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박근혜 대통령이 원칙을 유연하게 적용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보도문이 나오기 전날인 24일 오전, 박 대통령은 북한의 지뢰 도발을 비롯한 도발 행위에 대한 사과, 재발 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고 이를 받아내는 것이 회담의 목적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막상 보도문에는 이전과 유사한 북한의 '유체이탈' 화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정 전 장관은 "만약 박 대통령이 아침에 언급했던 원칙을 지키려면 '북한은 자신들이 매설한 지뢰 폭발로 인해 부상자가 생긴 것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 약속했다' 정도의 문구가 나왔어야 했다"며 "이는 결국 박 대통령이 오전에 지키려던 원칙을 심야에 스스로 바꿔버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정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이 "원칙을 벗어나 아량 있는 자세로 북한과 협상에 임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고조와 군사적 충돌을 예방할 수 있었다"며 "박 대통령이 북한에 대한 아량을 베풀었다는 점을 평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남북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박 대통령이 이번처럼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저녁에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주문했다.
그러면서 정 전 장관은 향후 남북관계 개선의 동력은 남한 정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북한은 사고 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수습할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반면 남한은 사고 칠 수 있는 배짱은 없지만, 사고를 수습할 능력은 있다"며 "그렇다면 북한이 하는 것 봐가면서 한반도 상황을 관리하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상대의 행동에 따른 대응만 하고 있으면 남북관계 주도하기 어렵다. 어떤 분야에서 비교해봐도 우리가 북한보다는 위에 있는데, 왜 스스로 수준을 떨어뜨려서 북한과 일대일로 놀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남한 주도적인 남북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인터뷰는 지난 25일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남북이 장장 44시간의 고위급 접촉 끝에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북한은 지뢰 폭발로 인해 남한 군인이 부상을 입었다는 점에 유감을 표명했는데요.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북한이 진심으로 사과한 것이 아니라는 평가도 나오는데요. 어떻게 보시나요?
정세현 : 과거 북한의 소행으로 밝혀진 도발 사건을 수습할 때와 똑같은 수준으로 정리된 것이라고 봅니다. 북한은 지금까지 자신들이 도발을 저질렀다고 표현한 적이 없습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1996년 강릉 잠수정 침투 사건과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 사건 때도 북한은 자신들의 소행임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동해 상에서 불상사가 있었다는 것에 유감을 표명한다, 서해 상에서 충돌이 일어난 것에 유감을 표명한다, 뭐 이런 정도였습니다. 마치 남 말 하듯이 말이죠. '유체이탈' 화법을 구사하는 겁니다.
실제 남북이 25일 합의한 공동 보도문에는 "북측은 최근 군사분계선 비무장지대 남측 지역에서 발생한 지뢰 폭발로 남측 군인들이 부상을 당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였다"고 명시돼 있습니다. 정부는 여기서 '북측은' 이라고 문장이 시작된다는 점에 주목하면서, 북한이 주체를 명시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에 '지뢰 폭발'이라는 단어가 나온다면서 북한이 지뢰 도발을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자인한 것이나 다름없다는 식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우선 문법적으로 맞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정부는 이 조항을 보고 "박근혜 대통령이 일관되게 유지했던 원칙이 통했다"는 식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북한이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에 굽히고 들어왔다는 식으로도 이야기하고 있구요. 그런데 박 대통령이 정말 원칙을 지킨 것이었다면 공동 보도문에 "북한은 자신들이 매설한 지뢰 폭발로 인해 부상자가 생긴 것에 대해 시인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해 약속했다" 정도의 조항이 보도문에 들어갔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이 공동 보도문 발표 전날인 24일, 공개적으로 제시한 가이드라인에서 북한의 지뢰 도발을 비롯한 도발 행위에 대한 사과, 재발 방지가 가장 중요한 사안이고 이를 받아내는 것이 회담의 목적이라고 밝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2시간 뒤에 나온 공동 보도문은 이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결국 박 대통령이 오전에 지키려던 원칙을 심야에 스스로 바꿔버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박 대통령이 바로 이 '원칙론'에서 벗어나 아량 있는 자세로 북한과 협상에 임했기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 고조와 군사적 충돌을 예방할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이번 접촉은 박 대통령의 원칙론이 통했다는 데 의미를 둘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박 대통령이 아량을 베풀었기 때문에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평가해야 합니다. 청와대가 이번 접촉에 대해 "박 대통령이 앞으로의 남북관계를 원만하게 풀어가기 위해 지뢰 도발에 대한 북한의 시인·사과, 재발방지, 책임자 처벌 부문에서 유연성을 발휘했고, 북한은 여기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박 대통령이 제시한 여러 사업들을 추진하자고 약속했다"라고 설명했다면 어땠을까요? 언제 어떤 경우든 원칙만 고집하는 '불통' 대통령을 넘어, 때로는 유연하고 실용적으로 접근하는 열린 대통령이라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각인시킬 수 있었을 겁니다.
또 현시점에서 북한이 우리 원칙론에 끌려왔다든지, 북한이 드디어 굴복했다든지 라는 여론을 조성하면 앞으로 계속 이런 문구 가지고 북한과 실랑이하게 돼있습니다. 그런 식의 평가보다는 우리가 아량있는 자세로 북한을 상대함으로써 앞으로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합니다.
프레시안 : 그런데 북한의 유감 표명에 대해 정부는 "북한이 우리에게 사과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사과로 보기엔 미흡하다는 점을 인정할 경우, 자신의 지지기반인 국내 보수강경파들의 반발을 의식한 것 같은데요. 이런 마인드를 가지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박근혜 정부가 지지기반의 눈치를 보는 것과 남북관계를 개선하는 것 사이에서 흔들리지 않을까요?
정세현 : 이게 본인이 본인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렇게 해서 국내 보수층의 눈치를 보고 대통령이 계속 보수 여론의 포로가 되면 남북관계에 기대할 것 없습니다. 이번 접촉에서처럼, 아침에 했던 이야기를 저녁에 바꿀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원칙을 고수하지 않고 막판에 아량을 베풀었더니 북한이 드디어 우리 품에 들어왔다고 솔직히 설명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프레시안 : 결국 박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제시한 협상 목표를 수정한 셈인데요. 물론 남북 간 군사충돌이라는 최악의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급박한 현실적 필요성도 있었겠지만, 당장의 임기응변에서 더 나아가 남북관계의 획기적 진전에 나서겠다는 결심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까요? 즉, 임기 반환점을 돈 상태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통해 대통령으로서의 업적을 남기겠다는 의도였을까요?
정세현 : 우선 원칙을 고수하다가 위기가 올 수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북한과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고 이 국면을 넘겨야 한다는 판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업적을 남기기 위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이라면 남은 2년 반을 기대해볼 만 합니다. 제발 업적을 챙기기 바랍니다. 이번에 북에 대한 아량을 베풀었던 점을 잘 기억하고 있다가 앞으로도 이런 자세로 북한과 하나씩 일을 추진해나간다면 남북관계도 개선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겁니다.
프레시안 : 어쨌든 남한은 이번 접촉으로 지뢰 폭발 사건에 대한 일정 부분 사과를 받아 냈고 이산가족 상봉도 추진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원하는 바를 얻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장의 성과로 확성기 방송 중단 외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정세현 : 당면해서는 확성기 방송을 중단시켰다는 성과가 있지만, 북한에는 숨어있는 성과가 있습니다. 바로 5.24조치와 연계된 천안함 문제입니다.
남한은 이번 접촉에서 북한이 지뢰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자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면서 사건을 마무리했습니다. 바로 이러한 선례를 지난 2010년 발생한 천안함 사건에 대해서도 적용시킬 수 있습니다. 가령 '2010년 봄 서해 상에서 잠수함으로 인해 또는 서해 상에서의 사건으로 인해 많은 인명이 살상된 것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는 식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 대표단이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고 협의를 진행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북한은 조만간 이런 식으로 5.24 조치 해제를 이야기할 것입니다. 남북이 합의한 당국 회담에서 이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습니다. 논리적으로도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보도문에는 "앞으로 계속하기로 하였으며" 라고 명시했는데요.
정세현 : '계속'이라는 단어를 보고 북한이 어떤 생각을 했을까를 잘 추정해봐야 합니다. 북한 입장에서는 이산가족 상봉을 계속하려면 일정한 조건이 충족돼야 합니다. 즉, 북한의 의도는 이산가족 상봉이 인도적 사업이기 때문에 그에 상응한 인도적 지원을 계속 해달라는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에게 쌀과 비료를 지원해달라는 겁니다.
노무현-김대중 정부 때 16회에 걸쳐 이산가족 상봉이 이뤄졌습니다. 이때 북한 정권의 책임자들이 인도주의자들이라서 이산가족 상봉이 지속된 것입니까? 절대 아닙니다. 우리한테는 이산가족 상봉 사업이 인도적일 수 있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도주의라는 명목으로 추진되는 이산가족 상봉 현장이 북한에게는 남북 간 체제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나는 가슴 아프고 속상한 현장입니다. 이걸 상쇄할 수 있었던 것이 쌀과 비료였습니다. 북한은 남북 당국 회담에서 이산가족 상봉과 쌀, 비료 지원을 상호 연관시키는 구도를 짜고 싶어 할 것입니다.
고위급접촉 합의, 남북관계 개선으로 이어지나
프레시안 : 남북은 이번 접촉에서 당국회담 개최와 이산가족 상봉, 교류 확대 등을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합의가 남북관계 개선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을까요?
정세현 : 우리 하기 나름입니다. 지금까지 행태를 봤을 때 북한이 이런 합의서를 성실히 이행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솔직히 '연목구어'(緣木求魚)입니다. 모처럼 만에 무박 4일 협상을 통해 합의를 만들어냈다면, 이것이 이행될 수 있도록 상황을 조성하고 끌고 나가는 것은 우리 책임이고 능력의 문제입니다.
북핵 문제를 돌이켜보면, 이 문제의 책임 당사자 중 하나인 미국이 사사건건 철저한 일대일 상호주의를 견지했기 때문에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번 합의 이후에 남한이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으니까 대범하고 포용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대북 인도적 지원도 넉넉하게 하고, 금강산 관광도 재개해서 북한이 남한과 경제·사회·문화적 교류 협력을 포기할 수 없도록 판을 짜야 합니다. 이후에 정치·군사적 상황을 풀어나가는 겁니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줘야 한다는 북한 '선(先)행동론'과 같은 프레임을 남북관계에 적용하면 관계 개선은 어려워집니다. 북한이 하는거 봐가면서 지원해주겠다, 경제협력 속도 조절하겠다는 식의 북한 선행동론보다는, 남북관계만큼은 남한이 선도한다는 입장을 취하고 사업을 추진하면 북한은 분명 협조적으로 나올 것입니다. 특히 북한에게 남북 간 합의 사항을 이행해 나가면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감하게 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이번 접촉만 해도 북한이 긴장을 한껏 고조시킨 이후에 대화를 제의했고, 우리가 이를 수용한 모양새가 됐습니다. 냉정하게 따지면 북한의 페이스에 끌려 들어간 측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상대의 행동에 따른 대응만 하고 있으면 남북관계 주도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남북관계를 어떻게 끌고 갈지 큰 그림을 그려놓고 그 정책 기조하에서 구체적인 전략·전술을 가지고 북한을 상대해야 합니다. 어떤 분야에서 비교해봐도 우리가 북한보다는 위에 있는데, 왜 스스로 수준을 떨어뜨려서 북한과 일대일로 놀려고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프레시안 : 말씀하신대로 이번에 고위급 접촉에 이르는 과정만 보더라도 결국 북한이 남한을 대화의 테이블에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든 측면이 있습니다. 이렇게 끌려나간 남한 정부가 선도론의 입장에서 "지금부터 남북관계 잘해보자"고 적극적으로 나설 것인지 의문입니다.
정세현 : 물론 이번에는 끌려나간 측면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합의 이후에는 상황을 주도해야겠다는 자세로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번 공동 보도문 1항에 명시한 남북 당국 회담을 정례화해야 합니다. 과거 장관급 회담 격으로 당국 회담을 복원하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고 가장 적당한 방안입니다.
노무현 정부 말기에 10.4 남북 정상회담 이후 남북 간 회담을 총리급으로 격상시켰습니다. 그런데 남북 총리 모두 남북관계보다는 경제 분야의 전문가들이었습니다. 총리급 회담이 있고 그 밑에 장관급 회담을 여러 개 만들겠다는 계획이라면 모르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정기적 회담은 장관급으로 가져가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이번 접촉의 경우 군사적인 충돌 위험이 있었고 군사·안보문제였기 때문에 북한에서도 인민군 총정치국장이 회담 수석대표로 나온 것이지만 이는 특수하고 일회적인 경우입니다. 이후에 이뤄질 정기적인 당국 회담은 통일부 장관이 수석대표가 돼서 회담을 책임지고 끌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되면 회담 수석대표의 '격'(格) 문제가 또다시 불거질 수 있습니다. 지난 2013년 장관급 회담인 당국 회담을 하려다가 중간에 이 문제 때문에 엎어지지 않았습니까? 남한은 통일부 장관의 카운터파트로 통일전선부장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북한은 그렇게 못하겠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무산됐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통전부장과 통일부 장관이 맞는 짝은 아닙니다. 남북 정부 구성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남한에서 통일부 장관이 통전부장을 만나겠다고 하면 북한에서는 통일부 장관이 아니라 국정원장 나오라고 받아칠 겁니다. 통전부장은 대남 공작 업무도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북한에서 통전부장은 당 비서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남한으로 따지면 부총리급 이상이라고 생각합니다. 통일부 장관과는 소위 '급'이 맞지 않는 겁니다.
통전부 산하에는 영역별로 다양한 단체가 있습니다. 몸뚱이는 하나인데 모자는 여러 개를 가지고 있는 겁니다. 여기서 조국평화통일위원회가 우리의 통일부와 같은 역할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조평통 당국자들과 회담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걸 굳이 안된다고 통전부장을 나오라고 하니, 북한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번 고위급접촉에서 홍용표 통일부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마주 앉으면서 일부에서는 통일부-통일전선부 라인이 부활된 것이냐는 분석도 내놓았던데, 이는 좀 지나친 해석입니다. 김양건 부장이 고위급접촉에 나오게 된 경위를 살펴보면 이러한 해석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북한은 김양건 부장이 당 중앙위원회 비서 명의로 김관진 국가안보실장에게 회담을 제의했습니다. 그런데 남한은 국가안보실장의 카운터파트는 북한 인민군 총정치국장이라면서, 총정치국장이 회담에 나오라고 역제의를 했습니다. 이에 북한은 황병서 총정치국장만 내보낼 경우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김양건 부장을 옆에 붙여놓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려면 남한과 모양새를 맞춰야 하기 때문에 통일부 장관도 나오라고 다시 제의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북한은 향후 통일전선부-통일부의 단독회담은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번과 같은 2+2 접촉 형태를 계속 끌고 갈 것이 아니라면 통일부 장관과 조평통 서기국장, 또는 내각 책임참사의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인정해주고 장관급 회담을 당국 회담으로 정례화시켜야 합니다.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조평통이 당 외곽 단체라면서 우리의 장관과 만날 '급'은 아니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데, 지난 1990년 9월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개최했던 남북 총리급 회담에 참가한 북한 대표단 7명 중에 2명이 조평통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되묻고 싶습니다.
남북 모두 어렵게 관계 개선의 물꼬를 튼 것이라면 이러한 형식 논리보다는 실질적인 남북관계 개선 방안을 찾는데 더 힘을 써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게다가 근본적으로 어차피 북한은 누가 회담 대표로 나오든 간에 김정은 제1위원장이 결심해야 합니다. 누가 마이크를 잡고 있든, 설사 통전부장이라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정권 가지고 있는 사람이 회담에 나와야 한다면, 김정은이 나와야 하는 것 아닙니까?
프레시안 : 그런데 사실 이번 남북 고위급접촉은 지뢰 폭발과 포사격으로 촉발됐는데요. 그렇다면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을 위한 군사회담을 열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정세현 : 물론 필요합니다. 하지만 군사 회담이 맨땅에 헤딩하는 것처럼 되지는 않습니다. 남북한 간에 군사적 긴장을 해소해야 서로가 이득을 볼 수 있는 상황이 먼저 조성돼야 군사회담이 성사됩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에 있었던 국방 장관 회담도 그랬습니다. 경제·사회·문화 분야에서 남북 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된 상태에서 군사적 긴장이 조성되면 이것이 무너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나오게 됩니다. 이럴 때 군사회담을 제안했더니 북한은 바로 받았습니다. 즉, 군사 회담을 열면 기존의 교류 협력이 더 활성화되고 남북 체제 모두 여러 가지 이득을 볼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때 군사회담을 성사시킬 수 있고 실제 합의에도 도달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2004년 장성급 회담입니다. 당시 회담에서 서해 상에서 남북 함정 간 무력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상호 협력, 무선 교신 등이 합의됐습니다. 이후 군사 실무 회담에서 비무장지대(DMZ) 확성기 방송을 중지하는 것까지 합의했습니다. 이처럼 군사적 문제에 대해 원활한 협의가 가능했던 이유는 남한에 협조하지 않으면 쌀·비료 지원이 제대로 되지 않을 것임을 북한 군부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 : 이번 접촉 이후에 일각에서는 남북 정상회담도 가능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상회담을 추진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구요.
정세현 : 정상 차원에서 큰 합의를 하고 이를 아래로 내리는 방식도 나쁘진 않습니다. 그런데 박근혜 정부가 이런 방식의 접근에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겁니다. 북한은 '대통로', 즉 정상회담을 열어서 새 판을 짜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남한은 민생·환경·문화적인 분야의 교류와 접촉을 하면서 남북관계를 발전시켜나가는 길을 열어가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기능주의적 접근을 통해 남북 간 화해 협력 분위기를 조성해 나가다가 나중에 정상회담, 정치·군사적 회담까지 이어가자는 입장입니다. 반면 북한은 전통적으로 일괄적인 타결, 정치·군사적 접근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실제 남한은 70년대 기능주의적인 접근을 이야기했고, 김대중 정부 들어와서는 1998년부터 대대적으로 민간 교류를 활성화시켰습니다. 북한이 남한에 품고 있는 저항감을 줄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이후 북한이 남한과 교류협력을 하는 것이 득이 된다는 생각을 했을 때, 그 때 정상회담이라는 정치적인 접근을 이뤄냈습니다. 박근혜 정부도 이러한 단계를 거칠 필요가 있습니다.
프레시안 : 그런가 하면 북한의 이번 도발이 한국과 중국을 이간질하기 위한 시도라는 평가도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오는 9월 3일로 예정된 중국의 세계 2차대전 전승기념식에 참석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는 건데요
정세현 : 만약 북한이 그럴 생각이었다면 계속 버텨야 하는 것 아닙니까? 하지만 북한은 우리보다 먼저 현 상황에 대해 대화하자고 제의했고, 고위급접촉을 통해 우리와 합의도 이끌어냈습니다.
북한의 목함 지뢰가 폭발한 것이 지난 4일입니다. 9월 3일까지는 한 달이나 남았는데, 그걸 내다보고 긴장을 조성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입니다. 정말 그럴 의도가 있었다면, 이번 전승절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고, 한반도에 군사적 이해관계가 있는 중국이 이걸 그냥 보고만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