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낙청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신경숙 표절 의혹을 놓고서 두 번째 입장을 페이스북에 게재했다. 신경숙 씨가 '우국'을 표절했다고 단언하는 문단의 분위기에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다 명확하게 밝혔다. 그는 최근 문단의 논란을 두고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이라고 단언했다.
첫 입장 발표를 낸 후, 그를 비판한 문단, 언론, 독자를 겨냥한 재반박인 셈이다.
첫 입장 발표를 낸 후, 그를 비판한 문단, 언론, 독자를 겨냥한 재반박인 셈이다.
백 교수는 지난 페이스북 게시물에서 "문자적 유사성을 발견"했으나 "의도적인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 없다"는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 머리글에 찬성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후 특히 '문자적 유사성을 인정했으면 표절을 인정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등의 비판이 거셌다. (☞관련 기사 : 백낙청, "신경숙, 의도적 베껴쓰기 아니다")
백 교수는 8월 31일 페이스북 게시물을 통해 "예술 창작의 과정에서 모방, 차용 또는 도용의 결과를 마트에서 들고 나오는 고정된 물체처럼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과연 적절한가" 하고 되물으며 "일부러 베껴쓰지 않고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고 보는 문학관, 창작관에는 원론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렵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는 또 "더구나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저자의 파렴치한 베껴쓰기를 단정하고 거기다 신경숙은 원래가 형편없는 작가였다는 자의적 평가마저 곁들여 한국 문학에 어쨌든 (항상 좋은 작품만 써낸 건 아니지만) 소중한 기여를 해온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에는 결코 합류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는 "문학 담론에서건 사회 담론에서건 진실에 입각해야 긴 생명을 누릴 수 있다"며 "신경숙에 대한 표절 시비는 마치 베껴쓰기의 현장을 CCTV로 지켜본 듯한 고발로 출발했다"고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신경숙 표절 의혹은) 어디까지나 추론이요 추정"이라며 "그와 다른 모든 추정을 봉쇄하고 토론을 종결할 진실 자체는 아닌 것"이라고 단언했다.
백 교수는 자신의 지난 게시물에 대한 반응을 두고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인 것 같다"며 "그중 상당수는 단순히 불쾌감이나 실망감을 표시했고 또다른 상당수는 애당초 자신이 내렸던 단정적 판단에 제가 동의하지 않음에 분개하며 이미 너무도 익숙해진 주장을 되풀이하는 성격"이었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이번 사태에 대한 자신과 창비의 대응을 두고 "상업주의적 타락이나 노쇠한 권위주의 탓으로 규정하는 동료 평론가, 동업 편집자, 문학 교수 그리고 문학 담당 기자들이 적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달라고 부탁하고자 한다"고 끝맺었다.
다음은 백낙청 명예교수의 두 번째 입장 전문.
창비 계간지가 나올 때마다 페북을 통해 내용의 일부를 소개해왔습니다. 이번호의 경우 '책머리에'와 '긴급 기획'만 간략히 소개했는데 거기 덧붙인 저의 의견 때문에 기왕의 논란이 더욱 가열되면서 다른 내용을 소개할 겨를도 없었습니다.저의 먼젓번 글을 읽고 호의적인 반응을 표하신 분도 계셨습니다만 부정적인 반응이 압도적인 것 같습니다. 그중 상당수는 단순히 불쾌감이나 실망감을 표시했고 또다른 상당수는 애당초 자신이 내렸던 단정적 판단에 제가 동의하지 않음에 분개하며 이미 너무도 익숙해진 주장을 되풀이하는 성격이었습니다. 반면에 기존의 입장대로지만 자기 견해를 성의있게 정리하고 근거를 제시하는 비판도 있었습니다. 호의적 논평이나 적대적 감정의 표현에 일일이 답할 필요는 없겠습니다만, 진지한 비판에는 저나름의 추가 해명을 시도하는 게 도리겠지요.하지만 그 일은 잠시 뒤로 미루고 가을호 특집을 먼저 소개하겠습니다. 이번호는 비문학 분야 특집인데 '시대 전환의 징후를 읽는다'를 큰 제목으로 달았습니다. 국내 필자의 글 3꼭지와 중국 글의 번역 한개를 실었지요. 저는 이번 특집에도 다른 잡지가 별로 관심을 안 갖는 창비식 담론, 주류학계는 물론 세칭 진보학계에서도 외면하기 일쑤인 우리 나름의 문제의식을 담았다고 자부합니다.물론 우리가 항상 그 문제의식을 충분히 살리는 성과를 올려왔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이번 특집도 그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저의 과한 욕심인지 몰라도 좋은 글이라도 성에 안 차는 대목이 있곤 합니다. 독자 입장에서는 더 그러실지 모르지요.예컨대 김종엽 교수의 '87년 체제의 정치적 전환을 위해'는 오늘의 한국 사회를 포괄적이면서도 역사적으로 이해하는 틀로서 '87년 체제'와 함께 이른바 분단 체제 개념이 동원되고 있습니다. 주된 내용은 87년 체제의 말기 국면에 부쩍 두드러지는 '탈민주화'와 '국가 능력의 약화' 현상을 서로 연결시켜가며 구체적으로 분석한 것이지요. 분단 체제의 작용에 대한 명시적 언급도 나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한국 사회 분석과 서술의 과정을 시종 분단 체제의 작동 현상으로 인식하는 자세가 더 철저했으면 좋았겠다는 게 저의 욕심으로 남습니다.김연철 교수의 '거울 앞에서'는 '분단 체제와 북한의 변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습니다. 그간 북한 연구계는 북한을 '반국가단체' 또는 '미수복지역'으로 보는 관점을 넘어 좋든 싫든 그나름으로 하나의 국가요 사회라는 인식을 정립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해왔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분단 체제의 일익에 해당하는 분단 사회라는 인식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 점에서 김연철 교수의 글이 돋보이며, 지난 70년의 북한역사를 간결하고 평이하게 정리해낸 솜씨도 남다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도 분단 체제가 단순히 동서 냉전 체제의 산물이 아니라 여러가지 복합적 요인이 결합된 독특한 체제라는 인식이 한층 투철했으면 하는 욕심입니다. 예컨대 필자는 북한에서 동구와 같은 내적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을 '냉전 체제' 탓으로 돌리는데(49면), 이럴 때는 '분단 체제'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하고 일부 동구 사회주의국의 변화가 냉전 시대에 이미 일어났다는 반박에서 자유로워집니다. 물론 저자가 '냉전 체제'라 할 때는 '분단 체제라는 한반도형 냉전 체제'를 염두에 두었겠지만요.김동춘 교수의 '한국 사회 "대전환"의 길'은 지난 5월 제가 펴낸 대담집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 : 큰 적공을 위한 전문가 7인 인터뷰>에 대한 서평을 겸한 본격적인 논문입니다. 먼저 저는 대다수 사회과학자들이 분단 체제론을 아예 묵살하는 현실에서 평소부터 한국 사회 분석 작업에서 분단과 전쟁 및 준전시 상태를 빼놓지 않던 전문가가 이토록 성의있게 논평해준 데에 고마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과 저 개인에 대한 덕담도 많이 해주셨어요. (그렇다고 '문학 권력'에 영합할 분은 아닙니다.^^) 글의 후반부 3~4절로 가면 김 교수의 독자적 견해가 주로 나오고 저에 대한 명시적 또는 암시적 비판이 적지 않습니다. 제가 해온 작업 중 공백이나 허점을 많이 지적해주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 교수의 논지 중 많은 부분은 저하고 크게 다를 바 없는 이야기라고 느꼈어요. 앞부분에서 저의 분단 체제 개념을 비교적 자상하게 소개해주던 필자가 뒤로 가면 '분단-전쟁 체제'라는 자신의 한층 축소된 개념을 동원하면서 그것 외에 이것도 들어가고 저것도 들어가야 한다고, 저의 분단 체제론과 딱히 어긋난다고 할 수 없는 주장을 하신 것 같아요.한국에도 이미 소개된 중국의 사상가이자 '3농문제' 전문가 원톄쥔(溫鐵軍)과 그의 연구 팀이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책에 관해 내놓은 연구 성과가 네번째 꼭지입니다. 우리가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및 세계적 차원의 대전환을 모색할 때 깊이 참고함직한 글이라 믿습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구상과도 직결된 중국의 국가 전략이 나오게 된 배경과 미국이 지배하는 기존 질서에 비했을 때의 중국측 전략의 상대적 합리성 등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러나 제가 특히 감명깊게 읽은 것은 결론부분입니다. "자생적인 사회 정의 담론이 결핍된 상태에서 인프라 발전주의를 내세우는 한 중국은 서구의 자유민주주의 이데올로기에 도전할 수 없다."(97면) "말하자면, '일대일로' 그 자체는 영혼이 없다. 한층 깊고 두터운 사회 정의의 사상과 문화적 내용으로 그것을 채워가야 한다"(98면)는 것입니다.이런 사상적 탐구를 위해서도 특집에 뒤이어 실린 '대화'는 같이 읽어볼 만한 글입니다. '신실학'의 정립을 위해 폭넓은 연구를 해온 한학자 임형택 명예교수, 일본인으로서 한국에 정착하여 한국사를 연구해온 미야지마 히로시 성균관대 특임교수, 중국사 전공자이자 동아시아 지식인연대의 일선에서 활약해온 백영서 연세대 교수 등 세 분의 대화인데, 논평할 거리가 많습니다만 제 글이 너무 길어지므로 자제하겠습니다.신경숙 사태의 여파로, 창비가 분단 체제론을 포함해서 무슨 그럴싸한 이야기를 해도 이제는 믿음이 안 간다고 말씀하신 분도 계십니다. 또, 창비에 매우 호의적인 입장에서, 안할 말로 '꼬리 자르기'를 해서라도 신경숙의 표절을 재빨리 시인하고 사과하는 것이 창비가 추구하는 대의에 대한 설득력을 유지하는 데 이로울 텐데 왜 저러나 하고 안타까워하는 분도 적지 않습니다.그러나 문학 담론에서건 사회 담론에서건 진실에 입각해야 긴 생명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경숙의 해당 작품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습니다"(2~3면)라는 입장을 표명하고 앞으로 더 본격적인 논의를 시도하겠노라고 했던 것도 문학의 진실을 이제부터 제대로 탐구하고 토론해보자는 취지였습니다. 그런데 '책머리에'나 저의 페이스북 발언이나 짧은 지면에 주로 골자만 전달하다보니, 처음부터 적의를 갖고 대하지 않는 분들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반발하셨습니다. 문자적 유사성이 확인되었으면 베껴쓰기요 도둑질이지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복잡하냐, 마트에서 물건을 들고 나오다 들켰으면 본인이 자백하거나 CCTV에 훔치는 장면이 반드시 찍혔어야 도둑질이냐... 등등의 반론이 제기되었지요.하지만 예술 창작의 과정에서 모방, 차용 또는 도용의 결과를 마트에서 들고 나오는 고정된 물체처럼 생각하는 발상 자체가 과연 적절한가요? (이에 대해서는 윤지관 교수 외에도 장정일, 박민규 같은 작가들이 다른 견해를 이미 발표한 바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경숙에 대한 표절 시비는 마치 베껴쓰기의 현장을 CCTV로 지켜본 듯한-"자, 이제 눈을 감고 내가 말하는 장면을 각자의 머릿속에 그려보자...."(가을호 353면의 인용문)-고발로 출발했습니다. 이런 식의 상상을 통해 하나의 추론에 도달하는 것도 물론 당자의 자유입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추론이요 추정이지 그와 다른 모든 추정을 봉쇄하고 토론을 종결할 진실 자체는 아닌 것입니다.Onook Oh님이 언급하신 표절 소프트웨어도 학술 논문이 아닌 문학 작품의 경우에는 그대로 믿기 힘든 면이 있습니다. 말이란 원래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하는데, 말을 가장 섬세하고 정교하게 구사하는 언어예술인 문학에서는 소프트웨어를 돌려서 나오는 일치율보다 그러한 단어들이 작품 전체의 일부로 어떤 효과를 내고 의미를 구성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잡담 제하고 신경숙의 해당 대목이 의식적인 베껴쓰기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 질문에 답할 정확한 진실은 저도 모릅니다. 다만 두어가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먼저 신경숙의 변호인을 자임한 윤지관 씨도 "신경숙의 '전설'의 일부 문장들이 미시마 유끼오의 '우국'을 표절한 혐의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357면)고 했는데, 그 점마저 제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은 창비사의 1차 보도 자료는 명백히 잘못된 것이었고 회사 대표가 곧바로 사과했습니다.둘째로, 그렇다고 그것이 일부러 베껴쓰지 않고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라고 보는 문학관, 창작관에는 원론적으로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더구나 상상력까지 동원해서 저자의 파렴치한 베껴쓰기를 단정하고 거기다 신경숙은 원래가 형편없는 작가였다는 자의적 평가마저 곁들여 한국 문학에 어쨌든 (항상 좋은 작품만 써낸 건 아니지만) 소중한 기여를 해온 소설가를 매장하려는 움직임에는 결코 합류할 수 없습니다.끝으로 창비나 저의 이런 입장을 상업주의적 타락이나 노쇠한 권위주의 탓으로 규정하는 동료 평론가, 동업 편집자, 문학교수 그리고 문학 담당 기자들이 적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지켜봐달라고 부탁하고자 합니다. 창비의 실상이 그러하다면 누구도 창비의 조속한 몰락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긴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페북 친구 여러분의 건승을 빕니다.8/31 백낙청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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