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숙 전 국무총리가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아들면서 야권은 충격에 빠진 모습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장관, 국무총리, 야권 17대 대선 예비 후보와 서울시장 후보를 지낸 거물 정치인이,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감옥에 들어간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모습이다.
허탈함이 짧게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공격적인 언사로 채워지고 있다. 새정치민주연합은 당장 야당탄압저지대책위원회를 신공안탄압저지대책위원회로 전환하고 한 전 총리 유죄를 '정치 탄압'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탄압 주체가 모호하다. 따지고 보면 한 전 총리는 이명박 정권에 의해 '정치 보복'을 당했고, 박근혜 정권에서 최종 유죄 판결을 받았다. 5년에 걸친 재판이었다. 새정치연합이 박근혜 정권을 타겟으로 삼는 것에 대해 유권자들은 혼란스러운 감정을 느낀다. 이럴 때일수록 야권은 '섬세한 전략'이 필요하다.
이명박이 뿌린 정치 탄압, 박근혜 정부에서 빛을 보다?
한 전 총리의 개인사를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가 새정치연합 내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정치인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계파 막론하고 존중받는 몇 안 되는 인사이기도 했다. 물론 한 전 총리도 이명박 정부를 거치면서 이른바 '친노 정치인'으로 분류됐다. 노무현 전 대통령, 이해찬 전 총리 등 그의 주변엔 공통분모를 가진 인사들이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권은 정치 검사들을 참으로 잘 다뤘다. 반대파를 제압하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고, 심지어 통치 수단으로 이용하는 듯한 모습마저 보였다.
한 전 총리는 이명박 정권 시절, 검찰의 타겟이 된다. 전임 정부의 국무총리를 수사하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인데, 검찰은 대권 주자이기도 했던 한 전 총리에 대해서만큼은 끈질김을 보였다. 청와대는 노 전 대통령 수사부터 정봉주 전 의원 수사, 한 전 총리 수사까지 '보복성 수사'를 철저히 묵인했다. 심지어 기획을 주도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이런 의혹은 아직도 풀리지 않고 있다. 전직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도, 이명박 정권의 정치 보복은 거침이 없었다.
2009년 12월 검찰은 곽영욱 전 대한통운 사장으로부터 한 전 총리에게 "2006년 12월에 5만 달러 건넸다"는 진술을 확보했고, 약 3주 만에 한 전 총리를 불구속 기소했다. 속전속결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무죄였다. 휠체어를 탄 상태에서 병세가 완연해 보이는 곽 전 사장이 총리 공관 의자에 5만 달러를 두고 왔다는 취지로 진술을 번복하면서, 한 전 총리를 기소한 검찰의 무리한 행태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의자를 기소하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다.
그러나 검찰은 굴하지 않았다. 곽영욱 사건 무죄 판결 전, 검찰은 한신건영을 전격 압수수색하며 한 전 총리에 대한 '2차전'에 곧바로 돌입했다. 당시는 20100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둔 때였고, 한 전 총리는 서울시장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다.
노무현 정권의 상징적 인물이자, 야권의 유력 정치인이었던 한 전 총리에 대해 사활을 걸었던 검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일까.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등, 정권에 불리한 사건에 대해서는 수사팀을 해체하고, 공고 유지 검사를 파견 보내는 행태에 비하면 대단한 열정이었다. 이 사건은 5년을 끌었고, 결국 박근혜 정부에서 유죄 판결로 귀결됐다.
한명숙 사건 대처, 야당은 실패했다…세심한 전략이 필요
지난 5년 동안 지루한 싸움을 지켜본 새정치연합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특히 앞서 언급했듯, 야권이 한 전 총리 사건을 정치 보복으로 여길만한 정황들은 많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새정치연합은 신공안탄압저지위원회를 만들고 대법원 판결 직후 첫 회의를 열었지만, 또렷한 대책은 없어 보인다. 탄압 주체는 이명박 정부인데, 박근혜 정부에 맞서는 모습은 유권자들에게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명분이 없다.
한 전 총리 사건을 '공안 탄압'으로 규정하고 스스로 피해자가 돼 유권자들에게 호소하는 등, 새정치연합 입장에서 이 사건이 향후 정치 전략상 중요하게 취급할 필요가 있었다면, 이른바 '명분'을 미리 깔아놨어야 맞다.
일례로 최근 박기춘 의원이 구속될 때 새정치연합은 단호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박 의원 스스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에 대해 자백까지 한 마당인데, 끝까지 당은 온정주의적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 의리와 전략은 분리돼야 한다. 한 전 총리 사건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박 의원과 같은 개인 비리에 단호하게 선을 그었어야 했다. 그런 '사전 정지 작업' 없이 외치는 정치 탄압은, 그 내용과 별개로 공허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유권자들은 똑똑하지만 친절하지는 않다.
새정치연합의 태도는 모호하다. 박 의원 사건을 비롯해, 현재 진행되고 있는 자당 소속 의원에 대한 검찰 수사 사건들을 '공안 탄압'으로 두루뭉술하게 규정했다. 무려 10여 건이 된다. 한 전 총리가 '정치 탄압'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개인 비리'와 미리 명확히 선을 그었어야 명분이 생긴다. 결국 새정치연합의 전략적 실패다. 이런 점에 있어서는 새누리당을 따라갈 수 없다.
새누리당은 기민하게 움직이고 있다. 당장 한 전 총리 사건을 계기로 비례대표 의석을 줄여야 한다며 '반 정치개혁' 여론몰이에 불을 지피고 있다. 한 전 총리가 야당 대표 시절 스스로 비례대표 당선권 순번을 부여받고 국회에 입성한 것을 끄집어내, 비례대표제 자체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우려 한다.
비례대표를 줄이고, 지역구를 늘리게 되면 야당이 주장하는 권역별 비례대표를 수용하더라도, 여야 의석수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이는 새누리당이 원하는 바다.
<동아일보>는 이날 현행 국회의원 300명(지역구 246명, 비례대표 54명)을 18대, 19대 총선 지역별 득표율을 적용해 시뮬레이션한 결과 지역구 국회의원 수를 크게 줄이고 비례대표도 늘리지 않는 이상 권역별비례대표제를 도입해도 지역 간 의석 불균형 해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비례대표가 오히려 줄어들면 여당에게 유리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야당이 이미 수명을 다한 이명박 정부를 겨냥하는 동안, 새누리당은 내년 총선을 준비하고 있다. 새누리당에 비열하다는 비판을 씌울 수 있겠지만, 정치 지형은 비판을 통해 저절로 일궈지는 게 아니다.
의제와전략그룹 더모아 윤태곤 정치분석실장은 "새정치민주연합이 한명숙 전 총리 사건에 대해 강하게 목소리를 내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지지자들도 그런 모습을 바랄 수 있다. 그러나 '공안 탄압' 정국을 길게 끌고 가는 것이 꼭 야당에 유리하다고는 볼 수 없다. 좀 더 세심한 전략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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