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해보고 싶지만 혼자서는 엄두가 나지 않아 망설이거나 포기하는 일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함께 할 누군가가 있다면 못할 일도 없다. "벌을 지켜 인류를 구하고 지구를 지키겠다!" 혼자서는 엄두도 내지 못했던 일, 함께 해보자는 이들이 있어 도전을 시작했다. 안양·군포·의왕 환경연합 회원소모임 '꿀 빠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벌에 꽂힌 사람들
경기도 의왕시. 번잡한 시내에서 조금 벗어나자 백운산 자락과 시민들이 일군 텃밭이다. 주말 텃밭을 찾은 시민들의 모습은 평화롭다. 텃밭엔 토마토며 고추 등 다양한 열매들이 탐스럽게 열렸다. 텃밭을 따라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벌 천지다. 20개 남짓한 벌통 위로 벌들이 날아다닌다. 그 벌들 중엔 안양·군포·의왕 환경연합 회원들의 벌도 있다.
"벌을 한 번 키워봅시다." 2015년 2월 안양·군포·의왕 환경연합 회원총회가 끝난 뒤풀이 자리에서 정홍상 의장이 모임을 제안했다. "저도 양봉을 해본 적은 없어요. 다른 단체에서 양봉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하면 좋겠다 싶었어요. 벌이 수분활동을 통해 지구생태계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그 벌이 요즘 없어진다고 하잖아요. 환경연합 회원들과 벌에 대해 공부도 좀 하고 또 양봉을 하면 벌을 지키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정 의장의 제안에, 하나 둘 회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동현, 최은식 부부는 텃밭 농사를 짓다가 자연스레 꿀벌모임에 참여했다. "4년째 텃밭을 하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벌에 대해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었죠. tvN <삼시세끼>라는 프로그램에서도 보면 농사만 짓다가 요즘엔 양봉도 하기 시작했잖아요. 아마 농사짓는 사람들은 다 그럴 거예요. 벌들이 많이 없어지잖아요." 차봉준 부의장은 "언젠가 시골에 내려가 살고 싶은데 그때 양봉을 해볼까 해서요"라며 모임에 참여했다. 단순히 벌에 대한 호기심으로 참여한 회원도 있다. 이경선 회원은 "저는 벌이 제일 무서운 사람이에요. 근데 궁금했어요. 어떻게 벌이 꿀을 모으고 그 꿀이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지. 이참에 두려움도 깨고 호기심도 풀어볼까 싶어" 신청했다. 저마다 이유는 다르지만 벌에 꽂힌 회원 10명 정도가 모였고 안양·군포·의왕 환경연합 회원소모임 '꿀 빠는 사람들'이 결성됐다.
수십만 마리의 벌과 함께하다 보니 벌에도 수없이 쏘였다. 손에 쏘이는 건 다반사이고 얼굴, 다리, 머리 등 벌에 쏘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다. 허벅지에 쏘인 적이 있다는 정 의장은 "기본적으로 벌은 상대가 공격하지 않으면 먼저 쏘지 않아요. 허벅지에 쏘인 것도 제가 벌이 있는지 모르고 눌렀다가 쏘인 거예요. 제가 공격한 건 줄 안 거죠"라며 벌을 두둔한다. 그래도 무섭지 않을까 싶지만 벌에 한 번이라도 쏘인 사람은 벌이 덜 무섭다고 한다. 오히려 한 번도 쏘이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벌이 무섭다.
산과 들에 야생화가 피기 시작하자 벌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부지런히 날아다니더니 금세 벌통에 꿀을 한가득 모았다. 4월 초 첫 꿀을 땄다. 그 달콤함에 놀랐고 생각보다 많은 양에 또 한 번 놀랐다는 그들이다.
지구 생태계를 지키는 벌
벌은 꿀만 모아온 것이 아니다. 손톱만 한 이 작은 곤충은 스스로 수분할 수 없는 꽃을 대신해 기꺼이 수술의 꽃가루를 암술에 붙여준다. 이로써 풀과 나무, 곡식 등은 열매를 맺고 새 생명을 탄생시키며 생태계를 유지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벌의 최대수혜자다. 인류가 먹는 식량의 3분의 1도 꿀벌 등 곤충의 수분활동으로 얻어지며 세계 100대 농작물의 71퍼센트(%)는 꿀벌에 의존하고 있다. "지구 상에서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4년 안에 사라질 것"이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은 허풍이 아니다.
꿀은 이 엄청나게 중요하고 경이로운 노동의 대가인 셈이다. 굳이 꿀벌의 노동 가치를 돈으로 환산한다면 우리나라에서만 6조 원에 달한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전 세계적으로 꿀벌이 사라지고 있다. 무분별한 농약 사용과 개발에 따른 서식지 파괴, 전자파, 전염병 등이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도 꿀벌의 멸종을 부채질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양봉이 아니면 시골에서도 꿀벌 보기가 힘들어졌다. 꿀벌을 구하지 못해 중국 등에서 인공수분용 꽃가루를 수입하는 농가도 적지 않다. 그나마 양봉으로 개체 수가 유지되고 있지만 그마저도 지난 2010년 꿀벌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 유행으로 토종벌 90% 정도가 폐사하는 등 위기를 겪었다.
지구를 지키는 사람들이 벌의 위기를 그냥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 비록 양봉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벌을 키워내고 그 벌이 주변의 풀과 나무, 곡식의 열매를 맺게 할 터. 꿀도 꿀이지만 지구생태계 보전에 일조한다는 자부심에 회원들 모두 꿀벌 모임에 흠뻑 빠져버렸다며 허희철 활동가는 전한다.
이종규 집행위원은 내년에는 자신의 근무지에 벌통 하나 갖다놓겠다는 계획도 세웠다. 이동현 회원과 최은식 회원은 벌에 대한 고마움이 두 배다. "텃밭 농작물 수분을 해주는 것도 고마운 일인데 꿀까지 주잖아요. 양봉하다 보니 주변에 있는 꽃과 나무들이 더 귀하게 다가오더라고요. 이런 곳을 지키고 도시에도 녹지공간을 더 늘려야겠구나 싶어요."
제대로 꿀 빨 줄 아는 이들의 달콤한 환경운동
지난 7월 4일, 세 번째 꿀 따는 날이다. 애초 모임의 목적은 꿀이 아니었지만, 꿀 따는 날이 여느 날보다도 즐거운 건 숨길 수가 없는 모양이다.
조심스레 벌통에 다가가 뚜껑을 열어 훈연기로 연기를 뿜어댄다. "연기가 벌의 공격성을 완화시켜 주거든요. 집을 열고 꿀을 가져가는데 가만히 있을 벌이 어디 있겠어요. 그나마 다른 고기는 죽여서 살을 얻는데 꿀은 벌을 살리면서 얻는 것이라 위안을 얻어요." 이종규 집행위원은 조심스레 벌집을 꺼낸다.
벌통에서 꺼낸 벌집을 채밀실로 옮겨 꿀을 빼낸다. 동그란 통에 벌집을 넣고 통을 돌리면 그 원심력에 꿀이 빠져나온다. 돌리는데도 요령이 필요하다. 너무 세게 돌리면 벌집이 망가지고 그렇다고 너무 천천히 돌리면 꿀이 나오질 않는단다. 어디선가 밤꽃향이 난다. "밤꽃에서 얻은 꿀이라 그래요. 색깔도 더 짙죠. 벌이 다녀온 꽃에 따라 향과 맛이 달라요. 5월에 딴 꿀에선 아카시아꽃 향이 가득했어요." 차봉준 부의장은 채밀기를 돌리느라 얼굴이 땀범벅이 됐지만 양봉이 적성에 맞다며 즐거워한다.
벌통 두 개에서 꺼낸 벌집에서 나온 꿀이 상당하다. 준비해온 병이 모자랄 정도다. 모든 작업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회원들 손에 꿀이 가득 담긴 병이 하나씩 들려 있다. "올해는 이 꿀이 마지막으로 따는 꿀이에요. 나머지는 벌들에게 줘야죠. 꿀 먹을 때마다 벌들에게 또 이 자연에게 감사해야죠." 고마움과 미안함은 올겨울 잘 날 수 있도록 돌보고 나아가 꿀벌이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지키는 것으로 보답할 것이다.
이보다 더 달콤한 환경운동이 또 어디 있으랴.
월간 <함께 사는 길>은 '지구를 살리는 사람들의 잡지'라는 모토로 1993년 창간했습니다. 사회적 약자와 생태적 약자를 위한 보도, 지구적 지속가능성을 지키기 위한 보도라는 보도중점을 가진 월간 환경잡지입니다. (☞바로 가기 : <함께 사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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