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아 발표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담화를 두고 '백화점식' 담화였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아베 총리가 평소 가지고 있던 역사 인식과 신념을 생각해봤을 때 결코 나올 수 없는 사죄, 반성, 침략, 식민 지배라는 단어가 모두 포함됐지만, 주어가 불확실해 '사과한 듯 안 한 듯'한 모호한 표현으로 이른바 '물타기'를 했다는 지적이다.
지난 4월부터 넉 달 동안 일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대학교에서 동북아 협력 연구의 일환으로 일본의 주요 인사들을 인터뷰하고 돌아온 경남대학교 이수훈 교수를 만나 아베 담화가 이같은 내용을 담게 된 배경과 일본 현지 분위기를 들어봤다.
우선 아베 담화와 관련해 이 교수는 "아베 총리의 담화는 우리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의식하기도 했지만 일본 내부의 압박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다"고 진단했다.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위해 아베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한 안보 법제 제·개정과 관련, 여론이 싸늘해지자 국민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는 분석이다.
그는 "아베 총리 입장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각계의 다양한 요구를 모두 담은 담화를 발표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특정한 시점에 일본이라는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는 정치 지도자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담화였다는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베 총리가 모호한 입장을 발표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이를 한일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에 대해 이 교수는 "이미 지난 6월 22일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일본과 세웠던 각을 사실상 풀어버렸다"면서 일본군 '위안부'문제를 포함해 한일 간 해결된 현안이 없는데도 갑작스럽게 태도를 바꾼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외교"라고 꼬집었다.
그는 "한일 관계 악화가 우리한테 피해가 된다면 과거사 문제와 한일관계 개선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지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아베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지금 한국 외교의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지금 한일 간 제기되는 현안들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독도,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교과서 문제 등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라면서 "그런데도 당시에 지금처럼 문제가 불거지지 않은 것은 한일 관계의 저변을 해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고 일본 관련 이슈를 세심히 다루려는 노력이 있었다. 지금 정부에 그런 노력이 있는지 의문"이라고 덧붙였다.
인터뷰는 지난 17일 서울 삼청동에 위치한 경남대학교 이수훈 교수 연구실에서 언론 협동조합 <프레시안> 박인규 이사장과 대담 형식으로 진행됐다. 다음은 인터뷰 주요 내용이다.
프레시안 :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았던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담화가 지난 14일 발표됐다. 발표 이후 미국은 환영한다는 뜻을 밝혔고 한국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계승하겠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국은 사과에 진정성이 없다면서 반발하고 나섰다. 일본 내에서는 담화가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이라는 예상이 있었나?
이수훈 : 대체로 일본에서는 예측했던 대로 진행됐다는 평가가 많다. 일본에 머무르면서 학자들, 관료들, 언론계 등등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우리의 관심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담화에 큰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많이 했다. 아베 총리가 기존의 생각을 바꿀 리가 없기 때문에 전향적인 메시지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아베 총리의 이번 담화는 우리와 중국을 비롯한 주변국을 의식한 부분도 있지만, 일본 내부의 압박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다. 특히 담화 전에 일본의 하원이라고 할 수 있는 중의원에서 안보 법제가 통과됐다. 아베 총리가 무리하게 추진한 측면이 있는데, 여기에서 국민들의 반발이 상당했다. 당장 아베 총리의 지지율도 40%대에서 30%대로 떨어졌다.
또 일본의 젊은 세대들에게는 자신들의 역대 지도자들이 이 정도로 사죄했는데 더 이상 뭘 더 해야 하느냐는 인식도 있다. 한국을 비롯한 주변국의 사죄 요구에 대해 피로감이 큰 것이다. 실제 한일 관계에 대한 인식 조사를 들여다보면 지난 2~3년 사이에 한국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나빠졌다고 대답하는 일본인들이 많다. 아베 총리는 이러한 일본 국민들의 피로감을 잘 이용한 것 같다.
아베 총리는 이러한 상황을 고려해 주변국과 일본 내의 시민사회, 지식인 등의 압박은 피하면서 근본적인 태도는 변하지 않는 내용의 담화를 준비했을 것이다. '백화점식'의 담화가 나올 수밖에 없던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상한 방식으로 표현되기는 했지만 사죄와 반성, 침략, 식민 지배로 불리는 이른바 4가지 사항이 모두 들어가 있긴 하다.
아베 총리 입장에서는 보수와 진보를 모두 아우르는, 각계의 다양한 요구를 담은 담화를 발표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담화는 역사적으로 대단한 의미가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특정한 시점에 일본이라는 국가를 이끌어가고 있는 정치 지도자가 나름대로 고민한 흔적이 보이는 담화였다는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에는 소수지만 무라야마 담화를 계승하고자 하는 모임이 있다. 전직 외교관들이랑 학자들이 주축인데, 이 사람들이 아베 담화를 보고 '괴로운 담화'라는 표현을 썼다. 식민지 지배, 침략, 통절한 반성, 사죄 등 무라야마 담화의 4가지 사항을 어떻게든 빠뜨리지 않고 넣어보려고 시도한 담화라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은 핵심을 피했기 때문에 완전한 계승이라고 보기도 어렵다는 지적이다.
프레시안 : 일본의 <교도통신>에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아베 담화에 대해 긍정적으로 본다는 응답이 44%, 부정적으로 본다는 응답이 37%로 집계됐다. 안보법제를 제·개정할 때는 반대가 찬성의 2배 가까이 나왔었는데, 그때와는 상당히 다른 반응이다.
이수훈 : 이 정도가 일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안보 법제에 대해서는 다른 측면에서의 우려가 있다.
일본에서 소위 진보진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아베 총리의 노선을 반대하는 편이다. 특히 한반도에 좀 애정이 있는 전문가 혹은 전직 관료들, 한국에서 대사를 지냈던 분들, 아시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대개 우리와 생각이 거의 같다. 아베의 노선은 평화 국가, 평화 헌법을 파괴하고 정상 국가라는 이름 하에 군대를 보유하려고 하는 것인데, 이런 부분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일본의 미래에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이 많다.
안보법제 제·개정 과정에서 일본의 헌법학자들이 위헌이라면서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또 시민사회와 국민들의 반대 움직임도 상당했다. 아베 정부는 집단적 자위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평화헌법 9조에 대한 헌법 해석을 변경한 이후 이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안보 법제 제·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이 실제로 이뤄지면 일본은 미국과 함께 '평화적인 활동'이라는 탈을 쓰고 전쟁을 함께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일본 국민들은 이 부분을 우려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전쟁에 휩쓸려 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것이다.
미국은 현재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치르느라 동북아에 많은 군비를 투입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런 가운데 일본에서는 이 때문에 생긴 공백을 자신들이 메꿔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여기에 반대하면서 안보 법제에 대한 반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아베 총리와 가장 반대편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아키히토(明仁) 일왕이다. 우선 일왕 본인 자체가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있고, 스스로를 정당화해야 하는 입장에서도 평화 헌법을 지켜야 한다. 평화 헌법에 기초한 국가의 일왕이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일본은 세계 2차대전 이후 평화 헌법에 의해 다스려지는 국가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국방과 관련한 비용을 치르지 않았다. 그동안 미국의 방위 우산 아래에서 일본의 경제적 도약이 진행되지 않았나? 지금까지 평화 헌법을 고수하면서 경제발전과 민주주의를 일궈냈는데 왜 이걸 포기하고 다른 길로 가려고 하느냐는 문제제기다.
물론 중국이 해군 위주의 군사 대국화로 나아가면서 군비를 대폭 증강하고 있어서 이에 대해 대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상당하다. 일본에는 부상하는 중국에 대한 본능적인 우려가 많다. 실제로 중국, 청나라와 전쟁을 해봤기 때문에 이에 대한 직관적인 공포가 있는 것 같다. 이 공포가 중국의 부상에 뭔가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사고로 이어지면서 아베 총리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9월로 예정된 참의원 심사도 무리 없이 통과될 가능성이 높다.
아베 입만 쳐다보는 박근혜, 전략과 비전은 어디 있나?
프레시안 : 아베 총리의 담화를 보면서 세 가지 생각이 들었다. 첫째, 아베 총리가 주변국 보다는 일본 국민들을 신경 썼다는 점, 둘째 식민지 지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 셋째 후손들은 과거사에 대해 사죄 할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게 굉장히 교묘하게 버무려졌다. 일본 국민들에게 먹혀들어간 측면도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미국도 한미일 동맹이 급하니, 일본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아베 총리 담화를 "아쉽지만 역대 내각의 입장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점을 주목한다"고 평가한 것에는 문제가 있는 것 아닌가?
이수훈 : 한일 관계의 흐름을 보면 이미 지난 6월 22일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식에서 박 대통령이 지금까지 일본과 세웠던 각을 사실상 풀어버렸다. 당시 박 대통령은 과거사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럴 거면 지난 2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왜 한일 간 정상회담도 한 번 하지 않으면서 한일 관계를 최악으로 몰고 갔는지 모르겠다.
박 대통령이 그렇게 강조하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일본과 원만히 해결됐기 때문에 한일 관계 개선이 가능한 것인가?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에 대해 입장을 바꿀 것이라는 신호가 있었나? 물론 한일 정상회담도 하면서 잘 지내보라는 압박도 있었을 것이고 대통령이 이를 수용해야 할 필요도 있었겠지만, 이런 식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를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외교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프레시안 : 박근혜 대통령의 경축사를 보면 아베 담화에 대해 너무 후한 평가를 내린 것 같다. 적어도 아베 총리가 식민지 지배와 관련해 구체적인 언급이 없었다는 점, 후세들은 더 이상 사죄할 필요가 없었다고 이야기한 점 등은 짚고 넘어갔어야 했던 것 아닌가?
이수훈 : 물론 그렇지만, 문제는 우리 내부에도 있다. 한국에서도 일본의 식민 지배를 통해 근대화를 이뤘다고 이야기하는 지식인들이 많지 않나? 정치인들도 있고. 그리고 이러한 정치인들이 상당히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은데, 일본 사람이라면 당연히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지 않을까?
아베의 행보에 대해 우리가 감정적으로 대응할 부분이 있고 국민 정서에 맞춰 대응할 부분이 있다. 그런데 국가를 관리하는 사람은 현실주의적인 사고에 입각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지금 한국 정부는 냉엄하게 이해관계를 따지는 차원의 전략적 사고가 없는 것 같다. 아베 입만 쳐다보고, 그가 뭐라고 이야기하면 거기에 대한 코멘트를 하는 수준이지 않나?
오히려 일본의 전략과 목표는 명확하다. 역동적인 동북아 환경에서 자신들 나름대로 적응하겠다는 것이다. 일본이 세계 2차대전 이후 눈부신 경제 발전을 이룬 것은 평화 헌법에 기반한 평화 국가였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측면이 크다. 그런데 지금은 중국이 부상하고 있고 미국은 힘이 빠지고 있다. 동북아 내에서 힘의 공백이 생기고 있는데, 이때 일본은 이러한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갈지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고민과 전략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것 아닌가?
이러한 부분이 한국에는 부족하다. 현실적으로 한일 관계가 악화되면 경제 부문을 포함해 우리한테도 좋을 것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한일 관계의 악화가 우리한테 피해가 된다면 어떻게 과거사 문제와 한일관계 개선을 가져갈 것인지 전략이 있어야 하는데 그저 아베의 입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지금 한국 외교의 현실이다.
사실 아베 담화는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는 담화다. 또 일본 내에서 총리가 바뀌면 담화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아베 입만 쳐다보고 여기에 맞춰 경축사를 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이유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뒷북, 수세적 대응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금까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있었던 외교 사안을 보면 대개 남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느냐에 대해서만 코멘트를 하고 시비를 거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한국의 국익과 동북아 현실 등을 입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지난 4월에 열렸던 아시아·아프리카 회의(반둥회의)나 지난 5월 초에 러시아에서 열렸던 전승 기념식, 그리고 9월에 중국에서 열릴 전승절 모두 참석 여부를 우리가 주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사안들이었다. 그런데 항상 눈치만 보다가 막판에 어쩔 수 없이 결정하게 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광복 70주년 경축사라면 적어도 향후 30년은 내다보고 어떤 국가가 되겠다는 역사적인 통찰과 전략을 가져가야 했다. 그러면서 여기에 미래에 대한 비전을 담아내고 국민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내야 했는데, 박 대통령의 경축사는 이러한 내용은 아니었다.
아베 총리는 '21세기 구상 간담회'에서 담화에 대한 자문도 받고 직접 만나서 토론을 하기도 했다. 실제 이 간담회에서 일했던 사람을 만나보니 대충대충 일한 것 같은 느낌이 아니었다. 아베 총리는 메시지 발표 하나에도 이런 식의 과정을 거치는데, 우리는 70년의 역사를 기념하는 경축사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너무 근시안적으로 대처한 것 같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만 해도 그렇다. 아베 담화가 발표된 바로 다음 날인 15일 아베 정부의 현직 관료와 국회의원들이 태평양전쟁 A급 전범들이 합사돼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우리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전범들이 합사돼있는 곳인데 여기를 참배했다는 것은, 전쟁에 대해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과 다름 없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이에 대해 외교부 대변인 성명에서 짧게 언급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베 담화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인데도, 오로지 아베 입만 쳐다보고 거기에만 대응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현재 일본의 지도자가 아베라는 것은 중요한 지점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아베도 지도자들 중 한 명에 불과하다. 우리의 이익이 무엇인지에 대한 전략적 사고를 가지고 평가를 하고 대응을 해야 하는데, 지금은 피동적인 수준의 대응만 하고 있다.
프레시안 : 현재 한일 관계는 얼마나 악화돼있다고 진단하나? 향후 한국이 어떻게 대응해야 한일 관계가 바람직한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을까?
이수훈 : 지금의 한일 관계는 이명박 정부 말기부터 시작돼서 3~4년 정도 이어진 해묵은 갈등이 축적돼있다. 이러한 갈등이 저변에 깔려있는 한일 관계를 상당히 해쳤다. 급기야 일본 국민들이 '한국은 자꾸 칭얼거린다'는 이야기까지 하게 된 것이다.
일본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관계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일본 사람들은 현재 한국이 마치 조선 시대처럼 중국과 상당히 밀착돼있다고 인식하고 있다. 일본은 한미일 3국 협력관계를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한국이 정서적, 감정적으로는 중국과 붙어버렸다는 생각이 강하다.
물론 이 중에는 박근혜 정부와 한국이 싫어서 일부러 이런 평가를 내리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전문가 집단 사이에 한국과 중국이 밀착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박근혜 대통령이랑 시진핑 주석이 사이가 좋다며? 정상회담도 화기애애하게 하더라" 라는 식이다.
사실 지금 한일 간 제기되는 현안들은 10년 전에도 있었다. 독도, 위안부, 야스쿠니 신사 참배, 역사 교과서 문제 등등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당시에 지금처럼 문제가 불거지지 않은 것은 한일 관계의 저변을 해치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설사 독도 문제를 두고 우리 해군과 일본의 순시선이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더라도 저변에서는 싸우면 안 된다는, 일본 관련 이슈를 세심히 다루려는 노력이 있었다. 지금 정부에 그런 노력이 있는지 의문이다.
"한국? 별로 중요하지 않아"…달라진 위상
프레시안 : 많은 전문가들이 한국이 외교적 주도권을 가지려면 결국 남북관계를 개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한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이산가족 상봉을 포함해 북한이 받기 힘든 현실성 없는 제안만 하고 있다. 남북관계를 개선해서 북한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있어야 하는데, 박 대통령은 이 부분에서 말만 하고 특별히 행동으로 옮기려는 것은 없는 것 같다. 오죽하면 광복절 경축사에 '빛'이 없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우리가 나름의 중심성을 갖고 여기에 입각해 전략을 만들어내고 이에 따라 외교를 하려면 남북관계 문제에 대해 깊은 고뇌가 있어야 한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가 제대로 추진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기 중반에 다시 무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이 진심이라면 말이다.
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새로운 도약을 위해 경제 문제를 언급했는데, 그렇게 한국 경제가 걱정되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이 남북관계 개선으로 돌파구를 마련해야 한다. 그게 경협이든, 북한의 광물 자원을 가져다 쓰는 것이 됐든 경제의 활로를 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뿐만 아니라 일본의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우려하고 일본군의 한반도 진입을 막기 위해서라도 남북관계를 잘 관리해야 한다. 즉 한반도의 현실을 '유사시'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북한과 관계개선을 위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또 우리가 외부에서 대접받고 목소리를 높이려면 한반도를 정상으로 만들어놓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비핵화를 주제로 남북 대화하자, 국방 장관 회담 하자고 하면 미국과 일본, 중국 모두 움찔할 수밖에 없다. 결국 외교 측면에서 주도성을 발휘하려면 한반도 현실이 급격히 개선되지는 않더라도 북한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있어야 한다.
남북관계 개선에 힘써도 모자랄 판에, 평화통일에 역행하는 일들이 거의 매일 벌어지고 있다. 일례로 북한과 대화하려고 하면 전부 북한의 전략에 말려드는 것이라고 사고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면 영원히 회담 못 한다.
프레시안 : 그런데 최근의 외교 현실은 우리가 주도권을 갖는 것은 고사하고, 강대국의 입김에 휘둘리고만 있는 것 같다.
이수훈 : 사실 이번 아베 담화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보면 우리가 미국에 뒤통수를 맞은 것이나 다름없다. 한미 간에 동맹 강화만 생각하면서 우리는 미국과 대부분의 사안에서 동일한 행보를 보이고 있다. 심지어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의 경우에도 우리의 안보에는 별로 효용이 없는 것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이 도입하는 것은 찬성하면서 미국과 파트너십을 강하게 가져가고 있지 않나? 그런데 정작 중요한 우리의 입장이나 우려 지점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보면 대단히 배반감을 느낄 정도다.
이러다 보니 다른 나라가 우리를 어떻게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 지난 5월경 베이징에서 열린 중·일 안보협력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중국이 10년 전과 너무 많이 변했더라. 중국 전문가들, 반(半)관료들, 군인들의 경우 7~8년 전에 대화를 나눴을 때는 신중함이 느껴졌는데, 이번에는 예전 청나라 시대의 중국과 같이 느껴졌다. 말을 오만하게 하기도 했고, 우리가 이야기하면 '너희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라고 말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중국 측 참석자는 시진핑 주석이 반둥 회의에서 지속가능한 안보관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이 무엇인지 설명하면서 당신들과 협력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가버렸다. 그래서 '아, 이 사람들은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가 별로 중요하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판단을 했다.
중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은 사드 배치 문제만 해도 한국은 미국의 요구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미국과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냐는 의심이다. 한국은 미국이 강하게 밀어붙이면 거부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다. 독자성을 가진 하나의 국가로 보지 않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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