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박 당한 유서...그런데 이상하다
국가정보원 임모 과장의 마지막 말은 저격됐습니다. 유서에 남긴 그의 말은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검증의 대상이 돼 버렸습니다.
<한겨레>가 오늘 나나테크 허손구 대표와의 인터뷰를 보도하면서 눈길을 끌 만한 사실을 전했습니다. 해킹의 주 타깃이 중국에 있었다며 임 과장은 그 타깃을 "중국에 있는 내국인이라고 표현했다"고 밝혔습니다.
허손구 대표의 주장은 임 과장의 유서 내용을 정면에서 부정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는 유서의 한 구절을 뒤집는 것입니다. 더불어 마지막 유언의 비장함이 내포하는 진정성을 믿어야 한다던 국정원과 새누리당의 주장에 제동을 거는 것이기도 합니다. 해킹 프로그램은 해외 북한 공작원만을 대상으로 사용했다는 이병호 국정원장의 국회 답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기도 합니다.
'중국에 있는 내국인'이 대공 용의점이 있는 인물이라면 해킹 대상이 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문이 나올 법 하지만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임 과장은 유서에서 '내국인'은 사찰하지 않았다고 전칭했고, 이병호 원장은 국회에서 해킹 대상을 '해외 북한 공작원'으로 특칭했습니다. '대공 용의점이 있는 내국인'은 두 사람의 말 어디에도 없습니다.
게다가 쉽게 가려질 일입니다. '대공 용의점이 있는 내국인'의 핸드폰을 해킹하려면 통신비밀보호법에 따라 고등법원 수석부장판사의 허가를 받아야 합니다. 국정원이 정말 허가를 받고 '중국에 있는 내국인'의 핸드폰을 해킹했는지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그러지 않았다면 그 자체가 불법이고 사찰입니다.
상황 판단은 이렇게 단순하고 명쾌합니다. 헌데 왜일까요? 찝찝함이 가시지 않습니다.
사안의 엄중함에 비해 허손구 대표의 말은 너무 명쾌하게 나왔습니다. 사업 파트너였던 임 과장의 자살에도 불구하고 임 과장의 마지막 말을 정면 반박함으로써 고인을 궁지에 모는 주장을 저리 명쾌하게 하는 게 의외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의심합니다. 저 명쾌함에 함정이 숨어있을 가능성을 경계합니다.
막연한 의심은 아닙니다. 나름의 정황을 갖춘 의심입니다.
허손구 대표는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또 하나 유의할만한 말을 남깁니다. 임 과장의 자살에 안타까움을 표하는 말이었는데요. 이런 말이었습니다.
"(국정원의) 다른 부서에서는 이번과 같은 일이 생길까봐 진행도 못하던 것을 애국심만으로 소신껏 추진한 분인데 사실도 제대로 밝히지 못한 채 떠나서 안타깝다."
이 말을 듣고 당장 드는 의문은 '어떻게 알았나' 하는 점입니다. '국정원의 다른 부서는 진행도 못했다'는 건 사실의 영역에 있는 건데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오직 임 과장만이 자신에게 연락을 해와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허손구 대표는 국정원의 다른 부서가 진행도 못했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이런 일이 생길까봐' 진행도 못했다는 '사실'까지 언급했습니다.
'국정원의 다른 부서는 진행도 못했다'는 단순 사실 표현이 아니라 '이런 일이 생길까봐 진행도 못했다'는 입체 사실 표현을 한 것입니다. 허손구 대표는 도대체 어떤 근거로 이런 입체적 사실 표현을 한 걸까요? 베일에 가려져 있는 국정원 조직을 들여다보는 건 아무리 사업 파트너라 해도 불가능했을 터, 그럼 임 과장이 미주알고주알 알려준 걸까요? 자기와 비슷한 일을 하는 부서가 무엇무엇이고, 이 부서들은 이러저러 해서 움직이지 않았다고 시시콜콜 얘기해준 걸까요? 국정원 입사 20년이 넘는 베테랑 과장이?
허손구 대표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런 '사실'을 알게 된 건지, 그 의문점을 확인하면서 다른 문제로 넘어가죠. 허손구 대표의 말이 가져올 효과입니다.
허손구 대표의 이 말엔 두 개의 복선이 깔려있습니다. 첫째, '중국에 있는 내국인'에 대한 해킹은 임 과장의 단독 플레이였다고 암시하는 점입니다. 둘째, 임 과장을 제외한 국정원 다른 부서는 내국인에 대한 해킹을 꿈도 꾸지 않았다고 강조하는 점입니다.
허손구 대표의 말에 깔린 이런 복선이 공식화 되고 정설화 되면 국정원 해킹 사건은 또 다시 '국정원 조직과는 상관없는 개인의 일탈 행위'가 돼 버립니다.
아울러 물타기와 자르기도 자동으로 이뤄집니다. 국정원이 내국인을 사찰했을 것이라는 의심 앞에 '중국에 있는 내국인' 사례 하나가 던져짐으로써 불신의 해소 창구가 열리는 대신 그 사례의 성격이 개인의 일탈 행위가 빚은 예외적인 경우로 한정돼 국정원 조직 전체가 보호됩니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허손구 대표의 말 또한 검증 대상에 올려야 합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부터가 검증 항목인지를 분명히 갈라야 합니다.
물론 이건 예외입니다. '중국에 있는 내국인'을 해킹했다는 허손구 대표의 말은 사실로 확정될 가능성이 큽니다. 허손구 대표의 말이 순수하게 사실 전달 차원이었다면 더 말할 것도 없고, 허손구 대표가 정치적 복선과 목적을 깔았다는 의심이 사실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앞의 분석에 따르면 정치적 복선과 목적 속에서 '중국에 있는 내국인' 해킹은 상황 유도를 위해 내주는 '사실'이니까요.
이 기사는 7월 22일 <시사통> '이슈독털' 내용입니다. (☞바로 가기 : <시사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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