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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일 버틴 강정은 기적, 무관심의 벽 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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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00일 버틴 강정은 기적, 무관심의 벽 깨야"

[언론 네트워크]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반대 도미야마

도미야마 마사히로(60·Masahiro Tomiyama).

낯선 일본인 이름이지만, 일본과 오키나와, 국내 평화운동가들에게는 제법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오키나와 섬 토박이로 40년간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반대 투쟁을 펼친 일본의 대표적인 평화운동가다.

현재 '오키나와-한국 민중 연대' 공동대표를 맡아 두 지역의 평화 연대를 주도하고 있다. 2012년에는 한국 정부로부터 입국 금지 조치를 당하고, 국내 언론 매체에서 오키나와 소식을 다룰 때 수시로 등장할 만큼 나름 인지도를 가지고 있다.

휠체어 없이는 거동이 불편한 그가 강정을 찾았다. 2015 강정 생명 평화 대행진에 오키나와 주민을 대표해 참가한 것이다.

▲ 2015 강정 생명 평화 대행진에 참가한 일본 오키나와 평화운동가 도미야마 마사히로. ⓒ제주의소리

왜 오키나와 사람이 뜬금없이(?) 강정까지 왔냐고 물어볼 수 있다. 사실 오키나와는 제주와 비슷한 아픔의 역사를 간직한 지역이다.

오래전 류큐(琉球)왕국이라는 독립된 나라였던 오키나와는 1872년 일본에 편입됐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을 향해가던 1945년 3월 오키나와에서 미국과 일본이 맞붙은 일명 '오키나와 전쟁'으로 현지 주민 15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오키나와 인구 4명 중 1명이 사망한 셈이다.

종전 이후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미군은 오키나와에 강제로 자리를 잡기 시작해 현재까지 주둔하고 있다. 미 해병대, 육군, 공군 등 11개 군사 기지가 주둔해 있으며 이는 오키나와 섬 전체 면적의 20%에 달한다. 일본 전역에 주둔하는 미군 병력의 73.8%가 오키나와에 있다. 이 정도면 주민들 입장에서는 ‘점령’이라고 받아들여도 무방한 수준이다.

1995년 미군 병사가 저지른 소녀 성폭행 사건 이후 오키나와의 반미 열기는 뜨거워졌고, 이후 오키나와 북동부 지역의 헤노코 해안을 매립해 비행장을 새로 건설하겠다는 '헤노코 미군 기지' 계획이 가시화되면서 투쟁의 강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리고 지난해 11월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헤노코 기지 건설을 반대한 후보(오나가 다케시)가 당선되면서 상황은 급변해, 기지 건설을 밀어붙이려는 아베 정권, 미국에 오키나와가 맞서는 상황이다.

'탐라'라는 고유한 이름을 가졌던 옛 역사, 4.3이란 대규모 희생을 경험한 끔찍한 현대사, 군사 기지로 갈등을 겪는 최근까지 제주와 오키나와의 많은 부분이 겹쳐진다.

도미야마 씨를 비롯해 이번 대행진에 참여한 오키나와 주민 6명은 지난 5월 강정주민들이 오키나와에서 열린 미군 기지 반대 대회에 참여한 데 따른 화답 형식으로 온 것이다. 당시 반대 대회에는 현지 주민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3만5000여 명이 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평화 대행진 3일차인 29일, 강렬했던 햇빛이 마지막 힘을 쏟아내는 오후 4시쯤 서귀포시 성산읍 온평초등학교에서 도미야마 씨를 만났다.

이날 제주는 올해 제주 지역 최고 기온이자, 전국 최고 기온을 기록할 만큼 무더웠다. "괜찮냐"고 인사말을 전하자 도미야마 씨는 "오키나와는 훨씬 더운 곳이라 문제없다"고 호탕하게 웃었다. 강한 인상, 굵은 팔뚝, 검게 탄 종아리와 발목에서 제주와 유사한 섬사람의 느낌을 받았다.

그는 "오키나와 미군 기지 반대 주민들은 약 15년 전부터 한국 평화운동가들과 교류를 하기 시작했고, 2000년부터는 직접 갈등의 현장에 찾아가서 돕는 방식으로 교류를 이어갔다"며 자신도 미군 기지 건설로 충돌이 벌어진 평택 대추리와 강정 등을 방문했었다고 말했다. 통역은 이길주 제주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도움을 줬다.

도미야마 씨가 3000일을 싸워온 강정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인지 궁금했다.

그는 "작은 마을에서 군과 폭력적인 갈등을 겪으며 3000일이나 투쟁을 이어온 것은 기적이다. 생계를 이유로 함께하지 않는 주민들과의 갈등을 비롯해 여러 가지 대립을 이겨내는 모습까지 정말 감동적"이라고 말했다.

도미야마씨에게 다짜고짜 '강정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냐'고 물었다. 오키나와는 수십 년을 미군이란 위압적인 존재와 부딪히며 싸워왔고, 그 갈등의 한가운데서 지금껏 버텨온 장본인이기에 뭔가 시원한 답변이 돌아올 줄 알았다.

ⓒ제주의소리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도미야마씨는 "내가 당신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면 오키나와의 투쟁은 더욱 진전될 것이다. 이 문제(군사 기지 반대 운동의 미래)는 오키나와도 똑같이 고민하고 있다"고 했다.

다만 "지금 내 눈 앞에 있는 사람들을 보라. 행진 참가자 대부분이 밝은 표정이다. 가족 단위 참가자도 많다. 다양한 시민들이 함께하는 모습은 우리도 참 부러운 대목이다. 밝은 투쟁이 더 희망적이다. 강정주민들이 절망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조언했다.

도지사에게 속고 정치인에게 외면당하고 사람들의 관심에서 차츰 멀어지는 것 같은 악조건 속에서, 여전히 많은 이웃들이 강정을 응원하고 지지한다는 사실을 되새기게 하는 말이다.

도미야마씨는 휠체어를 타고 대행진에 참여했다. 몇 년 전 헤노코 기지 반대 운동 중 다리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으면서 휠체어 신세를 지게 됐다.

그렇지만 불편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지금도 휠체어를 타고 반대 운동에 참여한다. 이곳저곳을 손봤지만 아직 튼튼하다. 이 휠체어가 오키나와 헤노코 기지 반대 운동의 역사"라고 자신의 '애마'를 소개했다.

어느새 마지막 일정을 향해 출발하겠다는 신호가 온평초 운동장에 울려 펴졌다. 노란색들이 우르르 모인다. 땀에 절고 햇빛에 바랜 흔적이 역력하다. 그러나 가슴부위에 새겨진 'PEACE'(평화) 글자는 변함없이 선명하다.

도미야마씨도 함께 일어났다. 하얀색 수건을 머리에 질끈 동여매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오키나와 스타일"이라고 엄지손가락을 세운다.

떠나기 전에 강정, 그리고 강정을 바라보는 제주도민들에게 한마디씩 해달라고 요청했다.

"절망하지 말고 지금처럼 밝게 싸워라. 당신들은 훌륭하다." 강정에 대한 말이다.

"작은 창문을 열고 나가면 강정이 보이는데 안타깝다." 제주도민들을 향한 말이다.

'제주도민들이 왜 안타깝느냐'고 다시 물었다.

잠시 고민 하던 도미야마씨가 답변했다. 열정 넘치는 이국의 60대 평화운동가가 제주사람들을 향한 대답은 날카로웠지만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이 느껴졌다.

"행정, 정치인들은 (군사 기지) 반대 운동을 고립시켜 주위에서 관심이 없어지도록 한다. 일종의 벽을 친 것이다. 제주도민들은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권력에 의해 벽에 갇혔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신을 가둔 그 벽을 깨지 못해 아쉽다. 밝게 싸우는 강정 주민들의 모습을 알아주길 바란다."

지난 23일 도미야마 씨는 강정 마을의 해군기지 반대 투쟁 3000일을 맞아 기고를 작성했다. 글은 한글로 번역돼 <오마이뉴스>에 게재됐다.

▲ 휠체어를 타고 강정 생명 평화 대행진에 참여한 도미야마 마사히로 씨(가운데). ⓒ제주의소리

프레시안=제주의소리 교류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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