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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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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사람들

[김형찬의 동네 한의학] 유족의 남은 생을 도웁시다

"한참 만에 오셨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들르시던 할머니께서 계절이 두 번 바뀐 후 내원하셨기에 안부를 물었습니다. 별 표정 없이 잘 지냈다 하시더니, 조금 서둘러 치료실로 들어가셨습니다. 잠시 후 몸을 살피러 들어가니 할머니께서는 작은 목소리로 눈시울을 살짝 붉히시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양반, 갔어요."

진료를 하다 보면 꽝! 하고 '막히는' 순간이 있는데 이럴 때가 그렇습니다. 환자의 짧은 말 속에 녹아있는 여러 감정이 일순간에 밀려들어서 잠시 손을 잡아 드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지요. 할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몇 달간은 사람들 보기도 싫고 뭔가 죄를 지은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바깥나들이를 거의 안 했다가 이제야 좀 추스르셨다고 합니다. 손자 이야기를 비롯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더니, 잠을 길게 못 주무신다 하셔서 심장을 편하게 하는 자리에 침을 놓아 드렸지요.

동네에서 여러 해 진료를 하다 보니 이런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지난 봄에 진료했던 환자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가 하면, 배우자를 잃은 상심에 빠져 급속히 몸이 쇠약해진 분을 만나기도 합니다. 살아있는 존재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있지만, 성현들의 말씀처럼 담담하게 죽음을 받아들이기란 어려운 일. 그래서 이런 분들이 오시면 가능한 좀 더 많이 대화합니다. 책에서 읽었거나 경험한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위축된 몸과 마음의 상태를 풀어내려고 노력합니다.

이럴 때는 배우자나 자녀의 죽음과 같은 감당하기 힘든 사건을 겪은 분들의 심리적 회복을 도울 수 있는 복지서비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이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면, 이분들의 삶의 질은 매우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로 인해 또 다른 질병이 생길 수 있습니다. 죽음은 숙명이어서 누구도 피할 수 없겠지만, 그 당사자와 가까운 사람은 조금 더 잘 연착륙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지요.

"그녀는 유독 오래 산 이들이 죽음을 준비하며 내비치는 깊은 체념의 상태, 즉 삶이 고치를 트는 단계에 들어선 것이었다. 강렬한 정열을 불태우며 살아온 오래된 연인들도, 정신적 공감으로 탄탄하게 엮인 오랜 벗들도 그 단계에 들면 서로를 만나기 위해 여행길을 준비하지도, 심지어는 길을 건너지도 않는다.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는 소통할 수 없음을 잘 안다." (<우리 딴 얘기 좀 하면 안 돼?>(라즈 채스트 지음, 김민수 옮김, 클 펴냄))

아버지를 떠나보내면서 경험했지만, 한 사람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많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많은 의료 행위 또한 환자를 위한 일인지, 아니면 남아 있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위로를 주기 위한 일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지요. 단지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진료를 하는 사람으로서 바라는 것은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과 그를 사랑해온 사람들이 너무 고통스럽지 않았으면 하는 것입니다.

당사자가 겪을 수 있는 신체적인 고통을 최소화하고, 그가 인간적인 품위를 잃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라면 학문의 경계를 넘어 수용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천천히 생을 마치는 동안 가족이나 자신의 삶을 함께했던 사람들과 맺었던 좋고 나빴던 매듭을 풀어낼 수 있다면, 본인은 물론 주변 사람들 또한 그 죽음을 받아들이는 게 조금 더 수월할 것 같습니다. 전쟁 같았던 삶이라도 마지막 순간은 평화로우면 좋겠다는 것이지요.

진료를 마치고 돌아가시는 할머니께 앞으로는 매주 한 번씩 마실 나오듯 들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분명 자제분들이 몸에 좋다고 해드린 것들이 있을 텐데, 그거 한쪽에 밀어두지 마시고 챙겨 드시라고 했지요. 그랬더니 어떻게 알았느냐며 아주 잠깐 웃으셨습니다. 앞으로 이 분이 오시면 조금 더 많이 시답잖은 이야기들을 해드릴 생각입니다. 그 이야기들이 오늘처럼 할머니께 잠깐이라도 웃음을 드릴 수 있다면 제 노력이 꽤 괜찮은 치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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