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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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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

[서평] "그것은 단지 성폭력일 뿐이다"

요즘 데이트 (성)폭력이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인터넷 상에서 한 여성이 데이트 폭력을 당한 사실을 폭로하였고 곧이어 다른 여성들의 폭로가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폭로는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다수의 사람들이 '그냥 연인 사이에 있을 수 있는 싸움 아닌가', '왜 몇 년이나 지난 일을 이제야 이야기하는가', '둘 사이의 문제는 둘이 알아서 해결해라' 등의 피해자를 비난하는 글들을 남긴 것이다. 이런 모습은 데이트 (성)폭력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단상을 보여준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폭력이라고 하면 늦은 시각의 어두컴컴한 밤, 낯선 이에 의한 피해를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성폭력 피해의 대다수는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2014년 상담통계자료에 의하면 성폭력상담 전체건수 1450건 중 '아는 사람에 의한 피해'가 1174건(81%)으로 집계되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특수하고 밀접한 관계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특히 데이트 성폭력의 경우에는 범죄가 아닌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사랑싸움이나 과도한 구애행위로 치부되고, 피해 당사자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식의 비난을 받거나 수치심과 두려움으로 사실을 숨기거나 외면하게 된다. 다수의 가해자들은 성별화된 사회규범을 이용하여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고, 피해자 역시 여성성에 대한 내면화된 통념에 비추어 스스로 피해를 유발했다는 죄의식을 갖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지만 가장 은밀하게 숨겨지는 성폭력인 것이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로빈 월쇼 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역, 미디어 일다, 2015)는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에 관한 책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잡지인 <미즈Ms>에 의해 1988년 발간된 <I never called it rape>(나는 그것을 결코 '강간'이라 부르지 못했다)을 번역하였으며, 미국 전역의 32개 대학에 재학 중인 남녀 대학생 6159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다양한 인터뷰의 결과물이다.

책을 읽다보면 의아하게 생각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6년 전 발간된 책인데 '현재' 우리의 이야기와 놀라우리만치 닮아있기 때문이다. 26년 전이나 지금이나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똑같은 사회 문제로 등장하고 있다.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로빈 월쇼 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역 ⓒ미디어 일다
책의 저자인 로빈 월쇼는 자신도 데이트 성폭력의 피해자임을 밝히며, 가해자가 자신을 강간한 것임을 깨닫기까지 약 3년이 걸렸다고 한다. 가해자가 과거에 성관계를 한 적이 있는 전(前) 남자친구라는 사실 때문에, 자신의 경험에 강간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며, 피해 사실을 분명하게 자각하는데 꽤 시간이 걸렸음을 고백한다. 이는 데이트 성폭력의 피해자들에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모습이다.

이 책은 사건의 책임이 피해자에게 있지 않음을 강조한다. 우리 사회가 다른 범죄 사건의 피해자들과 성폭력 피해자를 구분해서 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예를 들어 강도를 당했다고 해서 피해자가 강도를 ‘당할 만하다’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자금 횡령 피해를 입은 기업에게 횡령유도죄를 묻지 않는 것과 달리 유독 성폭력 사건, 특히 아는 사람에 의한 강간에 대해서 피해자의 책임을 묻고, 심지어 가해자보다도 오히려 피해자의 책임이 더 큰 것으로 여기는 사회 풍조에 대해 비판한다.

또한 남자들이 학습한 과도한 '남성성'과 여성들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비판한다. 남성은 성적으로 흥분하면 여성을 강간하는 행위를 자제할 수 없다는 남성의 성적 욕구에 대한 통념과 여성들도 '사실은 원하고 있다'는 등의 통념이 결합되어 성폭력 상황을 정당화시키고 있으며, 여자아이들은 수동적이고 나약하며 자기 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도록, '나약한 여성에게는 지지자 혹은 보호자로서의 남성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잘못 받아들이도록 학습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의 남성들이 '여성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도록 배우고 있는가'라는 주제와 긴밀히 연관된다. 그들은 여성들이 단지 문란해 보이지 않기 위해 성관계를 거부한다고 배운다. 또한 속으로는 원하면서도 겉으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게 바로 여성들이라고 배운다(…) 성적인 관계에서 “안 돼”라는 여성의 말이 남성에게 종종 아무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다"(p.162)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종교, 교육, 소득 수준과 상관없이 발생하고 있으며, 많은 경우 남녀가 학습해온 사회적 행동에서 비롯한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남녀 간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사회적 관계들을 새롭게 정의할 필요성이 있다. 남성성, 여성성에 대한 왜곡된 가치관을 탈피하도록 교육받고, 성폭력을 정당화하는 통념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를 인지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한국사회에서 최근에야 이루어지고 있는 '데이트 폭력'에 관한 논의는 여전히 우리에게 잔존하는 통념을 그대로 투영하고 있다. 성폭력이 대부분 낯선 사람에 의해 발생하며, 여성들도 즐긴다는 식의 잘못된 통념들은 <그것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니다>를 읽어보아야만 하는 이유이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썸도 데이트도 섹스도 아닌 성폭력일 뿐이다.


이 책을 통해 독자들이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들을 이해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나아가 그동안 썸이라고, 데이트라고, 사랑이라고 믿어왔던 관계에 대해 나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필자 양정운은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설연구소 '울림' 연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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