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이 러일전쟁(1904-05)으로 조선 침략의 마지막 경쟁자 러시아를 물리치고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대외주권을 빼앗자 고종은 국제여론에 호소하기 위해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보냈지만 44개국이 참석한 이 회의에 참가 자격을 얻지 못했다. 이 시도에 분노한 일본은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황제로 세웠다.
1919년 해외 독립운동가들은 파리평화회담에 대표를 파견해 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조선 독립을 호소하려 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제국주의시대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약소민족의 절규가 국제무대에서 호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조선 독립의 호소가 처음으로 국제적 호응을 얻은 것은 1943년 11월 카이로에서 열린 연합국 정상회담에서였다. 당시 주요 연합국으로 미-영-중-소 4개국이 있었는데 카이로회담은 일본 문제를 다루는 자리였기 때문에 일본과 불가침조약을 맺고 있던 소련이 빠졌다. 이 회담 직후 열린 테헤란회담에는 미-영-소 3국 정상이 모여 유럽 문제를 다뤘다.
미-영-중 3국 정상의 카이로선언이 조선의 독립에 대한 첫 국제적 합의였다. 그런데 이 합의가 약소민족을 배려하는 착한 마음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의미를 정확히 이해해야 일본의 패망에 따른 조선 '해방’의 실제 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조선 독립 약속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몇 주일 전 미-영-소 3국 외상회담의 모스크바선언에서 나온 오스트리아의 독립 약속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스트리아는 전쟁을 앞둔 1938년 국민투표를 통해 독일에 합병되어 독일제국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모스크바선언에는 전쟁 후 오스트리아의 독립 방침에 이어 이런 말이 붙어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히틀러의 독일과 같은 편에서 전쟁을 수행한 데 대한 책임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최종 결정에서 자신의 해방을 위한 오스트리아 스스로의 노력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인에게는 지금까지 독일을 도와준 책임이 있으며, 지금부터 연합국을 얼마나 도와줄지 두고 보겠다는 것이다. 당시 연합국은 수세에서 공세로 전환하려고 안간힘을 쓸 때였다.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독립을 약속한 것은 독일제국과 일본제국의 내부에 균열을 일으키려는 뜻이었다.
전쟁이 끝난 후 오스트리아와 조선의 독립 전 10년과 5년의 신탁통치를 결정한 데는 "스스로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본 데 따른 징벌의 의미가 있었다. 연합국이 끝내 임시정부와 광복군을 승인하지 않은 것도 충분한 도움을 주었다고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카이로선언에 담긴 연합국의 속셈
오스트리아는 원래 좌우대립이 극심하던 나라였다. 그런데 1945년 4월 오스트리아 지도자들은 좌우합작 정부를 세웠다. 그리고 10년 신탁통치를 군말 없이 받아들였다. 4개국 분할점령 10년 동안 좌우합작 정부는 소련과 서방국 어느 쪽에도 분규의 빌미를 주지 않았다. 그래서 1955년 영세중립국으로 독립하기에 이른다.
반면 조선에서는 1945년 말 모스크바 외상회담에서 신탁통치 방침이 결정되자 즉각 거센 반탁(신탁통치 반대)운동이 거족적으로 일어났다. 그것은 12월 27일자 <동아일보>에 "워싱턴 25일 발 합동 지급보"란 바이라인이 붙어 나온 기사 때문이었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 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점령"이란 제목대로 미국이 조선의 즉각 독립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조선인이 독립의 의지를 보이고 소련만 설득하면 즉각 독립이 가능할 것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기사였다. 민족 독립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탁운동에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기사였다. 그러나 조작된 기사였다. 사실에 있어서는 미국이 더 긴 신탁통치기간을 주장했는데 소련이 줄일 것을 요구해서 5년으로 낙착된 것이었다.
반탁운동은 결국 "5년 신탁통치 후 독립"이라는 연합국 합의가 실행되지 못하게 되는 데 큰 몫을 했고, 그 결과가 분단건국과 전쟁이었다. 나는 <해방일기>에 이렇게 썼다.
"<동아일보>가 아직 살아 있는 신문이라면 해마다 12월 27일에는 1945년 12월 27일에 내보낸 이 기사에 대한 사과문과 반성문을 실어야 한다. 언론이 사회에 해악을 끼친 사례로 이 기사는 한국 언론사에서 가장 극악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권2, 294쪽)
하루하루 지남에 따라 모스크바회담의 실상이 알려지면서 민족주의자들은 반탁운동의 대열에서 빠져나가 좌우합작의 노력을 시작했다. 미국과 소련의 분할점령 하에서 좌우합작 없이는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는 꼴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했다.
그런데도 반탁운동을 계속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 주축은 한민당 중심으로 뭉친 친일파-지주 집단이었다. 그들에게는 미군 점령지역의 분단건국이 민족국가 수립보다 유리했다. 분단건국이 내전을 몰고 올 것을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그들은 미국의 군사력이 소련을 압도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민족주의자들이 대열을 떠난 후에도 반탁운동이 어느 정도 기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금력 덕분이었다. 막강한 자금력으로 군중을 동원하고 테러조직을 키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김구와 이승만, 두 민족주의 지도자를 포섭해서 간판으로 내놓을 수 있었다.
무엇이 김구의 눈을 흐리게 했나?
김구와 이승만은 해외 독립운동가 중 가장 저명한 인물이었다. 국내에 있던 사람들에 비해 국제정세를 잘 파악할 위치에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즉각 독립'의 환상에 빠지더라도 현실의 엄혹함을 알려주고 좌우합작의 노력에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반탁을 빙자한 극단적 반공(反共)-반소(反蘇)에 나선 까닭이 무엇이었을까?
여운형과 함께 건준을 이끌다가 보름 만에 사퇴한 안재홍은 언론인과 역사학자로 여러 차례 감옥을 드나든 국내의 대표적 민족주의자였다. 이승만과 김구가 귀국하자 안재홍은 그들을 건국 과업의 지도자로 받들기 위해 정성을 다했지만 결국 갈라서게 된다.
이승만이 귀국했을 때 안재홍은 나중에 이승만의 사조직이 될 독립촉성중앙협의회 결성에 앞장섰다가 곧 멀어지는데, 그 이유를 명확히 밝히지는 않았어도 짐작이 가는 대목이 있다. 1946년 2월 민주의원을 만들 때 미군정에 종속적 성격이라는 이유로 참여를 꺼리는 안재홍에게 이승만이 참여를 강권하며 그것이 장차 세워질 국가의 '대신(大臣)'이 되는 길이라 했다고 적은 글이 있다. 이승만이 이익을 앞세우는 사람임을 그는 알아보았던 것이다.
김구의 지도력에 대한 안재홍의 기대는 훨씬 더 오래갔다. 1946년 4월 자신이 이끌던 국민당을 김구의 한독당에 통합시켜 국내 기반을 키워주기까지 했다. 그러나 1년 후 반탁운동을 고집하며 미소공위를 방해하는 김구와 결국 결별하기에 이른다.
안재홍이 이승만과 김구의 지도자 추대에 애쓴 데는 건준의 경험도 작용했을 것이다. 해외에서 깨끗이 지켜온 지도력이 국내 지도자들의 '도토리 키 재기'를 뛰어넘어 안정된 지도부 구축을 위한 깃발이 되어주기를 바랐을 것이다. 당시의 민심도 환국 독립운동가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풍찬노속(風餐露宿)'에 대한 동정심과 구원에 대한 열망 위에서 그들의 행적이 많이 부풀려져 전해져 왔다. 김일성도 이런 민심의 덕을 본 사람의 하나였다.
김구의 임정은 국민당과 한민당 양쪽의 구애를 받았다. 임정을 중심으로 모든 계열 지도자들을 통합하자는 국민당의 '보강론(補强論)'과 달리 한민당은 임정 그대로 지도부로 삼자는 '직진론(直進論)'을 내세웠다. '임정 봉대(奉戴)'라는 한민당의 아첨은 진심을 담지 않은 것이었다. 김구가 그런 한민당과 손을 잡고 반탁운동에 나선 것은 그쪽의 자금 지원이 진심을 담은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일까. (경교장도 그쪽 제공이었다.)
인민의 여망을 등지는 민족지도자
1945년 11월 23일 오후 4시경 김구 일행이 김포비행장에 도착할 때는 물론, 5시경 경교장에 도착할 때까지도 환영 인파가 없었다. 언론에조차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6시에야 하지 사령관이 라디오로 임정 환국 사실을 밝혔다. 김구의 방송연설은 이튿날 오후에 군정청의 허가를 얻어 단 2분간, 300자 길이의 인사말을 인민에게 전할 수 있었다.
임정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은 미국의 공식 정책은 합리적 근거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임정 지도부의 환국을 비밀에 부치고 경교장에 연금하다시피 한 것은 별난 일이었다. 이런 조치는 누구의 뜻에 따른 것이었을까? 도착한 날 김구가 만난 사람이 이승만 하나뿐이었다는 사실이 주의를 끈다. 당시 이승만은 맥아더와의 친분을 앞세워 하지 사령관의 엄청난 공경을 받고 있었다. (이승만은 귀국 길에 도쿄에 들러 맥아더를 만났는데 맥아더는 하지를 도쿄로 불러 이승만에게 인사를 시키고 자기 전용기에 태워 보냈다.)
전쟁 말기에 김구는 이승만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임정은 중국 정부에 의지하고 있었는데 중국 정부는 미국에 의지하고 있었고 이승만은 미국 군부에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구가 "형님"이라 부르던 이승만이 미군정의 힘을 빌려 격리시켜 놓은 김구에게 그날 밤 어떤 이야기를 한 것일까?
이튿날 기자회견에서 김구의 말 한 마디가 짐작을 도와준다. 친일파와 민족반역자 문제를 어찌할 것인가 묻는 기자에게 이렇게 답했다.
"여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을 줄 안다. 우선 통일하고 불량분자를 배제하는 것과 배제해 놓고 통일하는 것의 두 가지가 있을 것이므로 결과에 있어 전후가 동일할 것이다."
산수에는 'A+B=B+A'라는 교환의 법칙이 있다. 그러나 현실사회에는 '경로의존성'이 있지 않은가? 불량분자를 배제하지 않은 채 건국사업을 진행할 경우 불량분자가 그 진로에 영향을 끼치고, 그 결과 건국 후의 불량분자 배제가 어렵게 될 것을 김구가 정말 몰랐을까? 그가 적어도 당장은 이승만의 뜻을 거스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사실을 같은 회견 중 통일전선 결성 방침을 묻는 질문의 대답에서 알아볼 수 있다.
"나에게 이박사 이상의 수완이 있다고는 신빙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나는 제군이 아는 바와 같이 국내와 연락이 없었고 국내 사정에 어두운 만큼 현실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모두 30년간 해외에 나가 있었던 만큼 현하 정세에 대해서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 없다."
미군정을 쥐락펴락하는 이승만, 으리으리한 경교장까지 마련해준 이승만, 못 이기는 체하고 그의 뜻에 따르고 있으면 언젠가 자신에게 유리한 형세가 돌아올 때가 있을 것이라고 김구는 판단했을 것 같다. 민족주의 지도자로서 건국사업에 큰 역할을 맡아줄 것이라는 여망을 모으고 있던 김구는 이렇게 귀국 이튿날부터 그 여망을 저버리는 태도를 보이고 있었다.
(이 글은 <방송대신문> 1815~1817호에 3회에 걸쳐 싣는 것을 약간 수정해서 신문사와 필자의 양해로 전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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