이다. 일상을 바꾸고 일시적인 변화를 사회구조의 변화로 확대하며 그걸 지속하려면 이런 결사체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세력들이 변화를 만들려면 그 내부가 민주적이어야 하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내부구조를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저런 명분과 당위성이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경우가 많아, 소위 진보세력의 일상은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처럼 끈적거린다.

이도 저도 아니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어디서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 제임스 C. 스콧은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김훈 옮김, 여름언덕 펴냄)에서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를 권한다. 체조법은 간단하다.

"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들을 매일 어기도록 하세요. 교통법규 위반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아닌지 자신의 머리를 사용해서 직접 판단해 보세요.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은 날렵하고 민첩한 정신 자세를 유지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언젠가 중요한 날이 오면 여러분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을 겁니다."

일상적으로 법을 어기라니, 이 무슨 황당한 제안인가? 범죄자가 되라는 건가?

그렇지만 법을 지키며 살아도 언제 범죄자로 몰릴지 모른다. 앞서 말한 영화 <배틀로얄>이나 <헝거게임>을 생각해 보라. 규칙을 강요하는 세상에 맞서는 사람들은 언제나 범죄자로 몰리고 언제라도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처지가 된다. 거칠게 말하자면 규칙을 깨는 범죄 없이 과연 우리의 일상이 바뀔까? 스콧은 과감하게 선언한다. "법률위반과 질서 교란이 민주적 정치 변화에 기여했다"고.

▲ 살아남기 위해 동료를 죽여야 하는 암울한 미래를 배경으로 한 영화 <헝거게임 : 모킹제이>의 한 장면. 수잔 콜린스 원작, 프랜시스 로렌스 감독, 2014년 개봉. 시리즈의 다음 편 <헝거게임 : 더 파이널>은 오는 11월 개봉 예정이다. ⓒ(주)누리픽쳐스

소리소문없이 함께 공모하는 범죄


그렇다고 해도 드러내 놓고 법을 어기는 건 너무 부담스럽지 않은가? 스콧이 제안하는 건 공공연한 투쟁이 아니라 '유연체조'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국경을 넘는 시민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은 병사들 중 일부는 조용히 총을 내려놓고 도망쳤다. 탈영이라는 소극적인 저항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드러내 놓고 하는 것보다 "소리소문없이 익명으로, 종종 공모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법규 위반과 불순종은 공개적으로 도전하고 저항했다간 너무나 큰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했던 농민과 하위계급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선호해 왔던 정치적 행위양식"이었고, 이런 행동은 "공식적인 정치제도권 밖에 존재하는 이웃 사람들, 같은 직장 사람들, 식구들 같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엮어낸 비공식적이고 일시적인 네트워크에 의해 조직화된다". 함께 공모하는 범죄는 일상을 바꾸는 디딤돌이 된다.

드러내 놓고 맞서는 건 아니기에 큰 뉴스거리는 되지 않지만 이런 소소한 불법행위와 회피가 뭉쳐져 거대한 변화를 만든다고 스콧은 강조한다. 이런 활동이 사회 변화의 전부일 수는 없지만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는 것은 아니고, 일상을 고려한다면 연습 없이 이루어지는 변화는 불가능하다. 함께 삶을 조직하는 감각과 힘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 존재하기 위한 작은 요구들

개인과 사회의 경계는 흐릿하다. 우리는 개인들이 모여 결사체나 사회를 이룬다는 생각은 당연하게 받아들이지만 개인 속에서 결사체나 사회가 구성된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다. 그 방향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결사체나 사회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다. 미국대사의 쾌유를 빌며 부채춤을 추는 사람들에게서, 조직과 개인의 삶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서 한국사회를 엿볼 수 있다. 개인은 사회의 하위개념이 아니고 어느 누군가는 다른 사람에게, 어떤 존재는 다른 존재에게 하나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변화는 쉽지 않다. 우리의 일상이 견고한 건 비루해서가 아니다. 한 개인의 삶에 그 사회의 역사가 묻어나기에 손을 잡는 것도 손을 놓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렇게 촘촘하고 단단한 일상을 혼자 힘으로 빠져나오기는 어렵다. 그래서 만남이 필요하고, 그 만남이 일상을 바꾸는 사건을 일으키기도 한다.

염무웅의 산문집 <반걸음을 위한 현존의 요구>(삶창 펴냄)는 일상생활이 일정한 윤리성을 띠기에 "이 세계의 타락과 불의를 보고 그것들을 향해 부단히 시비 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미래에 대한 큰 확신 때문이 아니라 현존의 작은 요구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평범한 삶을 지탱하기조차 어려운 시대에는 나의 삶을 고집하는 것이 저항의 불씨를 피우기도 한다. 관건은 반걸음을 뗄 수 있을 만큼의 절실함이다.

우리는 누구의 편일까?

염무웅은 <자유의 역설>(삶창 펴냄)에서 "자신을 국가의 주권자로 의식하느냐, 아니면 국가의 압제와 수탈을 견디며 살아온 피해자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태도가 형성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염무웅은 제주 4.3항쟁을 다룬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창비 펴냄)을 예로 들며 "진압군의 편도 아니고 반란자의 편도 아니며, 오직 죽은 자들의 편, 다시 말하면 고향 사람들의 편"이기에 감동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

지금 우리는 누구의 편일까? 죽은 자들, 죽어가는 사람들, 우리가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과 함께 살 땅과 바다, 산과 강의 편이라고 말하는 시(詩와 侍)의 언어를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 현존의 요구는 더욱더 강렬해지지 않을까?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은 우리나라 대표 생협 한살림과 함께 '생명 존중, 인간 중심'의 정신을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살림은 1986년 서울 제기동에 쌀가게 '한살림농산'을 열면서 싹을 틔워, 1988년 협동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1989년 '한살림모임'을 결성하고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면서 생명의 세계관을 전파하기 시작했습니다. 한살림은 계간지 <모심과 살림>과 월간지 <살림이야기>를 통해 생명과 인간의 소중함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기 : <살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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