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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시장주의자 대통령의 독선적 역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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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시장주의자 대통령의 독선적 역습

[기자의 눈]'영어 만능론'에 드러난 '이명박식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이명박 당선인의 언행과 스타일에선 그가 가진 철학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다. 영어 올인 정책에 대한 사회적 우려를 '역주행'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해버린 게 단적이다.

자신의 정책에 대한 비판을 "반대를 위한 반대"로 치부하며 밀어붙이는 모습, 그 와중에 노출된 현실인식은 노무현 대통령을 위시한 현 집권세력이 한미 FTA 반대론을 '시대에 뒤떨어진 인식' 쯤으로 매도했던 것과 매우 흡사하다.

한반도 대운하, 영어 올인 등 논란이 되고 있는 '이명박표 정책'의 옳고 그름과는 별개로, 새정부 출범 전부터 '일방통행 밀어붙이기'에 대한 우려가 쏟아지는 건 대단히 심각한 문제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혹평 가운데 하나인 "김영삼 대통령의 장점인 결기와 김대중 대통령의 장점인 지성을 두루 이어받은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의 단점만 갖췄더라"는 말은 적어도 인수위 시절부터 나온 건 아니었다. 당선 한달여 만에 이 당선인에게 "실용주의와 추진력을 기대했건만 편견과 아집만 노출된다"는 평가가 나오는 건 '행태적 위기'의 먹구름이 분명해 보인다.

내가 하면 무조건 선(善)?
▲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 4일 오전 페리 전 미 국방장관 등 미국 '지한파' 인사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인수위 출범 이후 갖가지 논란이 벌어졌지만 초기의 뜨거운 감자는 단연 한반도 대운하였다. 당선인 비서실에서 5대 건설사를 불러모아 놓고 사업을 설명하고 당선인의 최측근인 이재오 의원은 "여러 의견을 수렴하겠지만 '반대'는 못 받아들인다. 한다는 것은 결정이 난 것이다"고 못을 박았다.

이 당선인이 비록 "민자를 투자해 공사를 할 기업들이 타당성을 판단할 것이지 우리가 뭐라고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고 진화해 놓은 상태이지만, 적어도 현재까지 이 당선인의 운하에 대한 의지를 의심하는 사람은 드물다.

이번엔 영어 올인 정책이 이명박식 국정운영의 예고편이 됐다. '영어 정국'에서 드러나는 이 당선인의 독선적 행태는 대운하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다. 영어교사 삼진 아웃제, 영어 이외의 과목도 영어로 가르치는 몰입교육, 영어 병역특례제 등 설익은 정책이 논란을 빚었고, '교회 간증'에 가까운 정책공청회에 대한 비판도 쏟아지고 있지만 이 당선인은 직접 방패막이를 자임했다.

31일 오전, 이경숙 위원장의 '굿 모닝' 인사를 받으며 인수위 간사단회의에 참석한 이 당선인의 영어사랑은 거침이 없었다. 그는 반대 의견을 '역주행' 등으로 규정하며 "반대를 위한 반대는 어쩔 수 없다", "따라가지 못해 반대한다"며 영어에 '몰입'하는 이경숙 위원장과 인수위에 힘을 실어줬다.

'우리의 정책이 곧 선(善)이고 반대세력은 개혁에 저항하는 세력이다'는 독선은 전날 이낙연 대통합민주신당 의원이 지적한대로 노무현 대통령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또한 "영어교육 문제가 정치쟁점화 되는 것은 반대한다"는 그의 말 속에는 '영어 올인 정책이 총선에도 도움 안 된다'는 식의 보수언론의 정치적 조언(?)마저도 접수하지 않겠다는 뜻이 역력했다.

'영어 만능론' 속의 '시장 만능론'

이는 이 당선인의 철학 혹은 현실인식과 닿아 있다. 그는 "서울 시장일 때 외국에 투자를 위해 한국어와 영어로 문서를 두 가지로 만들자 했는데, 당시 한글을 주장하는 모임에서 '대한민국이 한글의 나라지 영어의 나라'가 아니다고 반대를 했다"고 주장했다.

이 발언은 전날 한글 관련 학술단체와 일반 시민단체들이 인수위의 영어정책에 반발하고 나선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영어를 어느 정도 하느냐에 따라 외국에서는 개인의 소득의 차이가 난다. 비영어권의 나라에서 영어를 국민들이 통상적으로 잘 쓰는 나라들이 못 쓰는 나라보다 훨씬 더 잘 산다"며 이같이 말했다. 국어와 영어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경쟁력 차원에서 자신의 영어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는 뜻일 터이다.

영어실력을 높여서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것은 물론 좋은 일이므로 일리가 있지만, 이에 대해선 영어에 능통한 필리핀이나 인도가 과연 일본보다 더 잘 사는 나라냐는 반론이 있다. 국가 경쟁력이 영어만으로 달성되는 건 아니라는 지적이다.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중국이 세계경제를 이끄는 시대가 되면 중국어를 공용어로 채택할 것이냐"고 꼬집은 적도 있다.

더욱 큰 문제는 이 당선인이 자신의 '영어 만능론'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모르거나, 눈감아 버린다는 것이다. "영어를 못하면 못 사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인수위와 이 당선인은 자신들이 선두에서 이끄는 영어 정책이 학생들과 학부모를 어떤 방식으로 '시장'에 발가벗은 채로 서게 만드는지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이 대목에선 "우리 지역구 주민들은 수준이 높아서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타임즈를 매일 보기 때문에 장관이 보고를 똑바로 해야 한다"던 한나라당 의원의 모습과 이 당선인의 현실인식이 정확히 겹친다.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이 주재한 회의에서 육순에 가까운 동장이 벌벌 떨면서 영어 발표를 했다던 뉴스, "우리도 회의를 영어로 해야 하나"는 인수위원들의 이야기도 웃고 넘어갈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실용주의'가 아니라 '국격훼손'이다

이명박 당선인은 지난 달 말 버시바우 주한 미 대사를 만나 "유 아 베리 웰컴"이라고 인사했고, 보수 언론은 이를 '실용영어'라고 극찬했다. 정몽준 의원을 단장으로 한 대미특사단은 "다들 영어가 능통해서 미국 조야 인사들과 의사소통이 원활했고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고 자랑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공식언어를 지정해놓은 국제회의장도 아니고 사업 협상도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통령 당선인과 특사가 미국인 앞에서 보인 이같은 모습은 실용주의도 뭐도 아닌 '국격 훼손'일 따름이다. 박정희 정부 시절 정부와 국회의 '일본통'들이 요정에서 일본 육사 선배인 일본 정치인들보다 더 유창한 일본어로 일제 군가를 불러제끼며 관계를 돈독히 했다는 이야기와 오버랩되기도 한다.

이를 두고 오죽하면 총리 시절 '독선적'이라는 포격을 받은 이해찬 전 총리마저 이 당선인의 거침 없는 독주와 언론의 지원사격을 '파시즘적'이라고 혀를 찼을까 싶다.

"대한민국에서는 영어 좀 한다는 사람들,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 같은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문제가 아니였냐"는 발언으로 보수 진영의 맹공을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이 생각보다 이른 시일 내에 재평가를 받는다면 그건 오로지 이 당선인의 공일 테다. 자신의 당선에 크게 기여한데 대한 답례인지는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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