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0월 27일 일본 후생노동성 장관은 후생노동성 고위 간부들과 함께 90도로 머리를 숙였다. 장관 등한테서 사죄의 인사를 받는 쪽은 일본 국가를 상대로 피해 배상 소송을 낸 오사카, 센난(泉南) 시 석면 방직 노동자와 그 유족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재일동포도 다수 포함돼 있었다. 정상 호흡을 할 수 없어 늘 산소통을 휴대하고 다니는 재일동포 2세이며 간호사 출신의 오카다 요코 씨도 사죄를 받는 자리에 함께했다. 10살 때부터 석면 방적, 방직 일을 했던 일흔 살의 재일동포 2세 석면 피해자 한고자 할머니도 이 자리에 있었다.
장관이 고개를 숙일 수 있는 한 최대한 숙이며 사죄하는 모습은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낯설다. 세월호 사건, 메르스 사태를 겪었지만 좀처럼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다. 메르스로 숨진 희생자의 유가족을 장관이나 총리, 대통령이 직접 찾아가거나 정부 청사, 청와대로 초청해 사죄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 적이 없다. 되레 민간인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이 더 익숙하다.
후생노동성 장관이 센난 석면 피해자들에게 깊이 사죄한 것은 일본 최고 재판소, 즉 대법원이 센난 지역 석면 방직 노동자들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2014년 10월 9일 최고 재판소는 오사카, 센난 석면 국가 배상 소송과 관련해 국가가 규제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않았다는 위법 사실을 인정하는 판결을 했다.
일본 대법원이 석면 피해에 대한 국가의 책임을 처음 인정한, 매우 의미 있는 판결이었다. 당시 <한겨레> 등 일부 국내 신문도 이 판결에 관심을 갖고 "정부가 석면의 위험성을 알고도 제때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면 석면 피해에 국가의 책임이 있다는 일본 대법원의 판결이 나왔다"며 "앞으로 한국 등에서 진행되는 석면 피해 소송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주목된다"고 밝혔다. 하지만 아쉽게도 국내 노동자 및 환경 피해자 석면 소송에서 우리 법원 국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 대법원과 한국 대법원의 전혀 다른 판결 태도
최근 들어 우리 대법원이 국민의 손을 들어주는 전향적인 판결보다는 기득권층을 옹호하는 듯한, 매우 보수적인 판결을 잇달아 내놓고 있다. 우리 일부 언론이 센난 석면 재판 때 일본 대법원이 보여준 판결을 우리나라에서 기대하거나 주목하는 것 자체가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것이란 비판을 받을 수 있겠다.
오사카, 센난 지역 일본 피해자들과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국가 배상 책임 판결을 얻어내기까지 매우 험난한 여정을 걸었다. 1차(진) 소송단은 지역 재판소(1심)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받았으나 고등법원(2심)에서는 패소하고 말았다. 이에 굴하지 않고 다른 2차(진) 소송단이 다시 국가를 대상으로 피해 배상 소송을 냈다. 이 소송에서는 지역 재판, 고등법원, 대법원 모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아 낸 것이다.
일본 법원은 일본 정부가 석면이 인간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지난 1958년께 확인하고도 노동자들의 석면 피해를 막기 위해 구체적 조처를 시작한 것은 13년이 지난 1971년이 되어서였다는 사실을 적시했다.
그 이후 일본 정부는 분진 농도 규제 강화(1988년), 분진 마스크 착용 의무화(1995년) 등의 조처를 쏟아냈지만, 석면에 장기간 노출된 노동자들은 이미 시한폭탄을 폐에 가득 적재하고 난 뒤였다. 이들은 20~50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악성중피종, 폐암, 석면폐와 같은 불치의 질환을 얻고 만 것이다.
"국가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 보호를 위해 규제를 해야"
대법원은 1958년에는 이미 일본 정부가 작업장에 배기 장치를 설치할 수 있는 충분한 기술이 보급돼 있어 이를 설치하도록 의무화할 수 있었는데도 13년 동안이나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하며 국가 책임을 인정했다.
"국가는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한 신속하게' '제때, 그리고 적절하게' 규제 권한을 행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얼마나 멋진 판결 이유인가.
"국가는 산업 발전을 최우선으로 여겨 국민의 생명과 건강을 희생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법관들이 명심, 또 명심해야 할 대목이다.
센난 지역은 오사카 남부의 5개 시, 3개 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옛날부터 면화 재배를 하며 섬유 산업이 번창하던 곳이다. 20세기 초부터는 석면 방직 공장이 집중적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석면 질환도 얼마 뒤 속출하기 시작했다.
1940년 일본 보험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12.3%가 석면폐에 걸렸고 20년 이상 근무한 노동자의 경우 100%가 석면폐 환자였다고 한다. 이들이 얼마나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석면 먼지를 많이 들이마셨는지를 엿볼 수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재일 한국인(동포)이었다. 1920년대 오사카 지역에는 조선인 방직 여공만 3000명이나 됐다고 한다. 전쟁 때에는 주로 군수 물품을 조달하기 위해 석면 공장을 가동했다. 전쟁 뒤에는 각종 생활용품과 건축자재, 가전제품 등에 석면이 쓰이기 시작하면서 센난 지역의 석면 산업은 다시 호황을 맞이했다.
오사카, 센난 지역 재일 한국인 다수 석면 방직 일에 뛰어들어
센난 지역 재일 한국인들은 배운 게 석면 방직 밖에 없어 때론 노동자로, 때론 영세 소규모 가내 공장 자영업자로 일하면서 석면에 줄곧 노출됐다. 센난 지역 석면 방직업은 일본 열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2005년 6월 구보타 쇼크(석면이 직업병뿐만 아니라 환경성 질환, 곧 공해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이 일본인들에게 널리 각인된 사건) 직후 문을 닫았다.
구보타 쇼크의 여파는 곧바로 센난 지역에 몰아쳤다. 지역 언론 매체와 센난 시의회의원과 지역 공동체 활동가 등이 앞장서 센난 석면 방직 공장의 문제와 실태를 드러내고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을 한데 묶어내는 작업을 벌였다.
센난 석면 피해 시민 모임은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재일 한국인이 10여 명 포함된 석면 피해자 59명에 대한 국가 책임을 묻는 국가 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9년 만인 2014년 10월 일본 최고재판소(대법원)에서 대부분 승소했다. 그리고 이제 3차(진) 소송단을 꾸려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일본 법원이 석면 피해자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인정하면서 1971년 이전, 즉 일본 정부가 석면 공장에 배기 장치 설치를 의무화하기 이전 석면에 노출된 노동자로 한정했다는 아쉬움은 물론 마음 한구석에 남는다. 하지만 이는 직업성 피해든, 환경 피해든 그리고 석면뿐만 아니라 가습기 살균제를 비롯한 여러 다양한 화학물질과 발암물질 피해에 대해 '나 몰라' 하는 우리 기업과 재판부와는 판이하다.
일본 석면 피해 재판 역사상, 아니 일본 직업병. 환경 피해 재판을 통틀어 오사카, 센난 석면 피해 노동자 소송의 승리는 또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그 전설이 현해탄을 건너 한반도에서도 재현됐으면 하는 것이 한국 석면 피해자들과 석면 추방 운동을 벌이고 있는 활동가들의 한결같은 바람일 것이다.
☞구보타 쇼크 10년, 한일 석면 문제 대해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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