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주의 이론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다. 신자유주의의 큰 파도가 휘몰아친 후 이데올로기적 담론들이 거의 모두 파괴된 듯한 상황에서 사회민주주의라는 이론 프레임을 내세우기에 '아직도’란 표현을 쓰는 것이다.
지금 세계는 대세가 복지 사회 또는 복지 국가의 방향이다. 유럽 모델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북유럽, 특히 스웨덴 모델을 내세우기도 한다. 그러한 이론들을 종합해서 사회민주주의적 이론 프레임이라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너무 엄격하게 교조적으로 이론화하여 이야기하지 않고 대체적인 조류로만 이야기한다면 이런 정책적 경향들은 지식인 사회의 본류를 이루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가 아니고 민주사회주의라고 해도 괜찮다. 전날에는 그 어순(語順) 문제를 놓고 다투다가 '카레 라이스'와 '라이스 카레' 이야기까지도 빗대어 나왔었다. 미국에서는 'liberal(리버럴)'이라는 단어를 매우 다의(多義)적으로 쓰는 것 같다. 특히 정치에 있어서는 개혁적, 진보적이란 뜻을 갖다가 유럽 사회의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뜻도 포괄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여하간 그러한 사회민주주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그 대표적인 이론가 또는 이론의 체현자(体現者)는 두산(斗山) 이동화(李東華) 씨라는 데에 이견이 별로 없을 줄 안다. 그는 일본에 유학하여 당시의 동경(東京)제국대학 법문학부 정치과에서 공부를 하였으며, 이승만 압제 후 민주주의가 만개하였던 4·19 공간에서 대표적인 혁신 정당인 통일사회당(통사당)의 정치위원장, 그러니까 당수를 지냈다.
그런 이동화 씨가 1987년 팔순을 맞았을 때다. 그때 두산의 팔순도 축하하고 우리나라에서 사회민주주의 진전에 관한 한 이정표를 세우기도 할 겸 큰 행사를 가져볼 생각을 하였다. 두산과 아주 친밀한 동지인 경심(耕心) 송남헌(宋南憲) 선생과 상의하고 김학준(金學俊) 박사에게 전기 집필을 부탁했다. 김 박사는 나와 <조선일보> 정치부 시절부터 가까운 사이이다. 그리고 그 취지를 여러 사람에게 설명하여 스물네 분의 찬동을 얻고 그분들로부터 고루 상당한 금액의 협조를 받았다.
김학준 박사는 두산이 평소에 준비해 둔 많은 자서전적 자료들을 얻어 작업을 할 수가 있었는데 그가 집필한 <이동화 평전-한 민주사회주의자의 생애>는 민음사에서 아주 훌륭한 책으로 나왔다. 단기간 안에 전기 집필을 마친 김 박사는 역시 세상에 알아주는 대로 대단한 두뇌이고 필력이다. 그리고 서울시청 앞 플라자 호텔에서 성대한 팔순연이 열렸다. 김상협 전 총리 등 두산의 동경대학 동문이 대거 참석하고 혁신계 인사들도 많이 왔다.
행사 후에는 중학동에 있는 한정식집 '중원'에서 발기인들을 위한 뒤풀이 행사가 매우 의미 있게 진행되기도 했다. 24명 발기인의 명단이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여기에 다시 밝혀둔다. 이 명단은 평전의 말미에 수록되어 있다. 직책은 당시 발표했던 직책 그대로다.
고건 (국회의원·전 농수산부 장관)
고정훈 (민주사회주의연구회의 이사장)
권두영 (사회민주당 위원장)
김상현 (전 국회의원·전 민추 공동의장 대리)
김수한 (국회의원·신민당 부총재)
김영작 (국민대 교수·정치학)
김정례 (국회의원·전 보사부 장관)
김종인 (국회의원·서강대 교수)
김진현 (동아일보 논설실장)
남재희 (국회의원·민정당 서울시위원장)
박동운 (한국일보 논설위원)
박진목 (통일운동가)
송남헌 (민주사회주의연구회의 부의장)
송지영 (소설가)
신범식 (전 문공부 장관)
유근주 (민족통일촉진회 운영위원회 의장)
윤길중 (국회의원·전 국회부의장)
이기택 (국회의원·신민당 부총재)
이병주 (소설가)
이승목 (통일일보 주간)
이종찬 (국회의원·전 민정당 원내총무)
임종철 (서울대 교수·경제학)
정구호 (한국방송공사 사장)
최상징 (실업인)
(가나다순)
나는 4·19 공간에 <민족일보>의 국회팀 일원으로 각 정당을 분담하는 가운데 정치부 후참이라 하여 혁신 정당들을 담당하였다. <민족일보>는 4·19 전에 <세계일보>였던 것을 새 진용으로 짜고 이름을 바꾸어 재출발했던 것으로 5.16 후 얼마 있어 경영난으로 자진 폐간하였다.
혁신 정당들이 여럿 있었지만 민의원, 참의원의 국회의원을 5명쯤 거느린 정당은 통일사회당(통사당)뿐으로 그래도 제대로 된 정당다웠다. 그 당시의 실질적 당수는 동암(東庵) 서상일(徐相日) 씨였지만 밖으로 내세운 당수 격인 정치위원장은 이동화 씨, 부당수 격이라 할 당무위원장은 송남헌 씨였다. 형식상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실제와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정치위원회에 김성숙 씨 등 거물급 혁신 정객이 많이 포함되었을 뿐 아니라 원내대표인 윤길중(尹吉重) 씨의 비중도 매우 컸기 때문이다. 여하간 그때 이동화 씨는 혁신 정치의 대표적 이론가로 기자들에 각인되었었다. 용모도 아주 준수하고 이지적이고.
그 후 세월이 지나 내가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되었을 때다. 그 방의 분위기가 지난날의 혁신 정당적이다. 주필인 최석채 씨, 논설위원인 양호민 씨가 둘 다 4.19 후 대구에서 통일사회당의 전신인 사회대중당으로 출마한 바 있다. 그때 대구시에서는 이들 둘 말고 서상일, 이동화, 김수한 씨 등이 민의원에 출마했었다. 그리고 역시 논설위원인 김성두 씨도 그때 혁신계로 경남에서 출마했었다는 이야기이니 완전 혁신계적인 분위기다. 최석채 씨는 친목 모임을 만들어 김수한 씨 등과 계속 친분을 유지하고 있다.
<조선일보>에서 불가피한 사정이 있어 <서울신문>으로 자리를 옮겨보니 그때의 사장인 신범식 씨가 공교롭게 이동화 씨를 대단히 존경하고 있었다. 청와대 대변인과 문공부 장관을 지낸 신 씨는 그 전에 성균관대에서 정치학 시간 강사를 했고 그때 이동화 씨를 모신 모양이다. 신 사장이 이동화 씨를 대하는 태도는 깍듯했다. 나는 정말 공교롭게 계속 그런 분위기 속에 있었다.
내가 주책없이 정치에 몸을 담은 후에도 몇 번인가 두산 선생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의 두산은, 미안한 이야기이지만, 추레했다. 평생을 혁신 정치에 몸 담았고, 혁신 정치는 탄압 당하고 있으니 어찌 경제적으로 궁색하지 않았겠는가. 대단히 고생스러운 생활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집을 찾아가 보았더니 안암동 뒷골목의 초라한 아파트의 13평짜리 주택이었다.
두산을 생각함에 있어서 중요한 한 부분이 그가 동경제대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는 것이다. 그 점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는 평양에서 그리 멀지 않는 평남 강동군에서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도 넉넉한 집에서 태어났다.
1925년 평양 광성고보 4년을 수료하고 일본으로 갔다. 우선 구마모또(熊本) 현립 세이세이꼬오 중학을 다니다가 야마구치(山口) 고등학교에 들어갔다. 그때의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인 셈이다. 1929년 야마구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동경 제국대학 법문학부 정치학과에 입학한다. 동경제국대학에 입학한 것을 보면 두뇌가 매우 명석했던 것 같다. 일본인들도 부러워하는 동경제대가 아닌가. 흔히 '아까몽(赤門)'이라고 한다. 동대의 정문이 붉은색이기 때문에 그 '아까몽'의 자부심은 대단하다.
거기서 두산은 고등문관 시험이라는 입신 출세의 길을 택하지 않고 순수 학문의 길을 택한다. 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 역시 그의 민족 정신이 살아있었음을 말한다.
그의 유학 시절 영향력 있던 학자로는 동경제대의 가와이 에이지로(河合栄治郎) 교수와 교토(京都)제대의 가와가미 하지메(河上肇) 교수를 말하는 이들이 많다.
가와이 에이지로 교수에 관하여는 김학준 교수의 글을 인용한다.
"도쿄제대 정치학과의 가와이 에이지로 교수는 본질적으로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자유주의를 옹호한 이론가였다. 1891년에 도쿄에서 태어나 도쿄제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그는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교에서 영국의 고전적 정치사상들을 연구했으며, 특히 옥스퍼드 대학교 교수로서 개인주의적이면서 자유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 정치사상을 정립한 정치학자로 꼽히던 토머스 힐 그린(Thomas Hill Green)을 깊이 연구했다. 그리하여 <토머스 힐 그린의 사상 체계>와 <사회사상가 열전>을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독일 사회민주당과 영국 노동당을 깊이 연구하면서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을 찾고자 노력했고, 이러한 맥락에서 사회주의의 전파에 일정하게 기여하였다. 가와이 교수로부터 직접 배웠던 두산은 그가 스스로 '유럽적 사회주의자'라고 불렸다고 회상했다."
가와이 교수는 제2차 대전 때 일본 군국주의에 저항하다 옥사했다. 그에 관해 읽은 바 있는 나는 일본 여행 때 일본 도쿄의 유명한 고서점가인 진보쪼에서 그의 마지막 책 <자유주의의 옹호>를 찾아서 사고서는 감개가 새로웠던 일을 기억한다.
가와가미 하지메 교수에 관하여는 교토대학에서 공부한 이정래(李晶來) 씨의 회고담을 내가 기록한 게 있다. 이 씨는 전남 보성에서 한민당(한국민주당) 이래의 야당 국회의원을 여러 번 지낸 깐깐한 지조의 인물이었다.
"경대(京大)에서는 마르크시즘의 세계적 권위자인 가와가미 하지메(河上肇) 교수가 있어 그분의 강의를 많이 듣고 따랐다. 한국 사람으로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 제국주의와 싸워야 하는 것인데 가와가미 교수도 마르크시스트로 일본 제국주의와 싸우고 있어 투쟁 대상이 일치하였기에 사상 문제를 떠나 그를 따랐던 것 같다.
가와가미 교수는 바싹 마른 분으로 그의 강의가 명강의일 뿐만 아니라 조크도 섞어가며 재미있게 하기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 대단한 인기였다. 경대에서 제일 큰 강당에서 주 2회 2시간씩 경제원론을 강의했는데 인문계 학생뿐만 아니라 공대, 농대 학생들도 몰려와 인산인해를 이루기 때문에 새벽 6시부터 나와 자리를 잡으려고 야단이었다는 것이다.
가와가미 교수는 월간으로 <사회연구문제>를 발행하면서 학생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들을 골라 자기 집에서 매주 목요일에 그 잡지를 중심으로 세미나를 가졌었다. 그 세미나에 일인 학생 8명과 한국인 학생 3명이 참가하였었다."
가와가미 교수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경제학 대강(經濟學大綱)> <가난 이야기> 등이 있다.
귀국하여 혜화전문학교(오늘날의 동국대학) 교수로 있던 두산은 일제에 의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구속되어 서대문 경찰서와 서대문 형무소에서 오랫동안 고생을 했다.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았다.
1944년 8월에 몽양 여운형의 주도로 조선건국동맹이 조직되었을 때 두산도 참여하였다. 그리고 몽양의 부탁을 받아 '현하 국제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라는 긴 논문을 작성하였다. 그중 일부를 인용한다.
"반파시즘 전쟁인 2차 대전에 있어서 미, 영, 불 등 서방 민주국가들과 긴밀한 협력을 하였던 귀중한 경험과 이 대전이 끝난 뒤 전체 인류 사회를 휩쓸게 될 거센 민주적 조류의 덕택으로 소비에트 공산주의의 민주화 과정은 점차 촉진될 것이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은 이 대전에서의 쓰라린 경험과 공산주의 소련으로부터 자극 내지 충격의 덕택으로 자기 수정적인 사회 개혁을 광범히 실시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이리해서 동서의 양대 진영은 민주적인 역사적-사회적 대변혁의 방향에서 점차로 상호 접근을 하게 될 것이다."
결론은 동서양 체제, 또는 공산.자본 양 체제의 수렴이론이다. 이때의 그 수렴 이론이 그 후에 있어서의 그의 행보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때 외국의 학계에서도 Conversion Theory(전환 이론)라고 그런 이론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그러기를 바라는 희망적 관측(wishful thinking)을 하고 있었다. 그러면 오죽 좋고 평화스러우랴. 그런데…. 두산이 그 후 통일사회당을 하는 등 혁신 정당 활동을 계속함에 있어서도 그런 수렴 이론이 바탕에 깔려 있었을 것이라고 본다.
해방 후 서울에 있던 두산이 평양으로 간 데 관하여는 단순히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는 이른바 귀소본능(歸巢本能)만으로 쉽게 설명될 수도 납득될 수도 없는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러나 그의 설명에 따르면 우연한 친구의 권유를 받아 순간적 판단으로 고향에 가보고 싶다고 하여 평양에 갔다는 것이다.
거기서 처음에는 조만식 선생이 경영하는 <평양민보>의 주필이 되고, 조·소(북한·소련) 문화협회 부위원장이 되었으며 김일성대학의 교수가 되기도 한다. 6·25가 터져 국군이 평양을 점령하였을 때 그에게는 기적과도 같은 행운이 일어난다. 친구의 소개로 백인엽, 백선엽 장군과 연결이 된 것이다. 평양의 명문 학교인 평양사범 출신인 백인엽 장군은 동향의 수재, 동경제대 출신 이동화 씨를 익히 들어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여하간 남쪽으로의 비행기 편을 제공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남쪽에 온 두산에게 육군본부 정보국 제5과 문관 자리를 알선해 준 것이다. 어떤 면에서 백 장군은 두산의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52년 두산은 경북대학교 법정대학 정치학과 주임교수가 되었다. 짐작건대 이 일이 두산이 대구와 인연을 맺게 되는 계기가 되어 나중에 대구에서 민의원에 출마도 하였으며, 대구·경북 지방의 '프린스(귀공자)' 소리를 듣던 동암 서상일 씨와도 친밀해진 게 아닌가 생각이 든다.
1955년 말 진보당 창당 준비위가 구성되었을 때 두산은 준비위원이 되고 진보당 강령을 기초한다. 그 강령에 '사회적 민주주의'란 개념을 삽입하여 'Social democracy' 그러니까 사회민주주의란 정치 이념을 결과적으로 진보당의 간판으로 내걸게 한 것이다.
그러면서 막상 진보당이 발족할 때 그는 진보당에 참여하지 않고 나중에 생긴 민주혁신당(민혁당)에 가담한다. 죽산 조봉암을 택하지 않고 동암 서상일을 택한 것이다.
두산으로서는 정치적 갈림길에 섰었다고 하겠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하는 데 대해서 나는 아직 결정적인 설명을 듣지도 못했고 자료도 발견하지 못했다.
추리컨대, 두산은 경북대학교에 있을 때부터 동암을 알고 지내게 되었다. 먼저 친밀했던 것이다. 인격적인 감화도 받았을 것이다. 그 후 진보당 추진 과정에서 죽산 조봉암을 뒤늦게 알게 된다. 그리고 죽산 주변의 패거리는 그 집요함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여러 사람의 증언이 있다. 흔히 '7인방'이라고도 하고, 죽산의 거택 약수동에서 이름을 따서 '약수동파'라고도 하는데 대부분이 함경도 출신인 것으로 알려졌다. 정태영 씨가 남긴 기록에 의하면 자기와 안준표 씨 둘은 함경도 출신이 아닌데 '7인방'으로 간주되어 비판을 받았다고 억울해한다. 여하간 이들이 동암에게 "한민당 지주 계급 출신 반동" 운운하며 모욕적인 언사를 쓴 모양이다.
그 밖에 같은 동경제대 출신 신도성 씨도 동암 쪽에 편들어 민혁당에 속했던 것을 보면, 동경 제대 출신 인텔리(지식인)들에게는 동암의 온건해 보이는 보수개혁 노선이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서 빠뜨리지 않고 챙길 이야기가 있다. 죽산의 전반기 참모인 이영근(李英根) 씨는 두산이 당 강령에 '사회적 민주주의'라고 사회민주주의를 집어넣는 것이 큰 과오라고 계속 비판을 했다. 그는 당시 자유당 정권의 모략에 걸려 형을 살다가 병보석 중이어서 창당 작업에 관여할 수 없었다.
이영근 씨는 당시의 한국 상황에서 민족 자주, 자립 경제, 평화 통일 등 국민 성원 다수가 받아들일 수 있는 주장을 내세우면 되었고 또 충분하지, 굳이 서양에서 수입한 사회민주주의라는 우리 국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정치 개념을 쓸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반박한다. 그가 이야기는 안 했지만 6·25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운동에 가슴이 썰렁한 국민들이 아닌가. 거기가 대고 '사회민주주의' 운운하고 '사회…주의'를 풍기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는 격이다.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어떤 정치 개념이나 이데올로기를 먼저 정하고 정치 현실에 뒤집어씌울 일은 아니라고 본다. 현실을 면밀히 관찰하여 거기에 맞는 정책 처방을 제시하는 순서가 옳은 게 아닌가. 꼭 어떤 이데올로기에 매일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매이는 것이 '책상물림'이라는 서생(書生) 취향이다.
나는 진보당 창당 당시의 조건이나 사정들을 보아 이동화 씨의 생각보다는 이영근 씨의 판단이 옳다고 여긴다. 물론 '사후약방문'이라는 말이 있듯이 이제는 모두 허무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5·16 군사쿠데타 세력의 혁신계 일망타진에 걸려 3년여 형무소에 있다 나온 두산의 그 후 활동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탄압 하에 혁신계가 맥을 쓸 수가 없었다. 그 후 김철 씨의 정당과 서민호 의원의 정당에 관여를 하였으나 그렇고 그런 것이었다.
나중에 민족통일촉진회가 참가하여 사회 원로로 통일 운동에 나섰다. 그래도 마음에 맞았던 것은 1981년 고정훈 씨가 창당한 민주사회당에 고문으로 참가한 일이다.
두산은 고정훈 씨와는 의기가 투합했던 것 같다. 그보다는 고정훈 씨가 왕년의 통사당 선배 이동화 씨와 송남헌 씨를 계속 깍듯이 모셨다. 수완이 능란한 고 씨는 민주사회주의연구회의를 꾸려가면서 두산을 의장, 경심을 부의장으로 모시고 자신은 운영이사만을 맡았다. 그리고 꾸준히 사업을 계속하면서 그 연구회의는 그들의 말년까지 계속되었다. 정당인들 사이에 있는 드문 미담이다. 흔히 '아사리판'이라 하는 정치판에서 그러기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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